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의 "천황(天皇)"

중은우시 2015. 3. 4. 00:00

글: 지백수흑(知白守黑)

 

당금세계에서 국가원수는 대통령, 주석, 국왕으로 칭한다. 단지 일본에서만 '천황(天皇)'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천황이라는 글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일본을 떠올린다. 기실, 천황이라는 단어는 일본에 특유한 것이 아니라, 중국역사에도 천황들이 있었다. 이들 천황의 칭호는 전설상의 것도 있고, 어떤 경우는 스스로 봉한 것도 있고, 어떤 경우는 사후에 후인이 추시(追諡)받은 경우도 있다. 역사는 말한다. 천황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특허가 아니고, 천황은 정종의 made in China이다.

 

중국의 천황이라는 단어를 말하자면, 부득이 원고시대의 '삼황오제'를 언급해야 한다. 왜냐하면 삼황가운데 천황이 있기 때문이다. <사기.시황본기>에는 이사가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옛날에 천황이 있고, 지황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는데, 태황이 가장 존귀하다". 이는 중국고대서적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천황이라는 단어에 대한 기록이다. 이 천황이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사기>에서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후인들이 오히려 점차 구체화시킨다. 비록 삼황 가운데 천황이 복희씨인지, 수인씨인지에 대하여는 논쟁이 많다. 다만 두 사람중 최소한 한 사람은 중국최초의 천황이다. 그들중 한 명은 불을 발명했고, 한 명은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것을 발명했다. 이는 사전문명시기(史前文明時期)에 상당히 대단한 대사이다.

 

진시황이 황제를 칭한 후, 나중의 황제는 대부분은 분수를 지키며 황제라는 옛명칭을 여전히 사용했다. 남북조때, 북주의 제4대황제 주선제(周宣帝) 우문윤(宇文贇)이 분수를 지키지 않고, '천황'에 흥미를 느낀다. 그는 포악하고 황음한 군주였다. 선정원년(578년), 부친이 죽고 그가 황제에 오른다. 그후 첫번째 한 일은 부친의 비빈을 모조리 불러서 용모가 뛰어난 자들을 자신이 취한다. 황제가 된지 1년도 되지 않아 그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려 7살된 아들 우문연(宇文衍)에게 선위하고, 자칭 천원황제(天元皇帝)라 칭한다.

 

우문윤이 이선으로 물러난 후, 거주하는 곳은 '천대(天臺)'라 부르고, 신하에 대하여 스스로를 '천(天)'이라 칭하며, '제(制)'를 '천제(天制)'라 부르고, '칙(勅)'을 '천칙(天勅)'이라 부른다. 대신들이 그를 만나려면 반드시 3일간 육식을 금하고, 하루동안 몸을 씻는다. '천'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은 모조리 황제의 것으로 삼는다. 사람을 때리는 120대의 곤장도 '천장(天杖)'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으로 부른다. 그는 비록 직접 자신을 '천황'에 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전후로 책립한 5명의 황후는 '천황후(天皇后)'라는 봉후를 붙인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우문윤의 아믐 속의 '천원황제'는 실은 '천황'이다. 천황이 없으면 어떻게 천황후가 있겠는가?

 

당나라때가 되자 또 분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 사람은 바로 무측천이다. <신당서.고종>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영휘6년(655년), "겨울 십월 기유일, 황후 왕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다. 소의 무씨를 황후로 삼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다." 여기서 나타난 것은 단지 고종 이치가 부인을 바꾼 것이고, 무측천이 황후가 된 것이고, 천황이라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상원원년(674년), 새로운 일이 발생한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팔월 임신, 황제는 천황(天皇)이라 칭하고, 황후는 천후(天后)라 한다" 이치의 황제는 천황이 되고, 무측천의 황후는 천후로 바뀐다.

 

황제와 천황은 그저 명칭이 다른 것이고,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모두 국가에서 지고무상한 사람이다. 이치는 왜 유독 명칭을 바꾸었을까?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말한다: "황제를 천황이라 부르고, 황후를 천후라 부른 것은 '선제(先帝)';, '선후(先后)'의 칭호를 피하기 위함이다." 송,원시기의 사학자인 호삼성(胡三省)은 한 마디로 그 비밀을 파헤쳤다: "실은 스스로를 높이기 위하여, 선제,선후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무후의 뜻이다." 보기에 이치가 자칭 천황이 된 것은 그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다. 무측천이 수렴청정에 만족하지 않고, 이치의 사후에 계속 대권을 장악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무측천이 천후가 되기 위하여, 이치에게 천황이라고 부르자고 재촉한 것이다. 이 결과를 얻기 위하여 무측천은 얼마나 많이 배겟송사를 했을까. 그녀가 목적을 이룬 후, 과연 무대의 전면에 나서고, 천후에서 황제로 변신한다.

