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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구상해(舊上海): "양장십리(洋場十里), 분대삼천(粉黛三千)"

by 중은우시 2014. 10. 2.

글: 홍촉(洪燭)

 

 

 

 

낙정(樂正)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청나라말기 상해는 중국의 색정지도(色情之都)라고. 상해탄(上海灘)에는 기원이 줄줄이 들어서 있고, 연화여자(煙花女子)가 많기로는 중국에서 최고일 뿐아니라, 세계의 각 대도시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사람들은 "기관지다갑천하(妓館之多甲天下, 기원이 많기로 천하제일이다)"라고 하였다: "일찌기 함풍, 동치연간에 전국 각지의 풍류여자들은 속속 상해로 진군한다. 그중 수가 가장 많고, 가장 세력이 있는 곳은 소주(蘇州), 양주(揚州), 광동(廣東) 등지의 기녀들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양장십리, 분대삼천"이라고 형용했는데 전혀 겸손한 말이 아니다. 20세기초의 통계를 보면 공공조계의 중국인여성중 기녀가 차지하는 비중이 12.5%였다. 즉 당시 조계에는 87,894명의 중국인여성이 있었으므로, 이 비율로 따진다면, 기녀의 수는 10,986명에 달한다. "당시 공공조계의 남자주민(아동제외)은 176,605명이었다. 즉 성년남자 대 기녀의 비율이 17:1이었다. 이런 비율은 엄청나게 높은 것이다. 민국시기 상해의 창기업(娼妓業)의 발전은 계속되고 감소하지 않았다. 1934년 <신보>의 추산에 따르면, 기녀가 상해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도쿄, 시카고, 베를린, 런던등 세계적인 대도시들보다 각각 1배 내지 7배가 높았다." (낙정의 <상해인의 사교실질과 소비성격>에서 인용)

 

1920년대, 상해지현(上海知縣) 진기원(陳其元)은 상해기원의 "이름이 있는 곳이 천오백여개이고 화연관(花煙館) 및 함수매(鹹水妹), 담수매(淡水妹)등등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일련의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의 상해가 얼마나 욕망을 해소하는 화화세계인지 알 수 있다. 많은 전통적인 인사들이 이를 참다못했다: "상해지방은 화외(化外, 문명이 없는 곳)와 같다. 상해의 남녀는 음탕하고 부끄러움이 없다. 그래서 국내외에서 말하기를 꺼려할 정도이다. "

 

상해는 당시에 확실히 특구와 같았고 수천년 중국봉건사회에서 자생한 이단이다. 한 송이의 "악의 꽃"이다. 무엇이 그것의 죄악이고 무엇이 그것의 아름다움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모두 하나로 뒤엉켜 있다. 상해의 창기는 서우장삼(書寓長三), 요삼(幺三), 이삼(二三), 함수매, 담수매, 여당관(女堂館), 야계(野鷄)등 여러 등급이 있다. 그중 장삼서우는 고급기원이다. 1898년에 213개가 있었다. 이양경교(二洋涇橋) 일대에는 심지어 일련의 백인여인을 내세운 외국기원도 있었다. 중국의 부자들도 거절하지 않았다. '중국인이 서양말을 배워서 할 수 있으면, 역시 동입미향(洞入迷香)했다." 큰 돈을 가지고 서양여인을 보려는 상해의 큰손들도 적지 않았다.

 

1891년 <신보>는 색정업의 가격을 공개한다: "화연간(花煙間)에서 양부(洋蚨) 1각(一角)을 결제하면, 착흉날두(捉胸捺肚, 가슴을 잡고 배를 만지다), 소견기회(消遣綺懷)할 수 있고, 분택지향(粉澤脂香)을 입맞출할 수 있을 뿐아니라, 연하공양(煙霞供養)도 할 수 있다. 여기에 빠진 자들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았다. 태기(台基)의 경우에는 그 문을 들어가려면 먼저 양일원(洋一元)을 지급하면, 탕부를 불러서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다. 문은 깊은 골목의 궁벽진 곳에 있어서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환희선(歡喜禪)에 참가하고 싶으나 스승과 친구들에게 멸시를 받을까 두려운 자들은 모두 이런 방식을 빌렸다." 이 글에서 나오는 '태기'는 양가집 부녀를 끌어들여 매춘하는 셋집을 얘기한다.

