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십이생초(十二生肖)의 개와 돼지: 노(勞)와 일(逸)의 관계

중은우시 2015. 3. 26. 16:53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개는 가장 먼저 인류에 길들여진 동물이다. 개는 인류와 공동으로 생활한 이래, 계속하여 인류와 동감공고(同甘共苦)하며, 사람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인류의 가장 충실한 친구이자 파트너가 되었다. 개는 스스로 인류를 주인으로 모시고, 가난하든 부자이건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민간에는 "개는 집안이 가난한 것을 꺼리지 않는다(狗不嫌家貧)"이라는 말이 있다. 고양이와는 다르다. 집안에 '물고기'가 없으면 다른 집으로 간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같다. 개는 충신이요, 고양이는 간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는 십이생초에 들어올 수 있었고, 고양이는 들어올 수 없었다.


개와 인류의 관계는 가장 친근하고 오래되었다. 시종 고생을 하면서 인류를 위하여 봉사했다. 그러나, 개가 얻는 보답은 겉으로 보기에 상응하지 않는다. 개와 관련된 단어는 모두 폄하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구퇴자(狗腿子, 개다리)", 꼬리를 흔들며 불쌍하게 보이다(搖尾乞憐), 구장인세(狗仗人勢)등등. 분명히 사람이 말하는 것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개소리(放狗屁)"라고 한다. 그리고 이 서열에서 모두 자리를 잡은 후에 아직도 남은 것은 그 게으르고 먹기 좋아하는 돼지가 있다. 아마도 돼지가 꼴찌에 해당할 것이다.


기실, 이는 중국민족문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스스로 겸손하다. 즉, 내렴자수(內斂自修), 자아충실, 자랑하지 않는다. 즉, 일반적인 상황하에서, 관계가 가까울수록 서로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왜 자신의 자식을 '견자(犬子)'라고 하겠는가. 다만 다른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는 오히려 "호자(虎子)"라고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자신의 아들과는 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들과 친하다고 여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를 보면, 이렇게 너무나 친하여 닉애(溺愛)의 정도에 이른 경우에는 아들을 낳는 것을 "소견(小犬)"이라고 하고, 어른이 된 후에 며느리를 얻으면 역시 견식(犬媳)이라고 하며, 더 많은 사람들은 직접 아들의 이름을 "구아(狗兒)"라고 짓는다. 왜 윗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글자를 붙이지 않는가. 왜냐하면 윗대에 대한 애정은 경애(敬愛)이고, 아랫대에 대한 닉애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사정과 무관한 '가벼운 폄하'는 관계의 친근함을 더욱 드러낸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아들을 "서자(鼠子)", "토자(兎子)" 혹은 "저자(猪子)"라고 부르지 않을까? 그래서, '일반적인 상황하에서'라고 하는 것이다. 단지 '구체적인 사정과 무관'하므로, 구체적인 일에 있어서 그 누구도 '일을 확대하여' 문제삼을 리가 없는 것이고, 여기에 스스로 겸하하는 것도 있다. 한 사람이 아들에게 어떤 일을 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치자: "나의 그 아들은 한 마리의 개와 같다. 부지런하기가 개다리같고, 예의가 있기로는 발바리와 같다. 일을 하나 맡기면 그는 개처럼 열심히 일을 해서 반드시 완성할 것이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이를 보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스스로 겸허하는 것도 정도와 때가 있다. 너를 추켜세워줄 때는 분명히 의도가 있다.


십이생초중의 개에 대하여 얘기를 계속하도록 하자. 사람들이 개를 앞에 두지 않은 것은 개가 하는 일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과 다르다. 말을 타고서 공명을 얻지 않는가(마상봉후), 말이 있으면 일을 완성시킬 수 있다(마도성공)


다만 개의 공헌은 인류가 알고 있다. 개는 우리 집을 지키고, 소와 양을 지키며, 사냥터에서 앞으로 달려나간다. 이런 것들은 모두 말과 같이 힘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개와 말의 공로를 함께 묶어서 얘기한다. 견마지로(犬馬之勞). 더욱 두드러진 것은, 우리가 하루종일 일하고 쉴 때도, 개는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집을 지키고, 우리의 안전을 보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류에게 좋은 (一人得道)이 있으면, 역시 개를 잊지 않는다. 하늘에 올라갈 때도 그를 데려간다(鷄犬昇天).


