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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스포츠

안녕, 십삼릉골프장!

by 중은우시 2015. 6. 16.

글: 위경생(魏京生)


2015년 5월 7일,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 평범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친한 친구 몇 명과 함께 십삼릉골프장에서 마지막 작별라운드를 했다. 기념으로 나는 내 이름이 쓰여진 홀인원비를 챙겼다. 나는 페어웨이 양쪽의 어린 나무들이 자라서 고목이 된 것을 보았고, 옛날의 동료들을 보면서 떠나기 아쉬웠다. 앞으로 클럽하우스의 대문을 지금처럼 다시 들어올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


삽십년 골프생애를 나는 여기서 시작했고, 돌아왔고, 다시 출발했다. 나는 이 골프장의 탄생과 성장을 목격했다. 이 골프장은 나의 성공과 실패를 끌어안아 주었다.


처음에 나는 제자들을 데리고 골프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십삼릉골프장이 우리에게 편리한 조건을 제공해 주었고 나의 꿈을 밀어주었다: 마침내, 한번은 내가 장나(張娜)를 데리고 일본투어에서 우승을 했다. 이것은 중국여자골프선수가 처음으로 국제골프경기대회에서 시상대에 선 것이었다.


나는 십삼릉골프장을 좋아한다. 그것은 이곳이 나의 근거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골프장은 설계가 독특하여 나름대로의 풍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골프장의 난이도는 적절하다. 실력이 형편없는 골퍼들도 여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 골프장의 모든 홀은 독립되어 있다. 여러 명이 동시에 티샷을 하더라도, 시끄럽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린도 독특하다. 아주 강력한 시각차이가 있다. 만일 캐디언니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골프장은 일본의 투어골프장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곳은 우리가 세계로 나가면서 일본투어를 가장 먼저 겨냥한 원인중 하나이다.


나의 모든 제자들, 장나, 판판(盼盼), 차이주(彩竹), 리쯔(李梓)에게 말했다: "네가 십삼릉골프장을 정목하면, 일본투어를 갈 수 있다"고.


오늘 골프장은 영업정지통보를 받았다. 이후 우리는 아주 좋은 훈련코스를 잃었고, 일본투어를 정복하는데 참고될 골프장을 잃었다. 나는 골프장이 무슨 원인으로 영업정지되었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이 골프장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고 싶다.


기실 십삼릉골프장은 더욱 공식적인 명칭이 있다. 북경국제골프구락부. 북경 최초의 골프장이다. 내가 21-24살일 때, 나는 골프장 프로젝트를 통과시키기 위한 3년의 협상과정을 겪었고, 결국 국가 각급 지도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특히 당시 완리(萬里) 전인대위원장이 전인대대표들을 이곳에 시찰오게 하고 프로젝트를 평가하게 해서 결국 이 골프장을 외국손님의 레크리에이션오락을 위한 골프장으로 확정하게 된다. 일본골프진흥주식회사가 돈을 내서 건설한다.


건설기간동안, 나는 갑을쌍방의 코디네이션업무를 맡았다. 십삼름댐도로의 곡선도로를 직선화하는 것도 포함해서. 나는 알선과 협조를 책임젔고 골프장은 결국 순조롭게 완공되었다.


골프장이 완공된 후, 당시 중국골프시장은 완전히 공백이었다. 투자자들은 12명을 뽑았다. 그들이 보기에 비교적 우수한 인재들이었는데, 일본의 골프장으로 보내 여러 훈련을 받게 했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일본연수기간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골프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세번째 라운드를 돌 때 7번 아이언과 퍼터만 가지고 108타를 쳤다. 당시 일본의 매체는 깜짝 놀라서 속속 인터뷰를 하러 왔다. 이것은 내가 귀국한 후에 골프를 배울 때는 먼저 7번아이언을 배우도록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당시. 내가 일본에 갔을 때, 나에게는 골프장식당의 경영관리를 배우도록 했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후 나는 골프장 식당의 외국인담당 매니저가 되었고, 외국골퍼의 접대를 책임졌다. 80년대말 90년대초는 일본의 경제가 잘 나가던 시기이다. 북경국제골프구락부의 개업은 당시 북경경제에 큰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외국손님들이 오가면서, 소비하고 투자하여 산업발전을 이끌고 주변 주민의 취업문제도 해결해 주었다.


골프장이 개업한 후 오랜 기간동안 골프를 치는 사람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중국인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보급을 위하여 매일 버스를 몰고, 도시로 가서(당시는 2,3환) 손님을 모셔왔다. 당시에는 100위안을 받았는데, 식사비 포함이었다. 그래도 매일 중국손님은 몇 명 오지 않았다.


내가 경영하는 골프장 식당은 연수입이 600만위안(90년대에 600만위안은 오늘날의 600만위안과 다르다)에 이르러 골프장 골프수입을 훨씬 넘어섰다.


일본골프장에서 배운 이런 관리경험으로 나는 골프장업계에서 성취를 이루었을 뿐아니라, 더욱 큰 성취는 내가 이런 관리경헙을 관광업의 식당에서 복제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관광음식업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또 다른 이슈이다.


나의 사업이 휘황할 때, 친구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으로 볼 때,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경생골프학원을 만들었다. 그 원인은 아마도 중국에서 골프치는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믿었다. 중국인의 체격과 사고방식 그리고 근면한 정신은 반드시 골프분야에서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나는 더 많은 중국인들이 가입하고, 세계로 나가기를 바랬다.


십삼릉골프장은 일대의 사람의 휘황과 성장을 목격했다. 제1회 VOLVO챔피언 청쥔(程軍) 선생도 있고, 막 일본에서 처음으로 챔피언에 오른 량원충(梁文沖) 골퍼도 있다. 장롄웨이(張連偉)도있고, 일본투어 챔피언 장나도 있고, 막 여자 중국투어 챔피언이 된 란판판도 있다. 그들도 이 골프장에 대한 기억이 깊을 것이라고 믿는다.


십삼릉골프장. 그것은 우리 세대와 함께 했다. 지금 그곳은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중국골프역사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마지막 골프라운드를 마치고, 한번도 친구들에게 글을 남긴 적이 없던 나는 이런 소식을 실었다: 안녕. 29년의 십삼릉 북경국제골프장. 너는 내가 일생의 성취를 이룬 곳이고, 나의 마음은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나는 너에게 내생이 있기를 빈다. 친구들은 공감하고 논의했다. 그래서 나는 이 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서 나의 그리움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당연히, 아무리 긴 글이라도 우리들 간에 깊이 새겨진 인연의 정을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로지 이 한 마디. 몸조심해라.


안녕. 북경국제골프구락부. 나는 네가 중국골프를 위하여 한 모든 것에 감사하고, 나도 남은 여생의 미력한 힘이나마 다 하겠다. 중국골프업계의 건강한 발전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