 

상해인들은 규국(叫局, 기녀를 불러서 옆에 앉히는 것), 화주(花酒)를 마시는 것,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것등을 좋아했다. 각분야의 성공인사들은 기원을 사교장소로 활용했다. 풍월장에서 한편으로 놀면서 한편으로 친구도 사귀고 한편으로 거래도 했다: "소위 후백장상(侯伯將相), 독무사도(督撫司道), 유신지사, 유학소년, 부상대고(富商大賈), 양공교장(良工巧匠)등이 이곳의 손님이었다. 중요한 사업을 논하고, 정치를 논하며, 물건가격을 정했다. 학랑소오(謔浪笑傲)의 당이 광통성기(廣通聲氣)의 땅이 되었다. 음탕하고 외설적인 곳이 정사(正事)를 처리하는 곳이 되었다. 특별히 수치를 모르거나, 체면이 상하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1903년 8월 28일 <신문보>)

 

일찌기 북양수사제독을 지낸 정여창(丁汝昌)은 상해의 명화(名花) 호보옥(胡寶玉)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 장군의 눈에, 육탄이 포탄보다 막기 어려웠다고 여겼을까? 상해탄의 화천주지(花天酒地)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낙불사촉(樂不思蜀)하게 만들었고, 나라의 대문앞에서 포성이 울리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었을까?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상해는 유신파, 혁명당의 소굴이 된다. 조계내에 잠복한 유신당인들은 빈번하게 화류계를 드나들었다. 여기에서 사람을 만나고 연락하면서 눈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연화여인들에게서 새로운 구성원을 늘여가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위소창의 <오연인연구자료>에는 타유시(打油詩)가 하나 실려 있다. '혁명당도 호색한다'는 것에 놀란 것같다: "낭자군항혁명군(娘子軍降革命軍), 절무형직미요분(絶無形迹彌妖粉), 가련일례한지분(可憐一例閑脂粉), 야향전려대책훈(夜向全閭代策勳)" 한편으로 천하를 놓고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미인을 품는다. 상해는 정말 이런 '잠복자'들에게 양손에 떡을 모두 쥐게 해줄 수 있을까?

 

구상해의 기원에 운집한 사람들은 삼교구류(三敎九流)가 다 있고, 어룡혼잡(魚龍混雜)하여 적아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모두 석류군(石榴裙)을 이 나라안의 나라의 작은 국기로 여겨, 절하고 모셨다. 내전, 외전도 모조리 머리 속에서 잊어버렸다.

 

남경에는 진회하(秦淮河)가 있고, 북경에는 팔대후통(八大胡同)이 있다. 상해의 각국조계는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특히 영국조계내에 있는 사마로(四馬路, 지금의 복주로)는 더더욱 풍월무변의 큰 깃발을 높이 내걸고 먹고,마시고,놀고 즐기는 모든 서비스를 원스탑으로 제공했다. 동치연간이후 사마로는 일약 '상해제일가'로 부상한다. 민간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광고어에 이런 말이 있다: "천하에서 상해조계가 가장 번화하고, 상해조계에서 다시 사마로가 가장 번잡하다." "화월승장(花月勝場), 소재개유(所在皆有), 요희염복(妖姬艶服), 교소공빈(巧笑工顰), 시사지성(市肆之盛), 각부제일(各埠第一)"(청나라때 일기회초에서 인용)

 

수학사인(瘦鶴詞人)의 <여호필기>에는 사마로의 활색생향(活色生香)이 세계최고라고 형용한다: "누대십이(樓臺十二), 분대삼천(粉黛三千), 경북리지생가(竟北里之笙歌), 비동산지사죽(沸東山之絲竹), 금존단판(金尊檀板), 만천선몽지장(漫天選夢之場), 야엽창조(冶葉倡條), 편지소혼지서(遍地銷魂之墅), 홍창요조(紅窓窈窕), 기현금은(氣現金銀), 벽옥영롱(碧玉玲瓏), 신함난사(身含蘭麝), 고기극인생환락(固己極人生之歡樂), 진세계지번영의(盡世界之繁榮矣)"

 

<호강상업시경사>에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사마로를 빠트리지 않았다. "사마로중인최다(四馬路中人崔多) 양방서우야계와(兩傍書寓野鷄窩). 희원차관겸번채(戱園茶館兼番菜), 유객망귀반입마(遊客忘歸半入魔), 요붕한보거간화(邀朋閑步去看花), 일로행래양마차(一路行來讓馬車), 최시동인유반처(崔是動人留盼處), 귀견고좌소교왜(龜肩高坐小嬌娃)"

 

