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위민(仲偉民)
1837년, 광주(廣州)와 마카오(澳門)에서 출판하는 중국을 소개하는 잡지에, 한 중국예술가가 삽화를 덧붙인 글을 싣는데, 이 글을 생생하게 아편에 빠진 한 부잣집아들이 건강하고 부유한 생활에서 고통스럽고 빈곤한 처지로 전락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화면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1. 집에 있는 한 젊은이가 화려한 옷을 입고, 몸은 건강하며, 활력이 넘쳤다. 그의 뒤에 있는 대리석탁자에는 정교한 외국시계가 놓여 있고, 그의 오른쪽에 놓인 보석상자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다. 그의 곁에는 시중드는 하인들이 있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는 또 다른 하인이 아편을 사서 가져오고 있다.
2. 그는 호화로운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입에는 담뱃대를 물고 있으며, 기녀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중 두 기녀는 젊고 예쁘다. 그는 씀씀이가 커서 한번에 천금을 내놓는다.
3. 그는 아편을 죽어라 좋아했고, 끊임없이 탐닉한다. 이런 생활에 빠져서 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은 창백해지고, 몸은 바짝 마른다. 두 어깨는 솟아오르고, 이빨을 빠지고 입은 벌어진다. 얼굴색은 잿빛이다. 하루종일 멍청하게 있으면서 아무런 활력도 없다. 이런 상황하에서도 그는 보통의 수의(睡椅)에 누워서 여전히 담뱃대를 물고 있다. 그의 곁에는 아편피우는데 쓰는 도구들이 늘어져 있다. 이때 그의 처첩들 처 하나와 첩 하나가 걸어들어온다. 처는 보석상자가 이미 텅 빈 것을 발견하고, 옆에 눈썹을 찌푸리고 서서 깜짝 놀란다. 소첩은 수의에 놓여 있는 아편피우는 도구들을 의혹에 가득찬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4. 그의 전답과 건물은 모조리 사라진다. 수의도 이제는 조잡한 판자에 낡은 방석으로 바뀐다. 맨발에 옆으로 돌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머리는 약간 앞으로 숙여져 있고, 숨을 거칠게 쉬고 있다. 그의 처는 앞에 서 있는데, 의복이 남루하고, 배고픔에 힘들어하고 있다. 아들 하나가 분노하여 그의 모든 아편을 피우는 도구를 땅바닥에 집어던져 부숴버린다. 아직 철이 들 든 막내아들은 손뼉을 치면서 웃고 있다. 마치 게임을 보는 것처럼. 그러나 그 본인은 이런 광경에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덤덤하다.
5. 그의 아편중독은 갈수록 심해진다. 그러나 그의 현재 생활은 빈곤해져서 절망한다. 마치 썩은 나무와 같다. 이런 상황하에서도 그는 여전히 몇푼의 동전을 가지고 급히 아편판매점으로 가서 약간의 하급아편을 사서 피운다.
6. 그의 역할을 고정되었다. 연귀(煙鬼). 아편중독자. 그는 대나무의자에 앉아서 계속 국수를 먹고 있는데, 더럽기 그지없다. 찻물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삼킬 수 있다. 그의 처는 옆에 앉아 있는데, 대나무통에는 잔사를 뽑아서 공처럼 만들고 있다. 이렇게 힘들게 벌어서 겨우 버는 약간의 수입으로 생계를 힘겹게 유지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아편흡입자의 초상이다. 만일 여기에 하나의 화면을 더한다면 아마 처자식이 모두 떠나고, 마지막에는 이 가련한 아편중독자는 길거리에 쓰러져 죽어 있고, 들개가 뜯어먹는 것이 될 것이다.
