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바둑과 장기는 모두 중국에서 역사가 오래된 오락게임이다. 역대이래로 바둑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역사상 비범했던 7건의 바둑이야기는 읽어보면 경심동백(驚心動魄)이라고 할 만하다.
첫째, 동진(東晋)시기, 소수로 다수를 이긴 저명한 전쟁 비수지전(淝水之戰)이 발생한다. 동진은 8만의 인마로 자칭 100만인마라는 전진의 팔십만대군을 물리친다. 승전보가 건강(建康)에 전해질 때 사안(謝安)은 마침 친구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는 한번 훑어본 후에 곁에 던져두고 계속 바둑을 둔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되었다는 듯이. 친구가 물어보자 그는 담담하게 별 것 아니라고 답한다. 그저 아이들이 벌써 적을 이겼다는 것이라고. <세설신어>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사공(사안)이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는데, 사현(謝玄)이 올린 서신이 도착했다. 서신을 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바둑을 두었다. 상대방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어린 아이들이 적을 대파했다(小兒輩大破賊)"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이나 표정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엣말이 틀리지 않다. 가슴에는 경뢰(驚雷)를 품고 얼굴은 명호(明湖)같아야 비로소 상장군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사안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이' 계속 바둑을 두는 초연한 풍모를 보인다. '소인배대파적'이라는 담담한 말은 우리같은 범부속자가 보게 되면 깜짝 놀랄 일이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사공은 정말 '쿨'하고, '멋지다'.
둘째, 오(吳)나라의 승상 고옹(顧雍)은 유명한 바둑팬이다. 오나라 태자 손화(孫和)는 바둑을 두는 것에 반대하며 바둑은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고옹은 승상으로 지위가 높았는데, 태자의 말을 들은체도 하지 않고 손님과 관저에서 계속 바둑을 두었다. 한번은 바둑이 한창 치열해졌을 때 외지에 나가있던 아들 고초(顧劭)가 병으로 사망했다. 고옹은 그 소식을 듣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며 여전히 바둑을 둔다. 그러나 바둑판의 아래에서는 힘을 주어 주먹을 쥐는 바람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 피가 흐를 정도였다. 그렇게 마음 속의 고통을 나타냈다.
삼국시대 정치가중 '고옹'은 '동오명상(東吳名相)'으로 유명하다. 그는 오나라 명신 장소(張昭), 손소(孫邵)의 뒤를 이어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손권을 보좌한다. 그는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사서에는 그가 기도회굉(氣度恢宏)하고 처변불경(處變不驚)했다고 적고 있다. 그가 바둑을 둔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고옹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독보적인 견해와 생각이 있었다. 문제를 주도면밀하게 고려하고, 온건하고 타당하게 처리했으며 방법과 방식에 신경을 썼다. 오나라는 그의 관리하에 전면적으로 흥성하고 번영한다.
셋째, 동한(東漢)의 명사이며 건안칠자(建安七子)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 공융(孔融)은 다시의 유명한 문신이다. <삼자경>에는 "융사세(融四歲), 능양리(能讓梨)"(공융은 4살때 배를 양보할 줄 알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그 공융이다. 그는 사람됨이 곧았으며,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조조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한번은 조조가 '말도 안되는' 죄명으로 그를 체포한다. 이때 공융의 9살짜리 아들과 7살짜리 딸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누군가 그들에게 급히 도망치라고 권하지만, 오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새집이 부서지면 새알이라고 온전할 수 있겠는가?(覆巢之下, 安有完卵)" 두 사람은 그대로 바둑 한판을 다 마치고 역시 붙잡혀 가서 부친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세설신어>는 이에 대하여 담담하게 적어놓았지만, 읽은 사람은 심장이 벌렁벌렁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위진(魏晋)의 '죽림칠현'중 한 명인 완적(阮籍)은 유명한 문학가 겸 사상가이다. 하루는, 그가 친구와 바둑을 두고 있을 때, 집에서 일하는 종이 급히 달려와서 보고한다: "노부인이 돌아가셨습니다." 친구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빨리 돌아가서 모친의 후사를 처리하라고 재촉한다. 완적은 그러나 그 바둑 한판을 다 두어야 한다고 우긴다. 두 사람은 다시 2시진을 더 두고서야 바둑이 끝난다. <진서. 완적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성격이 아주 효성스러웠다. 모친이 돌아가실 때, 마침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상대방이 그만두자고 하였는데, 완적은 남아서 끝까지 승부를 보았다."