사마로는 당시 큰손들이 애인을 데리고 마차를 빌려서 타고 바람을 쏘이는 소위 "출풍두(出風頭)"하는 곳이었다: "기녀를 끼고 마차에 탄 사람은 반드시 사마로를 한두번 왔다갔다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로를 거니는 것은 구경을 하고,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이다. 마차위의 미남미녀들은 더욱 눈길을 끌었다: "사면주조마로개(四面周遭馬路開), 윤제비처만진애(輪蹄飛處滿塵埃). 오릉협기병견좌(五陵挾妓幷肩坐), 십리간화전순회(十里看花轉瞬回)" 기실 사마로는 길이가 3리밖에 되지 않아서, 한번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다시 한두번 더 오갔다. 기녀를 데리고 노는 것이 상해에서는 이렇게 공개화되었다. 천하의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같이,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 심리는 확실히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세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구상해는 적나라하게 주색을 돈자랑하는 것으로 여기는 곳이다. 이곳에서 모든 것은 가격이 있다. 사람들은 속속 엄청난 고가의 물건으로 가게를 장식하여 허영심을 만족시켜주었다. 보기에 그때의 상해는 가장 허영이 심한 도시라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상해 최초의 "패션쇼"는 T자형 런웨이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다. 온갖 머리를 짜내서 남자들의 눈길을 끌고 돈을 벌려는 기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유행을 따르는 기녀들은 옷의 유행을 이끌었다. 그녀들 자신이 이미 이 도시의 유행을 나타내는 풍향계가 된다.

 

마찬가지로 상해 최초의 "미인선발대회"도 기녀들 가운데 거행되었다. 1891년 3월 23일의 <신보>에는 상해가 1882년부터 1883년, 1884년 연속하여 선화방(選花榜) 활동을 진행했던 것을 회고하고 있다.

 

19세기의 마지막 면쳔간 상해의 색정문화업의 상징인 화방평가선발활동이 갈수록 커졌다. 상해의 각종 오락장소의 기녀들은 속속 등록하여 참가한다. 신문에는 사진과 이력을 싣는다. 마치 국회의원선거때처럼 사방을 다니며 득표활동도 벌이고, 재주와 기예를 공연하고, 매체와 인터뷰도 하며 계속하여 가십거리를 만들어 낸다.

 

화방은 투표에 따라 장원, 방안, 탐화등을 뽑는다. 기녀들은 재자들이 과거에 참가하는 것보다 더욱 적극적이었고 모두 금방제명(金榜題名)되어 하룻밤만에 '스타'가 되기를 꿈꾸었다. 돈있고 권세있는 표객도 풍월장을 도박장으로 여기고 놀았다. 큰 돈을 내놓고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명화(名花)의 팬이 되는 것이다.

 

신문사의 문인들의 글도 이를 더욱 부추겼다. 후보명단에 오른 기녀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를 하고, 열정에 넘쳐 추천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1897년 화방장원 장사보(張四寶)의 추천평을 보기로 하자. 화방이 발표된 당일의 유희보에 실렸는데, 당시 신문은 불티나게 팔린다: "유유자파(蕤蕤者葩), 연연기운(娟娟其韻), 파사명이화사미(波寫明而花寫媚), 신취법이정취유(神取法而情取幽).....단장침정(端莊沉靜), 유미가친(柔媚可親), 장서우원(張墅愚園), 종적한도(踪迹罕到), 거지한아(擧止嫻雅), 유대가풍(有大家風). 미려천연(美麗天然), 풍신한아(風神嫻雅), 산산선골(珊珊仙骨), 교교불군(矯矯不群). 천선화인(天仙化人), 자연풍운(自然豊韻), 편연입좌(翩然入坐), 학립계군(鶴立鷄群). 석인위미인지광가이양목(昔人謂美人之光可以養目), 도차익신(睹此益信)" 이게 어디 기녀를 평하는 내용인가. 분명히 선녀를 칭찬하는 내용이지. 조식이 쓴 <낙신부>도 이처럼 아낌없이 묘사하지는 않았었다.

 

화계 장원, 방안, 탐화가 이렇게 화려한 칭찬을 들으면 하늘에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

 

더욱 재미있는 것은 평가위원들 오락기자들은 각자의 기호가 달랐다 서로 다른 미녀의 진영에서 호화사자역할을 했다. 서로간에 글로 싸우고 서로 공격했다. 모두가 승리는 자신의 것이고 나 아니면 누가 장원을 하랴는 기세였다. 마치 진리를 옹호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어찌되었건, 화방을 매년 뽑다보니 확실히 화계의 스타들이 탄생하게 되고, 항간에서 입에 오르내리게 되며, 그녀들의 몸값은 주식처럼 '팬'들에 의하여 급격히 올라간다.