아편을 얘기하자면, 중국인들은 먼저 근대에 당한 치욕을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왕왕 중국인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아편이 중국근대고난의 근원이라고도 말한다. 이런 인식은 대체로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아편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에 그쳐서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아편이 마약이라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 몇천년동안, 아편은 대부분의 시기에 일종의 영단묘약(靈丹妙藥)으로 취급되었다. 심지어 일종의 신물(神物)로까지 인식되었다. 그리고, 아편은 서방에서 발견되고 사용된 역사가 중국에서보다 훨씬 길다. 영향도 훨씬 컸다. 기존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유럽은 앵속(罌粟)의 고향이다. 최초로 앵속을 인공재배한 곳도 유럽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년전인 신석기시대에, 유럽의 많은 지방에서는 완전한 야생과 인공재배된 앵속종자와 과실의 유적이 온전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의 사람들이 앵속을 심은 목적을 아직은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다. 아마도 진통제로 썼거나 기름을 짰을 수도 있다. 아마도 종교의식에 썼을 수도 있다. 그후 이 식물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유역으로 전해진다. 수메르인들은 아마도 앵속의 진정한 비밀을 알아낸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앵속을 "사람을 즐겁게 하는 식물"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늦어도 지금으로부터 3000년전에, 아편에 관한 지식은 유럽,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널리 퍼진다. 비교적 신뢰할만한 최초의 아편에 관한 기록은 이집트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개략 지금으로부터 3500년전의 묘장에서, 사람들은 아편의 샘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도시 테베(Thebes)는 아편생산으로 유명했다. 아편에 들어있는 중요성분인 알칼로이드(식물염기)의 테바인(Thebaine)은 이 도시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집트에서 아편은 종기를 가라앉히거나, 두통을 그치게 하거나, 외상을 치료하거나 시끄러운 아이를 진정시키는데 썼다. 고대이집트의 파피루스문서에는 이런 처방이 남아 있다: "앵속, 과일잼과 담장의 파리똥을 함게 여과한 다음 4일동안 연속 복용하면, 효과가 나타난다" 이 방법은 전세계의 사람들이 사용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유럽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모친이나 보모는 불안정해하는 아이들에게 아편을 먹였다. 영국의 여성방직공은 낮에 일을 힘들게 하므로, 저녁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많은 모친들이 이렇게 했다. 그외에 아편은 식욕을 억제하는 기능도 있다. 가난한 집의 아이들에게 아편을 먹이면 배고픔을 느끼는 것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래서 먹거리지출을 줄일 수 있다. 한 관찰가가 말한 것처럼, 3,4세가 되면 많은 아이들은 영양불량으로 건강상황이 나빠진다. "노인네들처럼 쪼그라들거나, 원숭이처럼 말라버린다" 그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가난한 아이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계속 가난하고, 많은 경우 아편중독이 된다. 근대중국에서, 아편은 더욱 불가사의한 역할을 한다. <하문지>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적지 않은 부유한 집안에서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서 도박을 하거나 시비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편으로 유인해서 아이를 집안에 가두어놓고 아편을 흡입하게 했다.
19세기초에도 사람들은 아직 아편이 일종의 마약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는 금주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아편흡입금지령은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편은 해롭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이렇게 생각한다. 18세기말 19세기초의 유럽낭만주의문학의 탄생은 아편과 큰 관계가 있다고. 만일 아편이 없었더라면, 가장 뛰어난 일부 작품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낭만주의문학의 핵심은 상상의 부활이다. 상상의 날개와 서술의 결합으로 더욱 자유롭고 주관적인 격정, 비애 및 다른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일률적인 묘사가 아니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아편의 자극이 필요했다. 이 시기의 낭만주의작가 예를 들어 괴테,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워즈워스, 스코트, 셸리, 바이런, 드퀸시등의 관련작품창작은 아마도 모두 아편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가는 아편중독에 빠진다. 사살상 이러하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아편중독에 빠진 후, 가장 유명하고 가장 좋은 작품을 써낼 수 있었다. 용감한 드퀸시는 1821년에 출판된 자전적소설 <한 아편흡입자의 고백>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아편이지 그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작품에서 많은 페이지를 자신이 아편을 흡입한 후 느끼느 기묘한 느낌을 적었고, 유명한<아편송>을 썼다:
"아. 공평하고 강대한 아편이여. 가난한 자와 부자를 모두 동일시한다. 너는 그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와 "그 정신의 반란을 유인하는' 고민에 고통의 향지를 감경시킨다. 웅변의 아편아. 너는 암흑의 중심에서, 두뇌와 환상의 마음으로 도시와 사묘를 건설한다...그것은 바빌론과 헤카톰필로스보다 화려하다. 어지러운 꿈속에서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미인과 이미 죽은 가족의 얼굴을 '분묘의 불명예'를 깨끗하게 씻어낸 후 다시 밝은 대낮으로 불러낸다. 너만이 이런 선물을 인류에게 줄 수 있다. 너는 천당의 열쇠를 갖고 있다."