돼지라는 동물은 약간 억울하다. 처음에 사람들은 돼지를 집안에 두고(지붕아래에 돼지가 있으면 바로 家이다), 신전에 모셨다(삼생의 하나이다). 지금은 나태, 지저분함, 이치를 따지지 않는 부정적인 전형이 되었다. 이 차이는 실로 너무나 크다.


돼지는 고기가 많고, 살이 부드러우며, 영양이 풍부하다. 번식능력도 아주 강하다. 인류가 기르기 시작한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수렵이라는 위험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서 더욱 맛있는 육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돼지는 인류의 식생활구조개선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돼지를 우리와 함께 살게 하고, 그것을 조상과 신에게 제사지내는데 쓰는 보물로 삼았다.


다만, 이 놈은 나태하다. 배부르게 먹으면 잠을 자고, 부르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사람의 바램이 되었다. 배불리 먹고 움직이지 않으면, 허벅지에 살이 붙는다. 그래서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후각이 그것이다. 인류는 항상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피했다. 최대의 수익은 동물의 장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돼지는 고기가 가장 맛있으니, 그저 우리를 위하여 많이 생산하도록 하면 된다. 이렇게 하다보니, 화장실에서 기르는 돼지는 멍청하고 더럽고 나태하고 탐욕스러움것과 연결시키게 된다. 완전히 '살재(殺材)'가 되고, 인류는 더 이상 돼지를 잘 돌보지 않게 된다.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은 "저자(猪仔)", 멍청한 사람을 욕할 때는"저라(猪玀)", 뭐가먼지 모르는 사람은 "저두삼(猪頭三)"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들 단어는 모두 후세에 나타난 것이다. 최초에 사람들이 돼지를 볼 때는 그저 향락(享樂)뿐이었다. 결론적으로 하나의 '보배'였다. 한무제의 최초 이름은 유체(劉彘, 체는 돼지라는 뜻)이다. 비록 나중에 이름을 고쳤지만, 그가 태자가 되기 전에 교동왕으로 있을 때도 국왕의 이름이 여전히 돼지였던 것이다. 이를 보면 돼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졌음을 알 수 잇다. 이것은 가난한 집안에서와는 달랐다. 천한 이름을 짓는 것은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황제이다. 아이를 잘 기르지 못할까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전의 월왕 구천은 국민의 생육을 장려하기 위하여, 여자아이를 낳으면 돼지 한 마리씩을 하사했다. 다시 주제로 돌아오면, 이 돼지는 확실히 먹기 좋아하고 게으르다. 개처럼 부지런하지 않다.


근로는 부를 획득하는 것이다. 생산에 부지런하든 아니면 '왕사(王事)'에 부지런하든 모두 부를 얻을 수 있다. 나태하고 향락을 즐기면 일찍 죽는다. 지나친 향락은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소모하는 것이다. 즉 돼지와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살이 쪄서 제사의 희생품이 된다. 사람이 만일 개에게서 부지런하고 용감한 것을 배우지 않고 돼지에게서 향락만을 배운다면, 그것은 장수가 아니라 절수(折壽)하는 길이다. 돼지는 많이 먹는다. 그리고 사람이 먹여주어야 한다. 이런 상황을 사람에게 놓고 본다면, 만일 이런 향락이 다른 사람의 노동의 기초위에서 건립된다면, 너는 무망(無妄)한 이익을 얻는 동시에, 목숨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는 꼴이 된다.


십이생초 가운데, 돼지의 역할이 가장 적은 것은 아니다. 최소한, 돼지는 쥐처럼 사람들이 싫어하지는 않는다. 뱀처럼 사람들이 두려워서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도 않는다. 고기만을 공헌하지만, 어쨌든 토끼보댜는 훨씬 많다. 왜 돼지를 맨 끝에 두었을까? 이것은 바로 인생을 총괄하는 의미가 그 속에 들어 있다. 해시(亥時)는 저녁 9시부터 저녁 11시까지이다. 이 시간은 바로 사람들이 잠을 잘 때이다. 하루종일 피곤했던 사람이 쉬어야 하는 것이다. 십이월은 1년에서 마지막 한 달이다. 1년의 노동의 수확을 거두는 대이다. 또한 적절히 쉬면서 즐겨야 한다. 한 사람이 일생동안 힘들게 일하여, 노년이 되면, 쌓아둔 부로 마땅히 즐겨야 한다.


돼지와 개는 우리에게 한 가지 문제를 던져준다: 사람은 어떻게 내놓고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다른 말로 해서 사람은 일생동안 일을 해야 하는지 일생동안 즐겨야 하는지. 이는 우리가 대비하면서 고민해야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