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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관료생존법칙: 이상은(李商隱)과 유중영(柳仲郢)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맹헌실(孟憲實)

 

관료생애에 항상 이런저런 써클(圈子)을 만나게 된다. 그때 당신은 그 써클에 가입할 것인가(줄서기) 아닌가를 선택해야 한다. 줄서기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써클의 파워가 큰지 작은지에 따르게 되나, 파워라는 것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줄서기의 결과는 불확정적이다. 일시적으로 잘나갈 수 있겠지만 그 후에는 평생 굴레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확정적인가? 그것은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는 것이다. 모든 써클에 대하여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정면으로 대하며,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하고, 이익을 위하여 의리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처세원칙을 지키면 당신이 수직발탁되지는 않겠지만, 당신이 "바람잘 날 없는" 관료사회에서 "바람을 맞지 않고(人初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당나라 중후기의 관료사회는 두 개의 경계가 분명한 써클이 존재했다 - 우당(牛黨), 이당(李黨). 이당은 이덕유(李德裕)를 우두머리로 하며 대다수가 명문거족출신이 권력귀족자제들이며 과거에서는 비교적 합격이 쉬운 명경과(明經科)나 부형의 관계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하였다. 다만 예법을 지키는 것을 중시했고, 가풍은 우량하고 문중도 엄격했다; 우당은 우승유(牛僧孺)를 우두머리로 하여, 많은 경우 중하층관료집안의 자제들이다. 지신의 틍력으로 과거에서 난이도가 높은 진사과를 통하여 관직에 나온 사람들이다. 일처리가 부화경박하며 방랑불기(放浪不羈)했다. 두 써클의 당쟁은 근 백년간 지속되었다. 역사에는 우이당쟁(牛李黨爭)이라 부른다.

 

이상은과 유중영은 바로 이 당쟁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유중영은 이상은보다 스무살가량이 많다. 두 사람은 출신이 같다. 모두 과거 진사과를 거쳤다; 인생도 서로 겹친다. 이상은은 일찌기 유중영의 부하고 거의 8년간 재직한 경력이 있다. 두 사람이 관료사회에 들어간 시기는 우리당쟁이 한참 심할 때였고, 이당이 잘나가고 우당은 조정에서 모두 쫓겨난 때였다. 우당이 권토중래하자 이당은 뿌리가지 뽑힌다. 조정의 우리당쟁의 대국면에 대하여 유중영, 이상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결과도 자연히 전혀 다른 두 가지 인생을 살게 된다.

 

이상은의 글은 유명하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써서 우당에 속하는 영호초(令狐楚)의 인정을 받는다. 영호초는 이상은을 막부로 불러들이고, 친히 그를 가르쳐 조정의 주장공문을 쓰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몇몇 아들과 함께 글을 읽고 배우게 한다. 개성2년, 이상은이 과거에 응시하고, 영호초의 아들 영호도(令狐綯)는 그해 과거의 주고관인 고개(高鎧)와 관계가 아주 좋아서, 그의 앞에서 이상은의 재주를 크게 칭찬한다. 영호집안의 도움하에, 이상은은 순보롭게 과거를 보고 신과에 급제한다.

 

진사가 된 후, 이상은은 먼저 비서성 교서랑이 되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홍농현위를 맡는다. 2년후 과거중 승진에 빠른 제거(制擧)에 참가하여 서판발췌과에 합격한다. 이번의 과거합격은 그가 영호초의 지도하에 닦은 공문주장의 초안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서판발췌과에서 중점적으로 시험보는 것은 과거응시자의 공문주장작성수준이기 때문이다.이렇게 하여 자신의 진사출신으로 보거나, 아니면 우당의 영호초부자가 베풀어준 은혜를 보거나 이상은은 우당에 속해야 했다. 우리당쟁때 그는 우당의 편에 서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당의 진영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여야 처세원칙에 맞는다. 다만 이때, 유혹이 생긴다.

 

당시 조정은 이당의 세력이 컸고, 우당은 잠시 약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덕유가 조정에서 보정을 하고 그와 관계가 깊은 왕무원(王茂元)을 하양절도사로 기용한다. 왕무원은 이상은에게 하양막부로 와줄 것을 청한다. 한쪽은 자신을 알아주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우당의 영호초 부자가 있고, 다른 한편은 현재 잘나가는 봉강대리 이당의 왕무원이다. 이상은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놓고 얼마나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종적으로 빨리 승진하고 싶었던 생각이 은혜를 갚는 처세원칙보다 앞서서, 그는 이당이 품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하양막부로 가서 장서기가 된다. 얼마후에는 시어사(侍御史)의 관직을 얻는다. 그리고 왕무원의 딸을 처로 취한다. 관료로서 그는 승승장구하였고, 애정에서도 성공했다. 이번에 우당을 버리고 이당에 들어감으로써 이상은은 사업과 애정에서 모두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상은은 이번에 줄을 잘 선 것이고, 써클에 잘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당을 버리고 이당에 들어간 선택은 우당에서 배은망덕으로 보았을 뿐아니라, 예법을 중시하는 이당의 사람들마저 멸시하게 되었다. 잠시 잘나갔지만, 이미 일생동안의 고난과 우당,이당에서 모두 받아들여주지 않는 진퇴유곡의 복선이 이미 깔려 버린 것이다.