아편의 복용은 보통사람들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많은 국가의 군대에서도 아편을 대량으로 복용했고 그것은 정부의 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때 쌍방의 군대는모두 아편을 썼다. 왜냐하면 힘들고 열악한 전쟁환경에서, 아편을 복용하는 것은 효과적으로 유행성이질과 설사를 방지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라도 고향생각과 가족을 잃은 고통을 잃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연방군대에서 아편은 정부가 양을 정해서 배극해주었고, 정기적으로 전사의 손에 쥐어졌다. 유럽의 각국군대에서, 아편은 주류 이외에 가장 환영받는 것이었다.
19세기초이전에, 세계각지에서는 아편을 홍수맹수처럼 보지 않고 있었다. 아편은 술, 담배와 마찬가지로 그저 사람들의 기호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여기에 아편은 병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편을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과학자나 의사들이 아편에서 순수한 물질(실제로는 더 쉽게 사람들이 중독되는 물질)을 분리해낸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아편을 마약으로 보지 않았다. 아편의 성분은 아주 복잡하다. 이미 알고 있는 20여종의 알칼로이드(식물염기)가 총중량의 25%를 차지한다. 그중 가장 주요한 성분은 모르핀(10%), 코데인(0.5%), 테바인(0.2%), 염산파파베린(1%), 나르코틴(6%)등이 있다. 헤로인은 독일과학자가 모르핀에서 뽑아낸 또 다른 일종의 알칼로이드이다. 독일어 Heroisch이 뜻은 "만능의 혹은 영웅의"라는 뜻이다. 임상실험을 통하여 그 약효(진통 혹은 진정)는 모르핀의 5배 내지 10배라고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아편은 몇 가지 가장 주요한 마약의 원천이다. 사람들은 아편을 "마약의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딱 들어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정식으로 마약을 인식하기 전에, 사람들은 일찌기 이독제독으로 모르핀을 통하여 아편을 치료하려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은 모르핀을 주사하게 되면 사람이 중독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대다수의 사람은 아편이 중독되는 것은 그것이 구강의 미각과 위의 소화를 거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헤로인이 막 출시되자, 다시 모르핀중독을 치료하는 특효약으로 보았다. 1910년이후, 의학계에서는 헤로인의 위험성에 대하여 비교적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된다.의학적으로 사용을 점차 감소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때 헤로인은 이미 전세계에 회복할 수 없는 영향을 조성해놓았다.
아편을 간단하게 되돌아보는 것은 중국근대의 아편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 세계적인 안목으로 볼 때, 세계의 다른 지방에서 아편을 재배하고 사용하는 역사는 중국보다 유구하다. 사용범위도 훨씬 넓다. 그러나 다른 국가에서는 아편으로 인하여 심각한 사회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은 달랐다. 아편은 근대중국의 비참한 운명가 거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확실히 생각해보아야할 현상이다.
