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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십이생초(十二生肖)의 원숭이와 닭: 외(外)와 내(內)의 성상(性狀)

by 중은우시 2015. 3. 26.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원숭이(猴)는 영장류의 동물이고, 원(猿)와 비슷하나 약간 작으며, 협낭(주머니)와 꼬리가 없다. 우리 인류와 친척관계가 가장 가까운 동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친근한 것처럼 원숭이와도 친근하다. 다만 "원숭이(猴)"라는 글자는 진(秦)나라때 나온다. 이전에 이런 동물은 "노(猱)"라고 불렀다. 중국에는 미후(獼猴)가 많이 산다. 중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원숭이는 바로 '미후'이다. '후'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노'는 점차 미후를 가리키는 전용어가 된다. 그리고 '사(蛇)'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견(犬)"(큰개)과 "구(狗)"(작은개)를 합쳐서 통칭 '구'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이것은 바로 설명해준다. 십이생초의 출현은 한나라때라는 견해가 정확하다는 것을. 그러면 이전에는 생초라는 말이 없었을가? 그것은 아니다. 단지 이전에는 완전하지 않거나 혹은 일치하지 않았는데, 한나라때에 이르러 국가가 통일되고 안정되니, 십이생초도 그 형태가 완성된 것이다.


십이생초중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원숭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숭이에 대하여는 뼛속부터 친근감이 있다. 원숭이는 사람을 닮았다. 사람을 직접 원숭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것은 다른 동물과 다르다. 그저 어떤 행위에 대한 묘사나 비유가 아니다. 예륻 들어, "소후자(小猴子)" - 어린아이; "피후(皮猴)" - 어린아이가 장난꾸러기이다; 니후(泥猴) - 몸과 얼굴이 모두 더럽다. 후정(猴精) - 기민하고 재빠르다. 이들 단어는 모두 '원숭이같은'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직접적으로 '원숭이'라고 하고 있다.


원숭이는 천성적으로 움직이기를 좋아하고, 기어오르고 팔을 뻗고 뛰어오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무 위에 조용히 앉아있지를 못한다. 이것은 계속하여 진취적이고, 현상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숭이는 왕왕 사람의 동작을 따라한다. 간단한 도구도 사용하고, 인류이외에 가장 총명한 동물이다. 십이생초중에서 첫째로 손꼽힌다. 이는 사람이 그들을 스승으로 삼아,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계속 풍부히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申)에게는 편다(舒展)는 의미가 있다. '신', '후'는 서로 짝이 되어, 사람이 작은 것을 얻고 만족해서는 안되고, 계속 진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성공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최고목표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의 최고분투목료는 무엇이었을까? '봉후(封侯)', 즉 제후에 봉해지는 것이다. 왜 최고목표가 '후'였을까? 황제가 아니고. 황제는 천자이다. 황제가 되는지 아닌지는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황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 많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 이것은 사람의 뜻에 맞지 않는다. 왕은 황족이다. 혈연관계로 얻는 것이지 분투의 결과가 아니다. 단지 '봉후'만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이것은 억측이나 함부로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봉후'의 '후'와 원숭이의 '후'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후(侯)는 최초에는 과녁이었는데, 나중에 점차 변해서 '작위'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활을 쏘는 것(射箭)이 사후(射侯)이고, 과녁에 맞는 것(中靶)이 중후(中侯)이다. 이는 나중의 과거급제(中擧), 장원급제(中狀元)와 같다. '후(猴)'는 비록 직립보행하지만 여전히 견(犬)형 동물이다. 원숭이들이 나무 사이에서 뛰고 날때, 마치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이 신속하고, 민첩하며, 정확하고 직접 목표에 도달한다. 즉, 사람이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성격대로 하여(率性而爲), 직접 그 최고묙표를 취하고 앞뒤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사람의 분투향상, 현상에 안주하지 못하는 것 및 타고난 성격대로 하는 것에는 한도가 있다. 이것이 바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즉, 제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닭의 의미는 바로 제약이다. 


