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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2차대전때 신비하게 사라진 "신로마군단"

by 중은우시 2015. 6. 16.

글: 황산벌(黃山伐)


중국에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는 처음에 53명의 중국침략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는 천명이 넘은 육해군으로 성장했다. 다만, 2차대전중에 전쟁태세가 변하면서,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은 연합군 혹은 중국군대의 손에 죽지 않고, 동맹국인 일본군에 의하여 타향의 귀신이 된다.


기원전36년, 서한의 부교위 진탕(陳湯)은 북흉노 지지선우를 토벌하면서 용모가 특이하고, 전법이 괴이한 전쟁포로를 붙잡는다. 그리고 그들을 지금의 중국감숙성 리센(驪軒)지구에 안치한다. 2천여년후, 중국과 외국의 학자들은 리센의 주민이 '고로마군단'의 후예인지를 놓고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 역사의 수수께끼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또 다른 '로마군단'은 실제로 중국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시간은 현재로부터 겨우 60여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들이 바로 근대에 중국으로 온 이탈리아원정군이다.


1915년, 이탈리아는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천진의 이탈리아조계안에 약 1만명의 중국인과 350-400명의 이탈리아인(대다수는 상인)이 있었다. 조계의 '경비업무'는 200명가량의 경찰부대와 50명가량의 중국순포가 책임졌다.


1925년, 이미 국내의 파시스트정권이 공고히한 무솔리니는 중국에 '동방원정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군대에 정예부대를 선발하도록 요구한다. 이탈리아 전체 군내에서, "산마르코연대"는 극동으로 보내지기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고위장군은 전체 연대가 모두 중국으로 간다면 너무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1920년대, 전체 세계는 1차대전후의 '평화시기'를 지내고 있었다. 대규모로 해외에 파병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항의를 불러올 수 있었다. 연구를 거쳐, 이탈리아 군측은 '산마르고쳔대'의 중견역량으로 정예대대를 만들고 당해 대대의 아래에는 3개의 중대를 두며 매 중대는 100명의 관병으로 구성했다. 3월, 이 신경써서 뽑은 부대는 중국으로 정식 향하게 된다.


1930년대초, 중국과 이탈리아 양국의 관계는 양호했다. 무솔리니의 사위인 치아노 백작은 주중공사로서 적극적으로 중국과 이탈리아간의 무역발전을 추진했다. 1937년 11월 6일, 이탈리아는 <반코민테른협정>에 가입하여,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개 파시스트국가가 '베를린 - 로마 - 도쿄"의 추축을 결성한다. 중국국민정부의 지도자인 장개석은 이탈리아가 일본과 지나치게 가깝다는데 반감을 가져 중국과 이탈리아 양국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1937년 봄여름교체기에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일촉즉발의 태세를 나타낸다. 이탈리아의 주중대사이자 파시스트당원인 카를로 푸마카리는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개시되면 반드시 이탈리아조계에 화가 마칠 것이라고 생각하여, 급히 무솔리니에 전보를 보내어 군함과 육군을 중국으로 보내주도록 요청한다. 이를 통하여 이탈리아조계의 방어역량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진다. 1937년, 이탈리아 육해군이 중국에 총 1200명의 병력을 투입한다.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정식으로 2차대전에 참전한다. 1941년 2월, 동아프리카 항구 마사와에서 영국군에게 점령당하기 1개월여전에 3척의 이탈리아군함이 중국으로 향한다. 그중 '에르투리아'호와 '램-1'호는 상해와 천진에 도착한다.


중일전쟁의 첫 몇년간, 이탈리아와 일본의 추축국 동맹관계에, 이탈리아 주중대사관이 계속 양보하고 타협하여, 중국경내의 이탈리아군대는 비교적 조용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실제로 이탈리아인과 일본점령당국간의 관계가 좋지는 않았다. 유럽인의 존재를 좋아하지 않아서, 일본인은 여전히 그들이 점령한 지역내에 유럽무장세력이 존재하는 것을 꺼렸다.


이탈리아가 연이어 참패하여,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는 국왕에 체포된다. 이어서, 9월 8일, 이탈리아는 바도글리오 신정부가 공개적으로 추축국에서 퇴출할 것을 선언한다. 이제 극동에 남아 있던 이탈리아군인은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현지시간으로 9월 9일 새벽 2시, '에르투리아'호가 싱가포르 외해에서 이탈리아 잠수정 '카비렌니'호에급양작업을 마쳤을 때, 그들은 로이터사로부터 이탈리아가 투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항로를 바꾸어, 수마트라해협을 거쳐 영국령 식민지인 실론(지금의 스리랑카)로 도망쳐, 일본해군과 비행기의 추격을 피한다. 다만, '카비렌니'호 잠수정 정장 볼트 오코니 해군중령은 고집센 파시스트당원이었다. 그는 잠수함을 일본군이 통제하는 싱가포르항구로 몰고 간다. 그는 공개적으로 일본측에 서서 계속 싸우겠다고 말한다. 다만 일본군은 강제적으로 '카비렌니'호 잠수정의 선원을 모조리 전쟁포로수용소에 집어넣는다.


이때, 아직도 여러 척의 이탈리아해군함정은 일본군세력범위내에 있었다. 많은 선박의 지휘관은 이탈리아가 투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후, 스스로 선박을 침몰시켜, 일본군에 포획되지 않도록 했다. 이탈리아선박이 일본인들에게 강탈당할 때, 천진, 북경, 상해조계 및 대사관영사관구역에 있던 이탈리아육군도 생사의 결정을 해야 했다. 천진조계구역의 카를로 데르아쿠아 대위가 지휘하는 이탈리아군은 6000여명의 친일군대에 포위당해 있었다. 데르아쿠아 대위는 저항을 결정한다. 이탈리아군을 투항하게 학 위하여, 일본군 지휘관인 독립제15여단장 전중신남(田中信南)은 먼저 10대의 장갑차로 이탈리아조계의 출구를 막는다. 두 척의 내해포정을 동원하여 해하를 봉쇄한다. 북경남원공항에서는 폭격기중대를 데려온다. 일본인이 10시간에 걸친 위협성 포격과 공습을 받은 후, 데르아쿠아 대위는 붕괴하고 결국 부대를 이끌고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구월의인항복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일본군은 모두 1100명의 이탈리아국민을 포로로 잡는다. 일본측은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을 강요했다. 히클러가 지원하여 만든 '이탈리아사회공화국"(살로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포로수용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170명의 이탈리아 병사가 이탈리아사회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나머지는 일본군에 의하여 중국동북, 조선 및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에 갇혀서 이후 2년간 일본군의 학대를 받는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을 선언할 때, 이탈리아 잠수정 '토레리'호는 여전히 일본군과 협력하여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8월 30일까지 싸운다. 그 날 이 이탈리아군인은 기관포로 미군 B-25폭격기를 격추시킨다. 이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얻은 최후의 전과였다.


일본이 투항한 후, 일본군에 의하여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이탈리아관병은 1945년 9월 미군에 의하여 해방된다. 1946년 3월 미군군함을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이탈리아가 중국에 파견한 '동방원정군'의 역사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