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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양장피단술(揚長避短術) – 홍인시효패(弘仁示孝牌) 함풍제편

by 중은우시 2015. 7. 27.

 

청나라에서 후임황제를 정하는 방식은 네가지가 있었다. 처음에는 귀족추대방식으로 청태종과 순치제가 이런 방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다음에는 유조계위방식으로 강희제, 옹정제, 동치제가 이 방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 다음에는 비밀입저방식을 취하는데,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가 이 방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마지막은 의지계위방식으로 의지는 황태후의 명을 가리킨다(여기서는 서태후). 이 방식으로 황제에 오른 인물은 광서제, 선통제(부의)가 있다. 동치제는 외동아들로 자동승계되어 예외이다. 청나라는 한족황조에서처럼 황태자를 두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강희제가 황태자를 둔 적이 있으나 결국 두번이나 폐위시켜 황태자가 황위를 승계하지 못한다)

 

그중비밀입저방식이 가장 유명한데, 전임황제가 후임황제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적어서 금갑에 넣어 자금성의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넣어두고, 전임황제가 죽으면 꺼내서 열어 확인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황제가 죽는 날까지 누가 다음 황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도광제는 모두 9명의 아들을 두었다. 황장자 혁위(奕緯), 황이자 혁강(奕綱), 황삼자 혁계(奕繼), 황사자 혁저(奕詝) 황오자 혁종(奕誴), 황육자 혁흔(奕訢), 황칠자 혁현(奕譞), 황팔자 혁합(奕詥), 황구자 혁혜(奕譓)가 그들이다. 이중, 혁위, 혁강, 혁계는 요절한다. 도광26년(1846년) 도광제가 후계자를 정해야 할 때 황사자, 황오자는 모두 14살, 황육자는 13살이었다. 황칠자, 황팔자, 황구자는 모두 6살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어서 후보에서 제외되고, 황오자 혁종은 그 해 정월 후사가 없던 이복동생 순각친왕 면개의 양자로 보내버린다. 결국 후보는 황사자 혁저와 황육자 혁흔이 남았다. 혁저는 황후소생이고 나이가 많은 것이 장점이고, 혁흔은 귀비소생이지만, 그녀는 도광제가 가장 총애하는 여인이었으며, 문무의 모든 방면에서 혁저보다 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혁저는 생모인 황후가 일찍 죽어서 혁흔의 생모인 귀비의 손에 자란다. 도광제는 후보자인 혁저와 혁흔에게 각각 스승을 붙여준다. 혁저의 스승 두수전(杜受田)과 혁흔의 스승 탁병념(卓秉恬)은 모두 뛰어난 학자였다. 다만, 두수전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도광제의 심리를 잘 읽었으나, 탁병념은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수재로 논쟁을 좋아하였다.

 

어느 봄날, 도광제는 황자들에게 남원(南苑)으로 가서 사냥을 하도록 명하였다. 청나라는 무(武)를 숭상하여 사냥을 아주 중시했고 황제가 갖추어야할 기본자질로 여겨졌다. 혁저는 사냥실력이 혁흔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인 두수전에게 어떻게 해야할지를 물어보니 두수전은 이렇게 가르친다: “사냥터에 도착하면 화살 하나도 날리지 마십시오. 황제께서 이유를 물으시면, ‘시절이 봄이고 새나 짐승들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때인데, 차마 산 것을 죽여 천륜을 어기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냥에서의 실력으로 형제들과 다투기도 싫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과연 사냥에서 혁흔은 풍성하게 사냥을 하였지만, 혁저는 한 마리도 잡지 않고 두수전이 시키는대로 한다. 그러자 도광제는 혁저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야말로 황제가 할 말이로다!” 이것이 두수전이 가르쳐준 ‘장졸시인(藏拙示仁)’의 수법 즉, 약점을 감추고 어짊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광제가 병석에 누웠을 때 혁저와 혁흔을 부르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에 대하여 묻겠다고 말한다. 혁흔의 스승 탁병념은 혁흔에게 “아는 것을 모두 말하고, 말을 아끼지 말라”고 조언한다. 반면에 두수전은 혁저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시국이나 정사에 대하여 얘기하면 절대로 황육자를 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대책이 있는데, 만일 황상께서 스스로 늙고 병들어 이 자리를 물려주어야겠다고 말씀하시면 그 자리에서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부황에 대한 지극한 정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혁저는 그의 계책에 따랐고, 도광제는 혁저가 효자라고 여기게 된다. 이것이 ‘장졸시효(藏拙示孝)’의 수법 즉, 약점을 감추고 효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도광제의 사후에 열어 본 비밀입저금갑에는 “황사자 혁저를 황태자로 삼는다. 황육자 혁흔을 친왕으로 삼는다. 도광26년 6월 16일”이라는 유지가 들어 있었다. 결국 말하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을 이기지 못했다. 아마도 도광제는 혁흔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줄줄이 읊는 것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견식이 뛰어난 점에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주면, 내가 그동안 해온 정책은 모로지 뒤집어 버리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혁저는 효성이 지극하므로 자신이 만들어놓은 정책을 그대로 시행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도광제는 혁저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결국 청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