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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2차대전후 중국에 남겨진 일본고아는 얼마나 되는가?

by 중은우시 2015. 7. 15.

글: 학길림(郝吉林)

 

소위 일본유고(日本遺孤)는 1945년 일본이 패전으로 투항한 후, 일본참략자들의 철수 및 송환기간동안, 중국에 버려져서 중국인이 데려가서 기른 일본고아를 가리킨다. 고아중에는 군정인원의 자녀도 있고, 공상계의 후손도 있다. 그러나 가장 맣은 것은 일본개척단의 후대이다. 총인원수는 4000명이상이고, 중국의 29개성, 시, 자치구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중 90%이상은 동북삼성과 내몽고자치구에 집중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전쟁고아들이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적성국에 버려지고 또한 일본침략자의 유린과 노역을 당한 국가의 인민들이 길러주었다는 것은 고금중외 전쟁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다.

 

1931년 9.18사변후 일본정부는 이민정책을 추진한다. 목적을 가지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중국의 동북지방(만주)에 이민을 보낸다. 대량의 일본 군정인원, 공상계인사 및 무장이민이 속속 동북으로 들어간다. 1936년 일본 광전홍의(廣田弘毅) 내각은 20년내에 동북에 100만호, 500만명의 방대한 이민을 보낼 계획을 내놓는다. 이 이민숫자는 당시 일본농업인구의 1/4을 차지할 정도이다. 그리고 동북총인구수의 10%에 해당한다. 실제로 1945년까지, 일본의 동북이민자수는 150만명에 달하였고, 그중 농업이민이 30만명에 달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홍군이 신속히 동북으로 출병하고, 수십만의 관동군은 순식간에 와해된다. 군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일본군정, 공상 및 개척단민은 긴급히 철수해야 했고, 연해로 모여서 배를 타고 귀국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백만의 피난대군이 발생한다. 조사에 따르면, 일본유고중 절대다수는 개척단이 철수할 때 버려진 것이다. 특히 길림, 흑룡강성에 분산되어 있던 개척단민들은 대부분이 노약자나 부녀자였다. 긴급히 철수하는 과정에서,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었으며,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천리밖의 항구도시까지 도망쳐야만 했다. 일부의 사람들은 배고픔과 추위로 고통을 겪고, 몸에 질병을 얻어 도중에 죽고 만다. 그녀들 곁에 있던 아이는 황산야령, 길거리, 역, 항구에 버려지게 된다. 그리고 어떤 부모는 도망치는 중에 아이가 병사, 아사, 동사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중국인에게 주어 길러달라고 부탁했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신이 도망치기 위하여, 데리고 가기 곤란한 영유아를 길가나 들판에 버려서 늑대나 개의 먹이가 되도록 놔두었는데, 중국인이 거두어 길렀다. 더욱 심한 경우는 당시의 일부 강경 파시스트주의자들은 도망치는 중에 자신의 동포들에 대한 집단살륙을 벌였다. 요행히 죽음에서 벗어난 고아는 중국인이 거두어서 집으로 데려가 길렀다.

 

중국인에게 거두어지기 전에 그들중 일부는 의복이 남루하고, 피골이 상접했다; 어떤 아이는 병에 걸려 있었고, 상처투성이였다; 어떤 경우는 동상에 걸리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자료를 보면, 절대다수의 전쟁고아는 거두어질 때 죽음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었으며, 갖은 고통을 다 겼었다. 장춘의 75세된 노인 위징(于涇)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의 장춘 기차역에는 거의 모두 일본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차를 타지 못하여, 아이를 길가에 버렸다. 중국어를 할줄 알면 중국백성들에게 아이를 거두어달라고 애걸했다. 83세의 샹꾸이천(項貴臣)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피난하려고 기다리는 일본인이 땅 위에 누워 있는데 어른도 온 몸이 나무껍질같았고, 보는 사람이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바깥에 있는 작은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은 모두 어린아이였다.

 

바로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이 침략전쟁으로 원래 부모의 곁에서 천륜의 기쁨을 누려야할 아이들이 고아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국타향에 버려진다. 그러나 일본유고는 행운아이기도 했다. 중국정부와 인민은 이들 중국대지에 버려진 적국의 아동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하지 않고, 은혜를 베푼다. 넓은 흉금으로 그들을 거두어 주었다. 항전승리후, 비록 당시 중국인민은 여전히 힘들게 살았지만, 갈길없고 생명이 위험한 일본유고에 대하여 자비의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들을 사망의 언저리에서 건져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젖과 자신이 먹을 것을 남겨서 아이들을 길렀다. 동시에 입을 것 먹을 것을 아껴가면서 그들을 소학, 중학, 대학까지 보내어 인재로 길러준다. 그들이 성년이 된 후, 다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서 결혼을 시키고, 사업을 하게 해주었다.

