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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항일전쟁때 장개석은 어떻게 남경을 잃었는가?

by 중은우시 2016. 1. 10.

글: 천하무신(天下無臣)

 

1.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1937년 북평(북경) 노구교사변이후, 일본군은 중국을 대거 침략하여, 계속 남하한다. 남경은 당시 중국의 수도로 국민정부는 지킬 것이냐 말것이냐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전의 송호회전에서 국민혁명군은 손실이 참혹했기 때문이다. 노구교사변후, 중국정부는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상해에서 적극적인 반격을 개시한다. 송호회전때 중국군대는 최정예의 중앙교도총대 및 87사단, 88사단 및 148사단 및 62개 여단의 병력 80만을 동원했다 .일본군은 8개사단과 2개여단 20여만명을 참전시킨다. 3개월후, 상해를 지키지 못하고, 국군은 30만명이 사상당한다. 상해가 일본군에 점령된 후, 남경은 직접 일본군의 공격목표가 된다. 중국의 수도로 누구든지 알 수 있었다. 일본군은 곧 남경으로 진군할 것이다. 국군은 막 송호대전에서 큰 손실을 입어서 남경을 방어하려고 해도, 그것은 완성할 수 없는 임무임이 분명했다.

 

11월 17일, 장개석은 남경에서 고급군사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의 의제는 한 가지였다. 남경을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 이종인(李宗仁)이 먼저 의견을 얘기한다: "남경은 전술적으로 절지(絶地)이다. 적은 포위할 수 있고, 후방은 장강이 막고 있다. 아예 퇴각할 길이 없는 것이다. 지킬 수가 없다." 백숭희(白崇禧)도 동의한다: "아군은 송호전투를 통하여 부대가 궤멸하고, 병력손실이 엄중하다. 북경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다." 장군(張群)도 동의한다: "남경성을 전쟁의 파괴에서 막아내기 위하여는 외교적으로 적극 나서야 하고, 남경을 포기해야 한다." 진성(陳誠)등도 주장을 포기하자고 주장한다. 단지 장개석만 반대한다: "남경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포기할 수 없다." 장개석은 일기에서 남경을 지켜야할 이유를 기록했다: "남경 고성(孤城)은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위로 아래로, 국가에, 백성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고성이어서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반드시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남경은 중국의 수도이다. 만일 총 한 발 쏘지 않고 수도를 일본에 갖다 바치면, 국민들이 정부의 항일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세계는 중국의 항일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중국의 최고 군사지도자로서, 장개석은 남경을 지키기로 결정한다. 이제 남은 것은 골치아픈 문제이다. 누가 지킬 것인가? 확실히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은 차이가 크다. 일본군은 남경을 반드시 취하려고 할 것이다. 누가 남경을 지키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누가 순국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장개석은 사람들에게 묻는다. "누가 이 중임을 맡겠는가?" 당시 국민당 군사위원회 집행부 주임을 맡고 있던 당생지(唐生智)가 일어선다: "내가 하겠습니다. 현재 적이 이미 수도에 가까이 다다오고, 수도는 국부의 묘소가 있는 곳입니다. 이제 대적을 눈앞에 두고 남경에서 한 두명의 대장이 희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총리의 하늘에 있는 영혼을 볼 면목이 없고, 더더구나 우리의 최고사령관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본인이 남경을 사수하겠습니다. 적과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부대로 남경을 지켜야 하고, 전방부대를 엄호하여 휴식하고 집합하게 해야 합니다. 적의 진공을 막고 늦추어야 합니다. 남경을 지키는 임무는 험난합니다. 이런 상황하에서는 그저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할 뿐입니다." 그 자리에서 당생지를 남경위수사령관에 임명한다.

 

2. 전투전의 준비

 

당생지에게 남겨준 방어부대는 기본적으로 송호대전의 전장에서 철수해온 부대이다. 즉, 잔여부대이다. 당시의 수도경비총사령부 참모처장 담도평은 남경 각부대의 인원수를 체크하는 첵임을 맡았는데, 그는 남경의 정부군이 겨우 8.1만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확정한다. 그중 3만명은 임시로 모집한 병사이고, 총을 어떻게 쏘는지도 잘 모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정부는 남경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지키지 못한다면, 당연히 평민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일찌기 노구교사변후, 남경시민은 외지로 이주시킨다. 11월 12일 상해의 함락과 11월 20일 남경벙부의 천도로 남경은 다시 제2차 피난을 시작한다. 제36사단장 송희렴의 회고에 따르면, 12월초까지, 남경 전체 시에는 945,544명이 있었는데, 철수한 후에도 30여만명이 성내에 남아 있었다. 당생지는 명을 받은 후, 중점을 방어하여 전체 남경성을 고수하는 전략을 취한다. 부대를 외곽진지와 복곽진지의 두 단계로 나누어 배치한다. 당생지는 매일 수도전장으로 나가서 군사상황을 시찰한다. 항상 장교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평상시에 늘 항전, 항전을 얘기했다. 그게 남에게 희생하라고만 하는 말이냐. 우리는 장교로서, 더더구나 모범을 보여야 한다." 당생지는 모든 배와 선박을 장강상류지역으로 옮겨놓게 하고, 어떤 부대도 하관에서 배를 타고 북으로 철수할 수 없도록 한다. 그리고 호종남의 제1군으로 포강을 수비하게 하여, 무력으로 여하한 부대도 남경에서 북안으로 강을 넘지 못하게 한다. 당생지는 말년에 이렇게 회고한다: "남경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았다. 이것은 조금만 상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멍청한 일(남경을 지키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세상에 어떤 일은 멍청이가 해낸다고 생각한다. 남경은 우리의 수도이다.우리가 가볍게 적에게 넘겨줄 수는 없엇따." 장개석은 남경을 떠나기 전날, 송미령과 함께 특별히 당생지를 보러 온다: "맹소형(孟瀟兄), 당신은 몸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남경을 지키는 수고를 하게 해서, 제가 마음이 괴롭습니다." 당생지가 대답한다: "이는 군인이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저는 위기에 처해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어려움에 처해도 구차해지지 않을 수 있으니 당신의 명령이 없으면 저는 절대 철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군은 남경을 점령하기 위하여, 6개사단, 1개여단, 독립2개야전중포병여단, 3개 야전중포공성중포병연합부대, 7개공성중포병대대, 1개 중형구포대대, 1개중포중대, 16개고사포대와 3개의 후비산포대, 21개의 독립자동차대 및 기타 지원부대 총 30만병력을 준비한다. 일본군의 독립중포병대대는 45년식 240밀리유탄포장비를 갖추고있었다. 1발의 무게가 200킬로에 달하는 포탄은 당시 중국전쟁터에서막아낼 수있는 것이 없었다.

