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생활문적(生活文摘)
어떤 TV드라마를 보면 우리는 자주 '상방보검'에 대하 묘사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포청천>에 나오는 포공(包公)은 상방보검을 갖고 있다. 중국역사상 정말 상방보검이 존재했을까? 이 문제는 중국의 진한(秦漢)시대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상방(尙方)"은 전문적으로 황실을 위하여 도검병기(刀劍兵器)와 진복기완(珍服器玩)을 제조하는 기구이다. 진나라때 이미 있었고, 한나라때는 아주 유명했다. "상방"이 만든 보검은 칼날이 날카롭기 그지없어, 말을 벨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참마검(斬馬劍)"이라고 불렀다. 중국고대에는 예법을 아주 중시했고, 상방보검은 황실에서만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보검은 만들어질 때부터 황권과 특권이 부여된다.
"상방보검"이라는 명칭은 서한의 한성제(漢成帝)때 나온다. <한서, 주운전>의 기록에 따르면, 직언하고 간언하는 주운(朱雲)이 황제에게 "상방참마검"을 한 자루 하사해달라고 한다. 이를 가지고 황제의 스승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를 주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주운은 '상방보검'을 얻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절함주운(折檻朱雲)"의 고사이다. 한나라이후 여러 왕조에서 "상방보검"으로 간신적자를 주살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바램이었다.
상방검이라는 이름으로 전단(專斷)권력을 상징한다. 그리고 융중한 검수여의식은 원(元)나라때부터 시작한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때, 도사 장류손(張留孫)이 신도로 황후의 병을 치유하여, 황제와 황후가 크게 기뻐하며, 상방에 명하여 보검을 주조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이때의 "상방보검"은 비록 전단권력의 상징이지만, 아직 정무와 군사에 사용되지는 않았다.
상방보검제도를 건립하고, 전단, 전살(專殺)과 편의행사(便宜行事)의 권력을 부여한 것은 명나라 만력제때부터이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만력20년, 영하에 반란이 일어나고, 만력제는 총독 위학증, 순무 섭몽웅에게 상방검을 하사하여 독전하게 하고, 그 결과 대승을 거둔다. 이때부터 상방검을 하사하는 것은 전제, 전살 및 편의행사권력을 수여하는 방식이 점차 번잡해지기 시작한다. 숭정17년, 이자성이 산서로 진군할 때, 숭정제는 상방검을 하사하는 행사를 벌인다.
"상방보검"이 반영하는 것은 일종의 '인치(人治)'관념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당성세의 정치가 청명한 시기에는 '상방보검'이 그저 인민사상의 상징물이었고, 명조 중후기에 그것은 비로소 현실중의 제도가 되었다. 진실한 포청천은 송나라때 생활했지만, '상방보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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