닭의 문자를 "계(鷄)"로 쓴 것은 묶여진 새(系鳥)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해(奚)"자는 노예를 표시한다. 노예가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노예주는 끈으로 그들을 묶었다. "해"자의 곁에 새(鳥)를 붙이면, 바로 이 새는 노예와 마찬가지로 묶여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이런 것을 설명해준다. 닭은 조류이다. 십이생초중에서 조류의 대표이다. 조류는 아주 많다. 예쁜 것으로는 공작, 위맹한 것으로는 매, 고귀한 것으로는 학, 같은 가금류로는 오리, 거위가 있다. 왜 닭이 선택되었을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들이 닭을 가장 익숙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원래 닭과 꿩은 근친이다. 지금도 우리는 꿩을 야계(野鷄)라고 부른다. 조류의 대부분은 철새이다. 가을에 가고 봄에 온다.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그러나 꿩, 닭은 다르다. 그들은 텃새이다. 해가가고 달이가도 사람의 곁에 있다. 사람은 그래서 익숙해하고 친근해 한다. 닭의 털은 예쁘고, 성격은 위맹하고, 기질은 고귀하다. 조류의 우수한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십이생초에 집어넣는 것은 사람들에게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유방의 부인의 이름은 여치(呂雉)이다. 황후가 된 후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한 여자아이의 이름이 '치'라니, 이를 보면 '치'는 좋은 새임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이는 단지 공허한 얘기이다. 사람들은 실질을 숭상한다. 닭이 우리 집에 있다면 무슨 재주가 있고 무슨 쓸모가 있는가? 십이생초가운데, 가축에 속하는 것은 모두 쓸모가 있다. 야계는 1년에 3,4번 알을 낳고 매번 3,4개의 알을 낳는다. 사람들이 이 십여개의 알을 위하여 그것을 길러야 할까? 알아야 할 것은 닭은 곡식을 먹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 원인때문이라면, 사람들은 차라리 풀숲에서 찾는게 낫다. 기를 필요는 없다. 그것은 토끼가 이니다. 토끼는 풀을 먹는다. 번식력도 아주 강하다. 인류로서는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 풀을 가지고 영양이 풍부한 육식으로 바꿀 이유는 충분하다.


사람들이 닭을 기르는 것은 닭이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때문이다. 그래서 닭을 사시지신(司時之神)이라 부른다. 닭은 깊은 밤에도 시간을 알고, 태양이 언제 뜨는지 안다. 울 줄 아는 수탉은 바로 상고사회의 시계였다. 고인은 "일출이작(日出而作), 일입이식(日入而息)"(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쉰다)했다. 어제 일하느라고 피곤하여 오늘 일어나는 것을 잊어버렸든지, 아니면 고의로 나태를 부려서 일어나지 않았든지, 혹은 날씨가 흐려서 하늘이 밝은줄 몰랐든지간에, 닭은 해가 떴다고 알려준다. 잠에서 깨어 일할 시간이라고 알려준다. 이는 노동자의 '자명종'이다. 닭은 아침시간을 알려줄 뿐아니라, 저녁시간도 알려준다. 유시(酉時)는 저녁 5시에서 7시이다. 겨울에서 여름까지 해가 지는 것은 바로 이 시간대이다. <시경>에 "계서어시(鷄棲於塒)"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닭이 집으로 들어간단 말이다. 일하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쉬어야 할 때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닭은 사람의 "한시기(限時器, 시간을 정해주는 기기)"이다. 매일 사람들에게 일할 시간과 쉴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원숭이와 닭을 함께 놓으면, 자유롭지만 제약이 있다. 즉, 모든 외재적인 자유행위는 반드시 내심의 제약을 받는 행위여야 한다. 현상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가지 않아서도 안되고, 아무런 제약없이 자의로 행동해서도 안된다. 현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법률과 도덕의 범위내에서, 충분히 개인의 재능을 펼쳐야 하다. 이렇게 해야만이 스스로 정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