 

3. 남경방어전

 

1937년 12월 1일, 일본군은 남경진격명령을 내린다. 일본군은 계속하여 남경성을 폭격한다. 중화문, 수서문부근은 폭격으로 완전한 건물과 거리가 하나도 남지 않는다. 12월 4일 구용에서 동쪽 40리 지점에서 국군전초부대와 교전이 벌어진다. 남경방어전이 개시된 것이다. 우세한 일본군의 앞에서 국군은 용맹하게 저항한다. 여러 진지에서는 수비군이 모조리 희생당하는 장렬한 장면이 펼쳐진다. 9일, 일본군사령관 송정석근(松井石根)은 투항을 권유한다: "일본군 백만은 이미 강남을 석권했다. 남경성도 포위되었다. 전쟁국면의 대세는 이미 명확하다. 그러니 이후의 저항은 백해무익하다." 당생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계속 각 부대에 명령한다. "진지와 생사를 같이한다는 결심으로 끝까지 고수하라. 촌토(寸土)도 쉽게 포기해서는 안된다." 방어전에서, 당생지의 위수사령부는 밀집되는 포탄 속에서 사령부의 참모인원들에게 지하실에서 업무를 보게 했다.자신과 부사령관은 여전히 원래 자리에서 계속 전투를 지휘한다. 11일, 일본군은 국군의 각 방어기지를 계속 맹공하지만, 중국군대의 결사항전에, 일본군은 여전히 남경성내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12일 새벽, 일본군의 비행기, 대포가 남경성벽을 맹렬히 포격한다. 남경성은 무너진다. 일본군은 우화대의 우측으로 돌격해 들어가고 우화대를 지키던 제88사단 병력 6천여명은 전멸한다.

 

11일 저녁, 장개석이 당생지에게 전보를 보낸다: "만일 정세가 오래 버티지 못하겠으면, 기회를 봐서 철수하라. 그리하여 부대를 정돈한 후 반격하라." 당생지는 그날 밤 부사령관 및 참모장과 상의한 후 14일밤에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당생지는 이렇게 회고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총사령, 군, 사단장회의를 개최한다. 나는 먼저 장개석의 명령을 한번 읽어주고, 다시 철수방안을 한 사람에 1장씩(인쇄한 것) 나누어 주었다. 각 부대의 철수시간, 선후, 노선을 모두 상세히 규정했다. 광동의 2개 군(등룡광 부대와 섭조 부대)가 계획대로 포위망을 돌파하고, 송희렴 부대가 명령에 따라 포구에서 철수한 이외에, 나머지 부대는 모두 명령대로 실행하지 않았다." 기실, 철수명령은 적시에 독전임무를 담당한 제36사단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회의를 마친 후, 제71군 군단장 왕경구, 당해군 제87사 사단장 심발조등은 아예 지휘소로 돌아가지 않는다; 교도총대 대장 계영청은 부귀산 지하실 지휘소로 돌아가서 막료들에게 철수임무를 알려주고, 참모장 구청천에게 문건등을 처리하게 한 후, 자기 혼자 먼저 하관으로 간다. 제66군 군단장 섭조 및 제83군 군단장 등룡광은 회의에 참석한 후 개인적으로 연구해서 결정한다. 당생지의 명령대로 제83군이 다른 부대들이 포위망을 뚫고나서 다시 다음 날 새벽6시에 포위망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고, 양군은 섭조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계획대로 정면으로 돌파하고 지정지점에서 방향을 바꾸어 전진한다. 가장 나중에 철수해야할 서원천의 제2군단은 오룡산 요새를 고수하면서 다른 부대의 철수와 포위망돌파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2일 오후 배를 타고 먼저 장강북안으로 넘어간다. 이들 사전 철수한 부대는 전체 철수배치를 교란시켰고, 철수하지 못한 부대도 따라서 철수하게 된다. 각 부대가 한꺼번에 남경하관의 부두로 몰려들고, 독전하는 제36사는 철수통지를 받지 못했으므로, 국군 각부대의 철수를 막기 위하여 쌍방간에 교전이 벌어진다. 남경성은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이미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3일,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다. 남경성을 점령한 후 초기 6주동안 일본군은 무기를 버리고 포로로 잡힌 수만명, 평민 이십여만명 합계 30만명이상을 죽인다. 이것이 바로 남경대학살이다.

 

남경방어전은 8만의 장비가 형편없는 국군이 30만일본군과 10일간 격전을 벌였고, 전쟁으로 3만여명이 희생을 했고, 어느 한 부대도 투항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