 

당고종 이치와 오대(五代) 남한(南漢)의 개국황제 유척(劉陟) 두 사람은 연분이 있다. 그들은 비록 성이 다르지만 이름은 비슷하다. 같은 왕조는 아니지만, 한(漢)이라는 이름의 유척이 집권할 때의 책략은 당나라때의 모델이다. 사후의 시호도 같다. 모두 '천황대제'이다. 다른 점이라면, 이치는 생전에 '천황'이 되었고, 마누라가 천후가 되었지만, 유척은 사후에 '천황'의 칭호를 받고, 황위를 넘겨준 것이 마누라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이다.

 

"시(諡)는 행지적(行之迹)이고, 호(號)라는 것은 표지공(表之功)이다." 고대제왕, 제후가 죽은 후에 조정은 그들의 평생행위에 근거하여 칭호를 주어 포폄선악(褒貶善惡)하는데, 이를 '시호'라 부른다. 유척도 '천황대제'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천황의 요소가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원래, 917년 유척은 광주에서 황제를 칭하며 남한정권을 건립한 후, "학교를 세우고, 과거를 열고, 관리선임심사를 하여, 당나라의 제도를 본뜬다." 그에게는 개명하는 괴벽이 있었다. 원래 이름이 척인데, 황제가 된 후에는 암(巖)으로 바꾸고 다시 공(龔)으로 바꾼다. 마지막에는 이치의 마누라 무측천을 배워 글자를 만든다. <주역>에 나오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라는 의미의 "엄(龑)"자를 만들어 이름으로 삼는다. 이 글자에 그는 아주 만족하여 다시는 바꾸지 않았다. 후진 천복7년(942년) 사월, 유엄은 광주에서 죽는다. 그때 나이 54세였다. 아마도 후대는 그의 '비룡재천'의 바램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인지 그에게 '천황대제'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

 

거의 동시에, 북방의 거란부락의 우두머리인 야율아보기는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거란의 각 부족을 통일시킨다. 중국고대 북방의 천황이 이렇게 탄생한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등극하며 '천황왕(天皇王)'이라는 존칭을 얻고, 국호를 거란(契丹, 나중에 大遼로 바꿈)이라 한다. 연호는 신책(神冊)이라 한다. <요사>의 '천황제"를 <거란국지>에서는 '천황왕'으로 기록한다. 천황왕은 분명 천황칸(天皇可汗)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천황은 칸의 호인 것이다. 요 천현원년(926년), 야율아보기는 부여성(지금의 길림 사평 서쪽)에서 사망한다.사후의 시호는 '천황제'이다. 그후 황후 술율권이 군국대사를 결정한다. 그는 차남을 편애하여, 천현2년(927년) 십일월, 차남 야율덕광을 천황왕으로 올린다. 천황왕은 술율후를 태후로 모시고, 국사는 모조리 태후가 결정한다.

 

그 이후의 사료에서 다시는 중국황제가 '천황', '천황대제', '천황제'라는 류의 명칭으로 스스로를  봉하거나 존칭으로 불리거나, 시호를 받은 사람이 없다.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중국역사상 천황은 모두 북주 주선제 우문윤, 당고종 이치, 오대 남한개국황제 유척, 요태조 야율아보기와 요태종 야율덕광이다 만일 전설상의 '삼황오제'중의 천황도 포함한다면 중국역사상 최소한 6명이상이 생전에 혹은 사후에 '천황'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 시간은 원고시대에서 요나라때까지로, 상하로 수천년에 걸쳐 있다.

 

역사상 6명의 천황칭호의 원류를 보면, 정치적인 수완과 후인이 존칭으로 부른 것을 제외하면 그의 모두 한 가지 견해를 나타낸다: "권력이 하늘보다 크다"(權大於天). 이는 황제라는 칭호와 비교하여, 더 이상 신비할 것도 없다. 나중에 중국황제는 더 이상 '천황'이라는 두 글자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중국은 일찌감치 자신이 써봤던 것을 다른 사람이 보배로 여기지만, 그들은 이를 별 가치있게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었건, 중국의 일부 황제는 일찌기 천황이다. 그리고 역사도 유구하고, 영향도 심원하다. 그러나, 현재의 사람들은 생각이 더욱 활발하다. 특히 오락계에서 누가 인기를 끌면 모두 '천황거성'이라 부른다. 그 뜻은 역시 '지고무상'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