 

이상은이 우당에서 이당으로 변신하며 잠시 잘나갔지만,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왕무원이 죽고, 이상은은 의탁할 곳이 없어져서 다시 장안으로 가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장안의 이당 원로는 배은망덕하며 이당으로 온 이상은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이상은이 장안에서 사방으로 노력했지만, 벽에 부닥치고 계속하여 마음에 드는 관직을 얻지 못한다. 그저 천리 멀리 떨어진 계주(桂州)로 가서 이당인 정아(鄭亞)의 막부에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었다. 선종 대중초년 우당이 득세하며, 영호도가 조정에 들어가 보정이 된다. 우당은 이당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정아는 순주자사로 좌천된다. 이상은도 따라가 추운 순주(循州)로 가게 된다. 몇년이 지나도 다른 곳으로 전보되지 않았다. 대중3년 장안에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관직을 얻지 못하여 경조윤 노홍정(盧弘正)에게 잠시 기탁한다.

 

대중4년, 영호도가 재상이 되고, 우당세력은 더욱 커진다. 이상은의 처지는 더욱 궁박해진다. 그는 다시 당을 바꾸어 처지를 개선해보고자 한다. 이번에 다시 이당을 나와 우당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는 여러번 영호도에게 자신을 용서해줄 것을 애걸하나, 영호도는 들은체만체 한다. 그는 할 수 없이 경성에서 나가 외지로 가는 노홍정을 따라 서주로 간다. 노홍정은 서주에서 막부를 해산하고, 이상은은 다시 갈 곳이 없어진다. 그는 다시 영호도에게 자신이 조정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영호도는 이번에 옛날의 정을 봐서 응락한다. 그러나 이상은이 우당을 배신하고 이당에 들어갔던 배반행위를 고려하여, 그에게 태학박사라는 허직(虛職)을 주었을 뿐이다.

 

태학학사는 뜻을 높게 세운 이상은이 만족할만한 관직이 아니었다. 이때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해주던 유중영이 건남 동천절도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상은은 유중영의 요청을 받아 동천막부에 들어간다. 동천에 있는 동안, 이상은은 역시 사방을 다니며 청탁하고,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조정에 다시 나가기를 바란다. 이번에 그는 눈길을 곧 조정에 들어가 보정이 되는 하동절도사 노균(盧鈞)에게 돌린다. 그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노균은 일찌기 영호도에게 배척당한 바 있고, 다시 우당의 영호도에게 돌아간 이상은을 더더욱 멸시했다. 그를 위하여 한 마디도 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이상은은 계속 동천에서 막부가 해산될 때까지 있는다. 나중에 정주 형양(滎梁)으로 옮겨가고,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

 

같은 당쟁환경 속에서 이상은처럼 한때는 우당, 한때는 이당으로 왔다갔다 하지 않고, 유중영은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는 처세원칙을 지킨다. 그리고 이를 일관되게 견지한다.

 

이상은과 마찬가지로, 진사급제후 유중영은 비서성의 교서랑이 된다. 얼마후 우당의 거물 우승유를 따라 강하(江夏)로 가서 임직한다. 우승유의 비호하에, 관료로서의 생애는 순탄했다. 하층에서 경력을 쌓은 후에 조정에 들어간다. 간의대부로 있을 때 '우당,이당'의 양당의 이익이 관여된 "오상옥(吳湘獄)"사건을 처리하는데, 공정무사하고 불편부당하게 그 사건을 처리한다. 그리하여 이덕유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비록 최종처리결과는 우당에 유리했지만, 이덕유는 '이를 탓하지 않는다', '그가 대공무사하다는 것을 알아서, 그를 중시한다.'. 그후 유중영을 고위직인 경조윤에 추천한다. 임명장을 받은 후 유중영은 이덕유의 집으로 감사인사를 간다. 그리고 이후 우승유의 은혜를 보답한 것처럼 이덕유가 이끌어준 정에 보답하겠다고 말한다.

 

이덕유의 인정을 받았지만, 유중영은 구체적인 업무처리에서는 여전히 사건 자체의 시비곡직을 따져서 처리한다. 간단하게 이덕유의 의견대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유중영은 이부에서 관리선발을 주관하는 전선(銓選)업무를 하면서, 이덕유의 압력을 받은 바 있다. 이덕유는 관료집안출신으로, 과거에 참가한 적이 없다. 그래서 관리선발시 진사출신관리들이 많이 압박을 받았다. 유중영은 이덕유의 압력을 버텨내면서 공정무사하게 진사출신의 관리들을 공평하게 임용했다.

