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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주은래는 자식 둘을 어떻게 잃었는가?

by 중은우시 2015. 3. 26.

글: 현세보(現世報)


1952년 가을, 주은래, 등영초는 상해로 가서 업무를 검사하는 동안, 화동유아원에서 보육원으로 일하던 사촌누나 공지여(龔志茹)를 만난다. 공지여는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미중부족(美中不足)한 것은 너희들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이다...."


"무묘무비무자녀(無墓無碑無子女)". 이는 주은래가 죽은 후에 공개된 비밀이다. 그중 특히 자녀가 없다는 것은 주은래가족에게 가장 큰 유감이 되었다.


그렇다면, 주은래는 왜 자녀가 없었을까? 주은래부부의 이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 이에 관해서는 외부에서 아는 사람이 아주 적다.


북경 남례사로(南禮士路)의 한 차루(茶樓)에서 주은래의 조카딸인 주병덕(周秉德)은 아주 유감스럽게 옛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주병덕은 주해빈(周海濱)에게 말한다. 주은래총리 본인도 이 일에 대하여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했다고. "백백(伯伯, 큰아버지. 즉 주은래)와 칠마(七媽, 등영초)가 결혼한 후에 부대를 이끌고 동정(東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등영초는 임신이 되어있었고, 당시는 1925년으로 21살이었다. 등영초는 아직 젊고 일이 중요하고, 혁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아이를 유산시킨다. 백백이 동정에서 돌아온 후 이 일을 알았고, 화를 많이 냈다."


1925년 8월, 천진에서 노동자운동을 영도하던 등영초는 북양정부의 지명수배를 받는다. 중공당조직은 그녀를 광주로 보낸다. 동시에 그녀와 주은래의 혼사를 처리한다.


27살의 주은래와 21살의 등영초는 1925년 8월 8일 결혼한다. 1925년 10월,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 학생을 데리고 장개석을 따라 산두(汕頭)로 동정을 나선다. 이 때,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등영초는 자신이 이미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다. 등영초의 모친은 중의(中醫)였으므로, 어려서부터 그녀는 약물의 작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물로 유산시키는 것을 선택한다. 이것이 바로 주은래가 만나지 못한 첫번째 아이이다. 혁명의 열정때문에 아이는 죽임을 당한 것이다.


등영초의 비서인 조위(趙煒)는 이렇게 말한다: "총리는 그 때 동정에 나서서 광동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향응(何香凝)의 비서를 맡았다. 나는 막 광동에 도착해서 부녀업무를 보았는데, 아이를 낳는 것에 신경쓸 겨를이 있었겠는가. 그녀는 그때 아직 어렸고, 뭘 몰랐다. 듣기 싫은 말로 하자면 마구잡이였다. 길거리의 노점상에게서 낙태약을 샀다. 이때 그녀의 모친은 매현(梅縣)에 있었고, 그녀의 모친은 중의였다. 그 약을 먹고는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 


공개된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다. 등영초가 당시에 걱정한 것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때 주은래는 아주 바빴다. 1924년 8월, 주은래는 파리에서 귀국하여,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 국민혁명군 제1군 정치부주임, 중공양광구위 위원장, 상위 겸 군사부부장을 맡아서, 당을 건립하고 혁명무장군 섭정(葉挺)의 독립단을 영도했다. 1925년 2월, 10월, 제1차, 제2차 동정을 영도한다.


동정에서 돌아온 후, 주은래는 화를 크게 낸다. 주병덕은 이렇게 토로한다: "칠마는 백백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떻게 네 혼자 결정해서 아이를 없앨 수 있느냐. 네가 그럴 권리는 없다. 우리 둘의 아이이지 않느냐. 다시 말해서 너는 아이를 낳는 것과 혁명을 대립되는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 우리가 아이를 낳는 것이 바로 혁명의 후계자를 낳는 것인데,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애를 유산시켰느냐."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주은래부부는 그저 둘째 아이를 낳는데 희망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시 겨우 21살이던 등영초는 이후에 아이를 낳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두번째 임신으로 그녀가 거의 죽을 뻔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1926년 하반기, 등영초는 자신이 또 임신한 것을 발견한다. 이번에 그녀는 모친을 불러서 자신을 돌봐달라고 하며, 주은래의 부친이 되려는 바램을 만족시켜주고자 한다. "칠마는 이 아이를 잘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먹는 것도 아주 조심했고, 아주 잘 먹었다."


이 해 겨울, 주은래는 상해로 가서, 중공중앙 군위서기 겸 중공강절구위 군위서기를 맡는다. 1927년 3월 상해에서 노동자의 제3차무장봉기를 영도한다.


두번째 임신의 출산예정일은 1927년 3월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살고 있었다. 주은래가 상해로 간 후 3개월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태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등영초는 광주에 남는다.


1927년 4월, 그녀는 광주서관 장수서로에 있는 한 독일교회에서 연 산부인과병원에 입원한다. 의사가 검사를 해보니, 태아의 발육은 정상이고, 단지 체중이 정상적인 영아의 표준보다 많이 나갔을 뿐이다.