만일 이를 가지고 완적이 불효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 본 것이다. <진서.완적전>에는 그가 바둑을 다 둔 후, "이어서 술을 두 말 마시고, 소리를 한번 지르고, 피를 몇 되 쏟았다. 장례때는, 증순(蒸肫)을 먹고 두 말의 술을 마시고 그 후에 결별한다. 다시 소리를 지른다. 다시 몇 되의 피를 쏟았다..."
다섯째, 남송 송명제때의 관리로 왕경문(王景文)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주 능력있는 사람이다. 송문제는 왕경문을 아주 중시한다. 송명제가 왕경문의 누이를 취했을 뿐아니라, 경문의 이름을 따서 명제라고 명명한다. 다만 송명제는 죽기 전에 왕경문에 대하여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황후가 임조칭제하면 왕경문이 황위를 노릴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송명제는 병이 위중할 때, 사람을 보내 왕경문에게 사약을 내린다. 조서가 왕씨의 집에 도착했을 대 그는 친구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왕경문은 조서를 다 읽은 후, 그것을 바둑판 아래에 눌러 둔다. 그리고 태연자약하게 계속 친구와 바둑을 둔다. 바둑 한판이 끝나자 왕경문은 담담하게 바둑돌을 수습한 후, 조서를 꺼내고, 독주를 든다. 술잔을 들어 친구에게 말한다: "나는 간다. 이 술은 그대에게는 권하지 못하겠다" 말을 마치고 독주를 마시고 죽는다. 당시 나이 육십세였다.
여섯째, 강희제는 장기팬이다. 아무 일이 없으면 장기를 두었다. 한번은 강희제가 수행원을 이끌고 승덕 부근의 목란위장으로 사냥을 떠난다. 일시에 장기를 두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 대신과 장기를 두게 되는데, 금방 세 판을 연이어 이긴다. 강희제는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장기를 잘두는 고수를 찾는다. 그리하여 인복(仁福)이라는 시위가 그와 대국하게 된다. 인복도 장기를 좋아하는 자였다. 대국을 하다보니 정신을 집중하였고, 그의 장기수준은 아주 높아서, 상대방이 황제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저 장기판만 보면서 파죽지세로 밀어부쳐 중반에 이르러 상대방의 차(車)를 먹어버린다. 곁에서 구경하던 노태감 곽계공(郭繼功)은 황제가 장기를 지게 되자 급한 와중에 머리를 써서 이렇게 말한다: "황상, 산아래에 맹호가 나타났는데, 빨리 가서 사냥을 하시지요."
강희제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인복에게 말한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호랑이를 잡은 후에 계속 두자."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말을 탄다. 활을 집어들고 산아래로 달려갔다. 산아래 어디에 맹호가 있겠는가? 수행원들은 그저 매화록 한 마리만 발견했을 뿐이다. 강희제는 사냥을 좋아하고, 사냥의 고수였다. 그는 경험으로 사슴이 있는 곳이면 호랑이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분명 곽계공이 잘못 본 것이라고 여긴다. 매화록을 호랑이로 착각한 것이다. 실제로 곽계공이 잘못 본 것은 아니다. 황상은 인복과의 장기에 푹 빠져 있는데, 산아래에 사슴이 있다고 하면 아마도 산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의로 맹호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황제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산을 내려가게 했고, 장기에서 지는 난감한 국면이 나타나지 않게 한 것이다.
강희제는 사슴사냥에도 흥미가 있었다. 이 사슴은 빠르게 달렸고, 강희제는 말을 몰아 추격한다. 몇 개의 산을 넘고서야 강희제는 비로소 사슴을 포획할 수 있었다. 시간은 이미 한참을 흘렀다. 그제서야 인복과 두던 장기가 생각나서, 원래 장기를 두던 곳으로 돌아간다. 인복은 장기판의 곁에 꿇어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강희제는 비로소 발견한다. 그 충후하고 미련한 인복은 이미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희제는 그에게 미안해 한다. <논어. 위정>에 나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사람에게 신의가 없으면 어디에 쓸지를 모르겠다." 이후 강희제는 이를 거울로 삼아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신의를 잃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일곱째, 건륭제때, 양주(揚州)에 염상鹽商) 호조린(胡照麟)이 있는데, 바둑을 아주 좋아했다. 한번은 호조린이 유명한 바둑기사 범서병(范西屛)과 바둑을 두게 되었다. 중반까지 두는데 확실히 불리했다. 그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바둑을 중단하고 끝냈다. 호조린은 당시의 고수인 시정암(施定庵)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구한다. 그 후에 다시 돌아와서 범서병과 계속 대국을 한다. 시정암이 거처하던 곳은 양주에서 비교적 멀어서 호조린이 오가는데 1박2일의 시간이 걸렸다. 바둑 한 판을 이기기 위하여 이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바둑에 미쳤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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