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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투량환주술(偸梁換柱術) – 교조모위패(矯詔謀位牌)

by 중은우시 2015. 7. 27.

 

<사기.진시황본기>에 보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신하들에게 제도를 정하게 명하고, 승상 위관, 어사대부 풍겁, 정위 이사는 백관들과 협의한 후, “….황제의 명은 제(制)로, 황제의 영은 조(詔)로 한다.”는 원칙을 정한다. 그 후 황제의 영은 “조서(詔書)”라 부르고, 특히 그 중에서도 죽기 전에 남기는 유언을 “유조(遺詔)”라 부른다. 유조는 황위계승과 관련되기 때문에 특히 중요성이 강하다.

 

중국역대에 유조를 위조하여 황제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사건중 유명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가 황제에 올라 진이세가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희제의 넷째아들 윤진이 황제에 올라 옹정제가 된 것이다.

 

기원전209년 순유(巡遊)에서 돌아오던 진시황이 사구평대에서 붕어한다. 당시 진시황을 수행하던 인물은 나중에 지록위마로 유명해지는 조고(趙高), 승상 이사(李斯), 그리고 호해(胡亥)였다. 알려진 바로는 진시황이 조고에게 “장남 부소(扶蘇)를 함양으로 부르라”고 구두로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부소는 장군 몽염과 함께 상군에서 흉노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조고는 즉시 조서를 써서 부소에게 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이사, 호해와 결탁한 후, 몽염과 부소에게 “수년간 흉노와 싸웠으나 아무런 공을 세운 바 없으니, 부끄러운 줄 알면 자결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작성해서 보낸다. 그리고, 자신들은 진시황의 시신을 싣고 비불발상(秘不發喪)하며, 북상한 후, 산서로 들어가는 우회로를 통해 함양으로 향한다. 조서를 받은 몽염은 조서의 내용에 의심을 품지만 효심이 지극한 부소는 바로 자결한다. 부소가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조고등은 바로 함양으로 가서 진시황의 장례식을 치르고 호해를 진이세 황제에 앉힌다.

 

청나라의 강희제가 죽은 후 옹정제가 즉위한데 대하여는 여러가지 판본이 전해내려온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옹정제가 유조를 위조하여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서 만들어진 버전은 이렇다. 유조의 내용중 “전위십사자윤정(傳位十四子胤禎)”(윤정은 옹정제가 등극한 후 피휘를 위해 윤제(允禵)로 개명한다)을 “전위우사자윤진(傳位于四子胤禛)”으로 바꾸고, 유조를 위조하는데 공을 세운 보군통령 룽커도(隆科多)와 장군 연갱요(年羹堯)는 즉위후에 죽여버린다는 것이다(룽커도는 강희제에게 유조를 받아 선포한 인물이고, 연갱요는 병력을 장악하여 다른 황자들이 북경성과 황궁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즉, “십(十)”을 “우(于)”로 “정(禎)”을 “진(禛)”으로 바꾸었다는 것인데, 글자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그럴 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겨보면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청나라의 조서는 만주어와 한문의 두 언어로 기록했기 때문에, 한자만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둘째, ‘…에게’라고 할 때 번체자에서는 ‘어(於)’를 쓴다. 간체자에서는 ‘於’를 ‘于’로 고쳐서 쓰지만. 셋째, 황자들을 언급할 때는 ‘황십사자(皇十四子)’, ‘황사자(皇四子)’로 쓰지 그냥 ‘십사자(十四子)’, ‘사자(四子)’로 쓰지 않는다.

 

이외에도 수양제(隋煬帝)는 여러가지 수단으로 형인 양용(楊勇)을 몰아내고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최후에 수문제 양견이 다시 그를 태자위에서 폐위시키고 양용을 세우려 하자, 조서를 위조하여 양용을 사사시켜, 호해가 부소를 죽인 장면을 그대로 재연한다. 영락제가 중병으로 병석에 눕자 영락제 주체의 셋째아들로 황위를 노려오던 주고수(朱高燧)의 심복 맹현, 고이정등은 황제를 독살하고 주고수를 다음 황제에 앉히는 유조를 위조해두었으나, 고이정이 술에 취하여 이를 누설하는 바람에 들통이 나서 실패하고 만다.

 

우리나라에서도 창업주가 사망한 후 유언장위조논란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듯이, 유조를 위조하는 것은 황위승계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