주병덕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 삼일 밤낮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다. 아이를 낳지 못할 때, 그때는 선진적인 기술도 없었다. 무슨 현재처럼 제왕절개도 없었다. 아이가 너무 커서 나오지를 않은 것이다. 방법이 없었다. 의사는 산겸(産鉗)을 썼다. 그 당시에는 그 강철로 만든 겸자로 아이가 나올 수 있게 사용했다. 그러나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 아이가 요절한다. 살아나오질 못한 것이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10파운드였다. 10파운드는 9근(4.5킬로그램)이 넘는다. 지금도 9근이면 큰 아이가 아닌가. 그때는 확실히 아이를 낳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가 아이를 잘 보호하려고 잘 먹었는데, 오히려 아이를 죽게 만든 것이다."


난산으로 등영초는 의사에게 산겸을 써서 조산하게 했지만, 결국 아이가 나오기는 했고, 사내아이였는데,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가고 산겸을 너무 힘을 주어 썼기 때문에 아이는 출생하자마자 요절한다.


등영초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일찌기 두 아이를 가졌다. 두 아이의 모친이었다. 그러나 그런 복은 없었다."(등영초의 비서 조위의 말)


주병덕은 이렇게 말한다: "등영초가 아직 몸조리하고 있을 때, 나중에 대도살을 피하기 위하여, 광주에서 홍콩으로 옮겨간다. 나중에 다시 홍콩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간다. 이 과정에서 등영초는 구토를 계속했고, 아주 힘들었다."


주병덕이 말하는 '대도살'은 1927년의 "4.12사건"이다. 장개석이  주은래를 잡는데 현상금20만위안을 내걸었다. 


"칠마와 광동부련에서 같이 일하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날 돌연 귀부인처럼 차려입고는 그녀의 진료실로 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빨리 옮겨라. 현재 국민당이 공산당원을 잡는다. 조직에서 너를 급히 상해로 옮기라고 했다." 그후 등영초의 모친은 수발실에서 전보를 받는데,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급히 상해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상황이 긴급하므로, 그저 그녀의 해산을 도운 의사와 상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의사는 등씨모녀를 후원의 작은 창고에 숨겨준다: "옮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당이 도착하여 등영초를 찾는다. 원장은 이곳에는 등씨성의 산모가 있었는데, 아이를 사산했고, 그녀는 이미 퇴원해서 떠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반나절을 수색하고는 할 수 없이 철수한다. 그때 병원에서는 매주 한 척의 작은 배를 광주에서 홍콩으로 보내어 의약품을 구매하고 있었다. 의사는 등영초에게 간호사로 변장해서 구매하러 가는 것처럼 보낸다. 그녀의 모친은 일꾼으로 변장해서, 두 사람은 홍콩으로 간다. 그후에 배를 타고 상해로 갔다. 이 며칠간의 고생으로 담즙을 토하게 된다. 산모가 몸조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산후조리는 아예 하지도 못하고, 긴장되고 피로한 상태로 상해로 가게 된 것이다."


상해에서 등영초의 모친은 신문에 오호(伍豪)를 찾는 광고를 낸다: "주은래의 필명이 오호이기 때문이다. 국민당은 오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냥 우리가 왔다. 어느 여관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주은래는 협소한 정자에 숨어서 매일 신문을 보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매일의 국세뿐아니라 등영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관의 이름을 보자 깜짝 놀란다. 첫날 한 외지인이 상해로 와서 당중앙을 찾다가, 이 여관에 투숙했는데, 국민당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는 사람을 보내어 모녀를 일본인이 연 개인진료소로 옮겨가게 한다. 의사는 검사를 마친 후, 등영초가 해산한 후 휴식을 취하지 못하여, 자궁이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에는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이번 길의 고생과 심리적인 긴장에 난산으로 인한 출혈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여, 상해에 도착하고나서 과도한 피로로 그녀는 해산후에 자궁이 수축되지 못했고, 이후 다시는 임신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하여, 주은래의 두번째 골육도 그와 만날 인연을 얻지 못한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주은래, 등영초부부의 일생에서 가장 큰 유감이었다.


등영초는 일찌기 비서 조위에게 자신이 가명으로 저명한 산부인과 전문가 임교치(林巧稚)를 찾아가서 치료를 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조위는 이렇게 회고한다: "북경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1950년인가 1949년인가, 그녀는 협화의원의 부인과를 찾아간다. 그녀는 가명을 썼다. 그녀는 평소에 약을 탈 때는 이명(李明)이라는 가명을 썼고, 등영초라고 쓰지 않았다. 협화의원으로 가서 임교치를 찾아서 진료를 한다. 임교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수란관이 이미 막혔다고 말한다. 그때 그녀는 사십여세이다. 그녀는 1904년생이다. 만일 치료하려면 막힌 것을 뚫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등영초는 나는 이미 4,5십이고 이미 수십년이 지났는데, 치료할 필요가 없다. 됐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임교치는 나에게 투덜거린 적이 있다. 조비서, 그때 내가 그녀인줄 알았다면 내가 그녀를 어떡하든 설득해서 치료했을 것이고,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다. 나중에 알고는 그녀를 설득했으나 그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등영초는 안되는 일을 굳이 하려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수십년이 지났지 않는가. 이십여년을 쓰지 않았는데, 쉽게 뚫리겠는가. 필요없다. 그래서 난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도 자녀가 없어서 상심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그녀와 총리(주은래)는 모두 아이들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그들 둘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전중국의 청년이 모두 우리의 자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