사료기록으로 보면, 중국인은 당나라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랍상인으로부터 앵속을 알게 되고 재배하기 시작한다. 최초에 그것은 관상식물로 재배되었다. 송나라이후, 사람들은 점차 아편의 약용가치를 알게 된다. 실무적으로 아편이 이질, 기침, 치질등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강한 약이어서 사용때 아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낸다. 명나라 중엽이후, 중국에 기본적으로 아편에 중독한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편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부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인도인들은 이미 광범위하게 아편을 사용하고 기본생활에서 불가결한 물건이 되었다. 1513년, 포르투갈의 인도총독은 인도인들이 보편적으로 아편을 사용하는 상황을 기록한다. 그는 포르투갈국왕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저하가 저를 믿을 수 있다면, 저는 포르투갈의 모든 토지에 앵속을 심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아편을 뽑아낼 것입니다. 아편은 바로 이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품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노동자들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인들은 만일 아편을 피우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를 보면 인도에서 아편을 피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이는 300년후의 중국의 상황과 정말 유사하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일은 이 총독의 말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도는 긓에 아편수입대국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최대의 아편생산 및 수출국이 된다. 포르투갈국왕이 그의 건의를 듣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중국인들은 짧은 시간내에 아편에 중독되게 만들었을까? 혹시 아편에 정말 무궁무진한 법력이 있단 말인가? 왜 계속하여 아편을 좋아하던 인도인이나 나중에 아편을 즐기게 된 북미인들은 여기에 중독되지 않았을까? 왜 아편은 유독 중국인에게만 거대한 재난을 불러왔을까? 이전에 우리는 이 문제를 간단화하고 정치화해서 설명했다. 그리하여 역사의 진생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아편이 중국에서 범람하게 된 것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원인이 있다. 첫째는 외래적인 각종요소의 영향이고, 둘째는 중국자신의 원인이다. 내부적, 외부적 요인이 상호작용을 하고 그것이 겹치면서 중국인은 아편의 최대소비집단으로 된다. 또한 중국인이 근대화과정에서 최대의 희생국이자 최대의 패배자가 되게 만든다. 월러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의 현대화과정에서, 전세계는 핵심지역, 반주변지역과 주변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주변지역은 무상으로 약탈당하며, 핵심지역을 위하여 봉사했다. 이 이론대로라면, 근대중국은 자연히 주변지역이다. 핵심지역 즉 서방에 무상으로 시장과 원료를 제공하는 지역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외래요소라는 것은 중국이 아직 지구가 둥근지 네모난지도 아직 모르는 상황하에서, 흐리멍텅하게 최초로 글로벌화과정에 끌려들어가게 된다. 동방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동방의 부에 대한 탐욕으로 많은 서방의 탐험가들은 동방으로 온다. 처음에 가장 성공한 것은 당연히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이다. 나중에 온 사람으로는 영국인, 프랑스인과 미국인이 있다. 처음에, 그들은 향료와 백은으로 중국의 상품을 바꾸어 간다. 중국의 비단과 자기는 그들이 흥미를 느끼는 주요제품이었다. 나중에는 차도 들어간다. 그들은 중국의 상품에 수요가 왕성했지만, 중국인들은 그들로부터 수입하는 상품 시계, 나이롱등 몇 가지 물건들 외에는 거의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아편전쟁후의 어느 정도 기간까지도 바뀌지 않는다. 상당한 장기간동안 중국인들은 그들의 한가지 물건에 흥미를 나타냈다. 그것은 백은(白銀)이었다. 백은만이 중국시장에서 인기리에 유통되었다. 이에 기하여 어떤 학자는 추산을 통하여, 명나라말기에서 19세기 상반기까지, 세계백은 생산량의 1/3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는 백은부족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정명한 유럽상인들은 중국인들의 아편에 대한 흥취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많은 지방에서 아편은 심지어 통화로 취급되었다. 이에 그들은 기뻐하게 된다. 그래서 세계역사상 저명한 삼각무역이 나타난다. 유렵의 상품을 인도등 국가로 수출하고, 그 후에 인도에서 아편을 구매한다; 인도의 아편은 중국에 매각하고, 중국에서 비단, 자기, 차를 구매하여 유럽으로 운송한다. 그 후에 중국에 수입 또는 밀수된 아편은 수량이 급증하고, 전통상품으로는 더 이상 아편대금을 지급하는데 부족했다. 할 수 없이 백은으로 지급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백은은 다시 역류되어 흘러나간다. 무역의 조직자와 수익자는 유럽인이 되고, 피해자는 중국인이 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이를 사악한 삼각무역이라 부르게 된다. 즉, 세계경제가 발전하는 체인에서, 중국은 박탈당하는 외곽지역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강제로 근대화과정에 끌려 들어갔는데, 그것은 중국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열차가 막 출발하자마자 중국은 내버려진다. 