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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만주에서의 일본군 매춘업내막: 일본에서 7만기녀를 수입하다

by 중은우시 2016. 1. 7.

작자: 미상

 

20세기말, 한 중국의 역사학자는 자료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아말리도 비스파라는 이탈리아간첩이 1930년대에 쓴 자술서를 발견한다. 자술서는 상세하고 진실되게 그가 중국의 만주에 있는 동안 일본군을 위하여 일하고, 나중에는 중국항일유격대를 도와준 파란만장한 경력을 기록했다. 또한 일본군이 만주를 통치할 때의 손가락질받을 만행을 고발했는데, 거기에는 일본이 7만의 기녀를 만주로 파견하여 국가를 위해 돈을 벌게 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관동군의 위협에 일본간첩이 된 아말리도 비스파는 이탈리아 아그라 사람이다. 1988년에 태어났다. 24살 때, 그는 기자 신분으로 세계를 여행하며, 남미, 호주 및 아시아의 곳곳을 다녔다. 제1차세계대전때, 그는 연합국에 고용되어 중국에서 정보를 수집하며, 간첩생애를 시작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작림(張作霖)의 특무기관에 들어가고, 1924년 중국국적을 취득한다.

 

1932년 2월의 어느 날, 한 일본군인이 돌연 비스파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는 관동군 특무기관두목인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가 그를 보고싶어한다고 말하며 강제로 끌고 갔다. 도이하라는 '9.18사변'전에 비스파와 알고 지냈고, 비스파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비스파와 같은 노련한 간첩이 일본을 위하여 일한다면 만주를 통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위협, 협박수단을 써서 비스파를 끌어들인다.

 

만나자마자 도이하라는 말한다: "비스파 선생, 나는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것이다. 오늘부터, 당신은 일본을 위해서 일한다. 당신의 가족은 이미 우리가 보호하고 있다. 나는 일본에 악의를 가진 사람은 총살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9.18사변후 베스파는 일본군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직접 목도했다. 도이하라의 위협에 그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어서 그를 일본관동군정보국 국장의 사무실로 데려간다. 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은 아주 가난한 국가이다. 우리는 반드시 방법을 강구하여 중국인들이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는데 필요한 거액의 비용을 부담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당국은 이미 믿은만한 상인들에게 독점경영권을 주었다. 거기에는 철로의 화물밀수, 아편관의 경영, 일본기녀수입, 도박장개설등이 포함된다. 이들 상인은 일본정부에 거액의 돈을 낸다. 그래서 우리 첩보부서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간접적인 수단을 써서 중국인, 러시아인, 특히 유태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재산 대부분을 내놓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일본인이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너의 임무는 바로 서방인의 신분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비스파는 강압에 못이겨 일본군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때부터, 비스파는 일본간첩이 된다. 그후 근 5년간 그는 일본인이 저지른 많은 죄악을 같이 저지른다. 나중에 그는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상세히 기록한다.

 

일본군이 매춘사업을 조직한 내막을 폭로한 자술에서, 일본이 공식적으로 매춘업을 경영한 광경을 기록했다.

 

기원을 개설하는 것은 일본이 고액의 이윤을 획득하는 수단의 하나였다. "9.18사변"후, 일본 관동군은 일부 상인들로 하여금 회사를 만들게 하여 일본국내에서 기녀를 수입한다. 이들 회사는 많은 일본부녀를 중국 만주로 보내어, 기원, 다방, 바, 댄스홀과 식당에 공급했다. 규모를 확대하기 위하여, 일본의 많은 대기업과 은행도 이 업종에 거액의 투자를 한다.

 

하르빈에 일본기녀를 수입하는 회사는 톨고파야대가에 개설되어 있었다. 문앞에는 일본헌병이 지키고, 국적이나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든지 들어가서 여자를 살수 있었다. 기원을 운영하려는 사장이 이곳에 들어가면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그들은 왕왕 호화롭고, 멋진 유럽식 방으로 안내되어, 사진첩을 보게 되는데, 여자 한 명 한 명의 사진 옆에는 문자가 있다. 여자가 처녀인지 여부, 키가 큰지 작은지, 뚱뚱한지 말랐는지, 학력수준 그리고 가무기예등등.

 

사람을 고르고 나면 쌍방은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에서는 임차하는 가격과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대다수의 계약규정에서는 임차기간이 5년이다. 사장은 25%의 임차료를 사전에 지급하여야 한다. 개략 반달이나 20일후, 사장은 은행으로부터 통보를 받게 된다: "화물"이 도착했으니, "대금"을 지급하라고. 즉 잔금 75%를 지급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장이 은행에 '대금'을 완납하고 나면, 영수증을 받는다. 영수증을 회사에 갖다주면, 회사직원이 여자들이 모여있는 여관으로 데리고 가고, 거기서 '화물'을 수령한다.