 

일본유고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족을 그리는 정이 강해진다. 1950년대초, 일본교민의 귀국을 협조하던 기간에 소수의 일본유고는 부모찾기활동을 벌인다. 60년대에 이르러 일부 일본인사들과 일부 민간단체는 중일우호협회, 중국적십자회일본방문대표단 및 재중국일본교민등 조직과 개인을 통하여, 각종 형식의 부모찾기활동을 벌인다. 1972년 9월, 중일양국은 우호적인 협상을 거쳐 국교정상화를 이룬다. 일본유고들이 일본을 방문하고 부모를 찾는데 좋은 조건이 형성되었다. 1978년 8월,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후, 재중국 일본유고의 부모찾기활동이 질서있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더 많은 일본유고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부모를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중일양국정부는 여러번의 연구검토와 협상을 거쳐, 1981년부터 양국정부의 관련부서가 책임지고 차례차례 조직적으로 중국의 일본유고들이 일본을 방문하여 부모를 찾게 해준다. 모든 비용은 양국정부가 책임졌다. 그후 중국의 일본유고의 부모찾기활동은 더욱 대규모로 전개된다.

 

2000년이 되자, 중일양국정부는 이미 31차례의 재중국일본유고의 일본방문단을 조직했고, 전후로 2,121명의 고아가 일본을 방문하고, 666명은 친척을 찾는다. 전체 인원의 약 31.8%이다. 동시에 이미 신분이 확인된 일본유고는 차례로 일본으로 가서 정착한다.

 

일본후생성의 자료에 따르면, 1972-1995년 사이에 일본으로 가서 정착한 전쟁고아는 2,171명이다. 배우자와 자녀를 데려갔는데 그 수가 7,801명에 이른다. 중국관련부서의 통계숫자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 정착한 일본유고의 총수는 3,800명이상이다.

 

중국정부와 인민들이 고아를 길러준 선행은 중일양국 각계인사들의 칭찬을 듣는다. 1983년 4월 3일, 일본 외상 아베신타로는 일본에 부모를 찾기 위해 간 전쟁고아를 접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다. 이 불행한 전쟁때문에, 너희가 중국에서 38년간 생활해야 했다." 일본 효고현의 한 우호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중국에 존경하는 감정을 갖고 있다. 중국은 일본고아에 대하여 인도주의적 대우르 ㄹ해주고, 우애가 충만했다. 이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1984년 10월, 일본유고대표는 하르빈에서 일본후생사애신 도부항삼(渡部恒三)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한다: "이전의 일을 잊지 않고, 이후의 일에 거울로 삼는다. 중일양국관계사를 펼쳐보면 일찌기 불행한 경력이 있었다.  역사적인 원인으로, 우리같은 일본고아는 중국침략전쟁에서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고,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 갈 곳이 없었다. 우리가 죽음의 언저리에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 중국인민과 중국정부는 우리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같은 어린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고, 우리가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정부는 다시 우리를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게 해주었고, 졸업후에는 일자리도 주었다. 우리가 가정을 만들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적할만한 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수백의 일본유고가 중국각지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중에는 정부관리도 있고, 노동자 농민도 있다. 그리고 기술자와 전문가 학자도 있다. 그들이 중국에 남아 있고 돌아가지 않은 원인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들을 길러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애정때문일 것이다. 장춘의 일본유고이자 시인인 우덕수(于德水)는 유고신문이 확인되었다. 같은 해 9월 일본으로 가서 부모를 찾는다. 그러나 양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어 일본에 정착할 것을 신청하지 않았다. 양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다시 3년상을 치른다. 그리고 1992년에 비로소 일본으로 간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제2의 고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향(思鄕)>이라는 시를 짓는다:

 

신재부상심재화(身在扶桑心在華) 몸은 일본에 있으나 마음은 중국에 있다.

평종만리도천애(萍踪萬里到天涯) 부평초처럼 만리를 떠돌아 하늘끝까지 왔다

앵화만목유최루(櫻花滿目惟推淚) 사쿠라가 눈앞에 가득하니 눈물이 흐른다

야야몽혼도구가(夜夜夢魂到舊家) 밤마다 꿈에는 혼이 옛집을 찾아간다

 

1995년 그는 다시 장춘으로 되돌아와서, 자금을 투자하여 공장을 짓는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밝힌다.

 

불욕성명전후세(不欲聲名傳後世) 명성을 후세에 전하기를 원치는 않는다

병장열혈환화평(拼將熱血喚和平) 뜨거운 피로 평화를 힘껏 외친다

세계원본다재난(世界原本多災難) 세계는 원래 재난이 많다

주검위리권우경(鑄劍爲犁勸耦耕) 검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 농사나 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