그리고 뒤에서 달려오는 열차에 깔려버린다.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외부적 요인은 비교적 잘 보인다. 이익추구하에 유럽인들은 대량으로 중국에 아편을 수출, 밀수한다. 그리하여 아편의 수량이 급증하고 가격이 하락한다. 아편흡입인구가 신속히 증가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분석하면, 이 모든 것은 중국인의 내재적인 수요에 기인한 것이다. 수요가 왕성하면, 공급이 아주 편리하다. 가격이 낮을 수록 더욱 큰 수요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하면 악순환이 일어난다. 아편은 17세기중엽 중국으로 전래된 후, 흡입인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19세기후기에 이르러, 비교적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개략 400만명이상의 중국인이 아편을 흡입했다(어떤 사람은 100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이제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때의 중국인들은 그렇게 아편에 빠졌던가? 이는 확실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간단한 생각을 약간 말해보고자 한다. 여러분에게 참고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첫째, 18세기이후, 중국인구가 신속히 증가한다. 생존압력이 가중되고, 자주 전란이 일어난다. 사람들의 안전감은 내려가고, 피세염세의 정서가 증가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소극적인 대도를 취한다. 아편을 흡입하는 것은 그중의 한가지 주요한 방식이다. 둘째, 정부의 무능과 부작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청왕조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없는 것이 없는" 강대제국이지만, 실제적인 통치능력은 아주 쇠약해져 있었다. 청나라군대를 놓고 보면, 대규모전투는 말할 것도 없고, 약간의 자잘한 밀수선단조차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때의 중국은 아직 해군이 없었다. 해군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중국인은 해양 및 해양이외의 지방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나라군대의 장비는 여전히 냉병기 위주이다. 근대화된 전술과 전략개념은 없었다. 이렇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런 군대가 어찌 나중에 중국을 침입한 장비가 선진적이고 훈련이 잘된 영국해군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즉, 청정부는 비록 주관적인 바램으로는 아편의 근원을 끊고 싶었지만, 객관적으로 그런 능력이 없었다. 셋째, 중국은 세속화된 국가이다. 사람의 행위는 주로 자아, 가정(가족)의 구속을 받는다. 이런 구속은 도덕적인 것이다. 청나라때 많은 사람들은 아편흡입을 그저 순수한 개인행위로 여겼다. 그것이 도덕에 위반되는지에 대하여는 사람들의 논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구속은 아주 느슨했다.
임칙서의 아편금지는 민의에 순응한 것으로 백성들이 좋아할 행동임에 틀림없다. 다만, 임칙서의 아편금지행동과 비교하자면 또 다른 일련의 관리들의 생각은 확실히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중국인의 아편전"을 주장한다. 즉, 중국인은 자신이 아편을 재배하고 생산함으로써 외국의 아편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일은 이 조치는 국외의 아편을 막아내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아편을 더욱 범람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연해에서 내지까지, 내지에서 변경까지; 그리고 도시에서 농촌까지, 아문에서 황궁까지, 그의 전백성이 아편을 흡입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아편의 광범위한 재배는 정부의 세수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일정한 정도로 아편수입을 억제한다. 그러나 이 조치는 더욱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한편으로 아편을 심는 곳이면 아편중독자가 늘어난다. 아편의 재배자는 왕왕 바로 아편흡입자가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원래 아주 고귀한 경작지에 앵속을 심은 후, 식량공급이 더욱 부족해진다. 여기에 재난과 사회혼란으로 사람들의 생활은 절망과 고통 속에 빠진다. 청정부도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 재배를 금지하면 세수가 감소하고, 수입과 밀수를 장려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재배를 허용하면, 아편금지령은 그저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그치게 된다. 결국, 정부는 그저 겉으로는 금지하면서 속으로는 허용하는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아편은 계속 범람한다. 국민당집권시기에도 이런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일본군의 중국침략기간동안 일본침략자들은 중국인이 아편을 재배하고 흡입하는 것을 계속 장려한다. 그들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중국인의 무장을 철저히 해제시키려 한 것이다. 신중국성립후, 인민정부는 결심을 내려, 일체의 강제수단을 동원해 아편재배와 흡입을 뿌리뽑는다. 1960년에 이르러, 거의 모든 중국대륙의 마편흡입자들은 성공적으로 아편을 끊게 된다. 아편이라는 마귀는 중국에서의 생명을 마침내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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