 

하르빈의 관례에 따르면, 기원 하나가 새로 여자들을 데려오면, 그녀들을 새로 화장시킨 다음, 그녀들을 화려한 차량에 태우고 시내를 한바퀴 돈다. 차에는 광고를 크게 써붙이고, 위에는 새로온 여자들의 여러가지 장점을 쓴다. 가장 두드러지게 쓰는 것은 자연히 기원의 위치이다.

 

일본기원의 사장들이 비인간적이라는 것은 극동에서 악명이 자자하다. 그들은 수중의 여자를 노예로 여기고 마음대로 짓밟고 욕하고 때리며 심지어 죽여버린다. 만일 한 여자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면, 경찰은 도주범을 붙잡듯이 체포해와서 주인에게 돌려준다. 도망자는 심한 처벌을 받게 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대부분의 기녀는 일본으로 되보내진다. 비스파는 기녀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몇 달 후면 계약기간이 끝납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부모님이 골라준 남자와 결혼합니다." 기원에는 왕왕 아편관, 도박장도 같이 붙어 있다. 이것들은 일본통치하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지닌 어두운 장소였고, 동북삼성에 많이 있었다. 흑룡강과 길림에는 모두 550개의 합법적인 기원이 있었고, 7만의 일본부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르빈에만도 기원이 112개 ,아편관이 56개, 커피숍이 194개 있었다.

 

일본의 "가(家)" 제도에서 자녀는 가장의 개인재산으로 취급된다. 가장은 자녀의 평생을 결정할 권력이 있다. 매매를 하건 전당을 잡히건. 일본이 중국의 법률을 본받아 율령을 제정할 때, 중국법률중의 '십악(十惡)'에서 근친매매를 금지하는 '불목(不睦)'을 삭제하고, 원래의 "십악"을 "팔학(八虐)"으로 줄여버린다.

 

일본이 이렇게 한 원인은 당시 일본에서는 아동매매와 근친결혼이 아주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이 곤궁하여, 아이를 팔아치웠다. 특히 에도시대에 인신매매상황은 더욱 성행한다. 어떤 일본가정은 매년의 세금을 내지 못하여 자녀를 저당잡히기도 했다.

 

일본에서 자녀매매의 주요 대상은 딸이다. 일본의 봉건사회후기에 창녀의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많은 여자들은 팔려진 후에 창녀가 된다. 가정은 기본적으로 이들 여자들에 의하여 유지된다. <일본여성사.근세>의 기록을 보면, 보통의 농촌여자가 기원에 팔리면 겨우 13냥을 받는다. 그렇지만, 팔려가는 여자아이는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받은 교육은 바로 '가'의 이익을 위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하여 자기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배운다. 그래서 일본의 여자는 가정을 위하려 팔려간다. 아무도 이들을 멸시하지 않을 뿐아니라, 심지어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다. 일본에서는 모친과 동생을 봉양하기 위하여 몸을 판 여자가 '효심이 기특하다"는 이유로 일본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일본인은 사무라이가 영주, 다이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봉공(奉公)이고, 노비가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도 '봉공'이고, 여자가 육체를 파는 것도 마찬가지로 '봉공'이다. 메이지시대에, 메이지유신의 공신인 이토 히로부키는 영국 '데일리 코란트(Daily Courant)'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곽(遊廓)을 폐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유곽은 바로 기원이다. 그의 이유는 이러했따. 도덕적인 각도에서 말하자면 기녀는 고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효도를 다하기 위하여 몸을 팔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본은 표면적으로 소녀를 매매하는 행위를 볼 수 없는 것같았다. 그러나 기실 이런 일은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비록 일본인들이 표면적으로 '임차'라고 말하지만, 이 일의 성격은 바로 '인신매매'이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도 수백원에 딸을 팔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녀를 매매하는 중개인과 협상을 마친 후, 중개인은 부친에게 돈을 지급한다. 그 후에 딸은 남겨둔다. 딸이 그 후에 해야하는 일은 몸을 팔아서 자신의 자유를 사는 것이다. 매번 손님과 섹스를 한 후에, 딸은 약간의 팁을 받는다. 이돈으로 점점 채무를 갚아나가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모두 몇 년의 시간이 걸린다. 우연히 돈많은 사람을 만나서, 큰 돈을 내고 기원에서 소녀를 되사기 전까지는. 이는 일본의 매춘녀에게 있어서 하나의 아름다운 꿈이다.

 

비록 일부 일본인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비판을 했고,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이를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상관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더더구나 기원을 자주 다니는 사람은 없애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지방의 관리는 기원이 더욱 번성하게 하여 소비를 진작시켜 국고수입을 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