 

나중에 유중영은 내정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세력의 미움을 사서 경사에서 쫓겨나, 정주자사로 좌천된다. 그가 시종 우리양당간에 평형을 유지하였고, 양당에 불편부당했고 모두 교분이 있었으며, 일처리에서 당파적인 편견으로 하지 않고, 공정하게 사건의 본질에 따라 처리했으므로 양당에서 모두 일정한 정도의 양해와 존중을 받았다. 정주자사로 좌천된 후, 유중영의 관료생애는 내리막길을 걸은게 아니라 전후로 하남윤, 재주자사(梓州刺史), 검남동천절도사, 흥원윤, 산남서도저도사, 괵주자사(虢州刺史)등 봉강대리와 이부시랑, 병부시랑, 제도염철전운사, 형부상서, 검교상서좌복야등 중앙의 요직을 지낸다.

 

우리양당이 서로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 환경하에서, 유중영은 자신의 있는 힘을 다하여 양당의 갈등을 조화하고 완화하고자 애썼다. 선종 대중연간에 우당이 전면적으로 득세하고, 영호도가 재상이 되어 보정한다. 이덕유는 해남 애주로 유배가서 죽는다. 이씨의 자손은 연좌되어 조당에 들어온 자가 없었다. 유중영은 당시 제도염철전운사로 있었는데, 우당의 압력을 물리치고 대담하게 이덕유의 조카 이종질(李從質)을 추관(推官)으로 기용한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소주쪽의 염철전운업무를 책임지게 한다. 그 봉록으로 이씨자손들이 생활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영호도는 이에 대하여 크게 불만이었다. 유중영은 특별히 영호도에게 서신을 보내어 해명한다. "임안이 나가지 않은 것을 보고 항상 옛사람만 못하다고 스스로 부끄러워했는데, 오영이 자살한 일이 굳이 오늘날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서한때 임안은 위청의 지위가 하락하고, 곽거병이 중천에 뜬 해처럼 잘나갈 때 위청을 배신하고 떠나지 않은 것과 동한때의 오영이 마현, 방참이라는 그에게 은혜를 베푼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국면이 벌어지자 마지막에 어쩔 수 없어 자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내어, 자신의 심경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완곡하게 우당이 이당을 너무 지나치게 탄압하는데 대한 불만도 드러낸다, "이태위(이덕유)가 죄를 받은지 오래되었고, 그의 집안은 완전히 망했으며 먹는 것조차 힘듭니다. 실로 가슴아프고 측은한 일입니다." 그는 우당에서 이당을 뿌리채 뽑지는 말아줄 것을 바랬다. 그리고 적절한 선에서 멈춤으로서 대국을 중시여겨줄 것을 요청한다. 영호도는 그의 서신을 읽고는 마음을 놓는다. 유중영의 행위에 대하여 이해한다고표시하고 이종질을 정원관(正員官)으로 승진시킨다.

 

유중영의 일생을 보면, 스스로의 실력으로 과거 진사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우당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성을 지켜서 이당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다; 양당의 이익이 관련된 중요사건을 처리할 때 그는 어느 한 편을 들지 않고 불편부당하게 처리한다. 사건의 본질만 보았지,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일찌기 자신을 이끌어준 은인에 대하여 그는 은혜는 보답하는 처세원칙을 지킨다. 차라리 거대한 압력을 받고 견딜지언정 이덕유의 조카를 돌봐준다. 그의 처세의 도리는 불편부당하고 공정하게 평형과 냉정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은혜라도 입으면 반드시 크게 보답하는 인정미가 농후하다. 그래서 관료사회에서 부침이 있지만, 결국은 큰 화를 입지 않게 되었다. 비록 좌천은 당해도, 금방 재기했고, 시종 무너지지 않았다. 봉강대리와 중앙요직을 모두 거친다. 우이당쟁의 배경하에서, 개인의 인격을 지키고 양당 모두로부터 양해를 받아 관직에서 잘 나갈 수있었다.

 

이상은을 보면, 재능은 유중영보다 휠씬 뛰어났지만, 인품에서 천양지차가 있었다. 성에 펄럭이는 대왕기를 지시로 삼아 어느 파가 득세하면 그 파로 기울었다. 돌연 우당을 나와 이당에 들어가는가 하면, 다시 이당을 나와 우당을 배신한다. 매번 줄을 설 때마다 본 것은 이익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투기에서 이미 처세의 기본원칙과 품격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손해를 본다. 관리가 되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상사도 반복무상하고 눈치만 보는 자를 중용하지 않는다. 여러번 기회주의적으로 줄을 서는 바람에 우당에서는 배은망덕한 자로 낙인찍히고, 이당에서도 인품이 비열한 자로 낙인찍힌다. 그는 이익을 위하여 의리를 저버리는 인물인 것이다. 결국은 양당 모두에게서 배척받는다. 진퇴유곡이 되어 일생동안 힘들게 살아간다. 비록 재주는 뛰어났지만, 인품은 없었다. 그래서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줄을 설 것인가 먼저 사람이 될 것인가. 이는 관료사회에서 계속 부닥치는 과제이다. 이는 관료로서의 선택이면서, 인생의 선택이다. 써클간에 싸우고 있을 때, 줄을 서는 것을 선택하더라도 스스로의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상은과 유중영은 모두 당나라때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당나라에 특유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