 

나중에 '선발된 미인'들 중에서 다시 미인을 선발하여 상해화계의 "사대금강(四大金剛)"을 선정한다: 임대옥(林黛玉), 호보옥(胡寶玉), 장서옥(張書玉), 육란분(陸蘭芬). 명기는 바로 이렇게 만들어졌다. <홍루몽>의 임대옥이 진짜 있었다면,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남용되는 것을 보고는 아마 화가나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상해탄의 그 임대옥의 이름을 빌려서 천하를 얻은 '건괵영웅(巾幗英雄)은 정말 임대옥처럼 유악무골(柔弱無骨)의 풍모를 지녔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을까? 아마도 <홍루몽>에 빠진 표객의 아이디어였을까? 그는 자신이 정말 삼천분대 속에서 임대옥의 화신을 찾았다고 생각했을까?

 

이 상해판 "임대옥"은 <유희보>의 오너인 해파소설가 이백원(李伯元)이 장원차좌(張園茶座)에서 한눈에 반했고, 그후 그는 거의 매일 장원으로 가서 차를 마셨다. 그리고 자신이 기획한 화방활동에서 그녀를 띄워준다. 

 

'사대금강'중 육란분은 더더욱 유명한 사교계의 꽃이다. 그녀를 아는 부호고관들이 어느 해에 생일파티를 열어주어서 상해탄을 떠들썩하게 한다: "문에 채례를 걸어놓고, 경찰병력을 고용하여 탄압한다. 생일날이 되자, 생일축하라러 온 자들이 혹은 마차를 타고 혹은 가마를 타고 왔으며, 홍정(紅頂)  남정(藍頂)도 있는데 6품이하의 관복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생일행사하는 방에 들어가서 절을 하는데, 육난분의 아들이 하나 있는데 5,6세였고, 의관을 갖추고 맞절을 했다....대인, 선생들이 존귀한 몸을 숙이고 귀한 몸을 낮추다니, (육)난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런 유례없는 거동을 벌이는가."

 

육란분은 상해탄에서 여왕의 기세였고 무수한 영웅들이 그녀에게 허리를 굽힌다. 이것이 아마도 아름다움의 매력일 것이다. 성적인 마력일 것이다. 상해는 금전의 신화를 창조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미의 신화, 성의 신화도 창조하려 했다. 배금의 무리는 호색의 무리이다.  속속 신화를 떠받든다. 이것이 상해의 번화한 꿈가운데 가장 기이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상해의 꿈 중의 꿈인 것이다

 

1949년 상해가 해방되면서 십리양장의 예상우의곡이 끝난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상해의 기녀의 개조는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필자의 친구인 장자(張者)는 소설 <노풍구>에서 신강군간부대(新疆軍墾部隊)에 노동교육을 받는 상해기녀를 언급하였는데, 그가 아무렇게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첫번째로 호남에서 거둔 여병이 팔천여명으로 후인들이 '팔천상녀상천산(八千湘女上天山)"이라고 불린다. 두번째는 산동의 여병으로 지휘관이 말하는 '산동대총(山東大蔥)'이다. 세번째로 신강에 들어온 것은 상해여병이다 역시 지휘관이 말하는 '상해압자(上海鴨子)'이다. 상해에서 거둔 여병은 기의부대의 일부 군관과 일부 나이많은 노병의 혼인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함이었다. 상해에서 모집한 여병은 많지 않았고, 군간부대에 배치된 것은 개략 9백여명이었다. 이들 소위 여병은 모두 해방전 구상해의 기녀였다. 상해해방후 이들 기녀는 당연히 실업한다. 이들 기녀는 모두 학습반에 들어가 개조교육을 받고, 새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다. 개조후의 기녀들은 적극적으로 상해를 떠나길 청하고 과거의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생활을 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일부분이 신강으로 간 것이다. 그녀들은 설산초지를 그리워했고, 남천백운의 부름을 받아 머나먼 곳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확실히 일부 상해기녀는 천산으로 멀리 갔다. 황량한 땅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그녀들이 가끔 구상해탄의 등홍주록(燈紅酒綠)을 회고할 때면 확실히 꿈과 같을 것이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