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깡패연구의 3개 역사시기

by 중은우시 2015. 3. 26.

글: 주대가(朱大可)

 

중국깡패연구의 역사는 아주 짧다. 그것은 신문화운동에 기원하여, 20세기말에 끝난다. 바로 한 세기의 세월이다. 발전의 정도를 보면, 대체로 시초기, 독점기 및 각기기(覺起期)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시초기(1900-1949)

 

황원생(黃遠生)은 민국원년의 <소년중국주간>에 <유민정치(遊民政治)>라는 글을 발표하여, 앞장서서 중국의 "수천년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바로 "유민의 정치일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글은 국가주의의 입장에서 유민의 역사를 연구분석하여 중국사회의 모든 병폐는 유민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심지어 고대폭군,탐관부터 당대의 '신당'(20세기초의 정치개혁가와 혁명가를 말함)도 모두 깡패주의의 변종이라고 하였다. 국가와 사회의 폐해는 모조리 깡패주의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이 입장은 '유민'에 대한 국가주의편견을 나타냈지만, 그것은 유민을 중국역사를 만든 주체로 보았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협의의 깡패학 탄생을 나타내는 분노의 앞선 목소리였다.

 

몇년이후 즉 1919년, 두아천(杜亞泉)은 <동방잡지> 16권 제4호에 <중국정치혁명의 불성취 및 사회혁명의 불발생의 원인>이라는 글에서 유민현상을 더 나아가 설명한다. 중국사회의 "과잉노동계급'은 바로 '유민계급'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과잉지식계급'과 연합하여, '귀족계급세력'과 대항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회의 '교체성쇠'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두아천은 이에 기하여 중국역사변천의 근원을 철두철미하게 드러내보여준다: "귀족문화가 전성기에 달하면, 사회는 침쳬하고 부패하고, 유민문화가 이를 대체하기 시작하며, 유민문화가 전성기에 달하면, 시회소란으로 문란해지고, 그러면 귀족문화가 대체하기 시작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순환의 궤적이다." 두아천의 문장은 날카롭게 중국현대사회변혁의 폐병을 통찰한 것이다; 중국현대개혁은 귀족, 유민이라는 두 계급의 자아순환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의 전도를 망친 것이다. 두아천은 이렇게 지적했다. 중국혁명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이 아니고, 그저 일종의 '제왕혁명'일 뿐이다. 이런 놀라운 예언을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분히 확인되었다.

 

두아천의 글은 또한 유민문화의 특징을 지적한다: 유협을 숭상하고(尙遊俠), 호방한 사람을 좋아하고(喜豪放), 구속을 받지 않으며(不受拘束), 생계를 돌보지 않고(不治生計), 관리를 미워하고((嫉惡官吏), 부자를 적대시한다(仇視富豪)는 등등. 이는 바로 중국고대 깡패주의의 정신적 특징이다. 다만 두아천의 글은 황원생의 글과 마찬가지로, 깡패계급을 부정적인 도덕이미지로 하여 공격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이를 통하여 대록체계의 협의의 깡패학연구에서 비판적인 기조를 닦게 된다.

 

그외에 노신이 1930년에 한 깡패에 대한 논술도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협(俠)'자가 점점 사라지고, 강도가 일어난다. 다만 역시 '협'의 류이다. 그들의 기치는 '체천행도(替天行道)'이다.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간신이지, 천자가 아니다. 그들이 강탈하는 것은 평민이지 장상(將相)이 아니다. 이규가 법장(法場)을 강탈할 때, 도끼를 들고 베어갔지만, 벤 것은 구경꾼들이다. <수호전>에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천자에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대군이 몰려오면 초안(招安)을 받아들인다. 국가를 대신해서 다른 강도, '체천행도'를 하지 않는 강도를 치러 가는 것이다. 결국은 노재(奴才)가 된다."

 

노신은 다음 해 상해동아동문서원에서 진행된 <깡패와 문학> 강연에서, 깡패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깡패는 무뢰한 더하기 장사(壯士) 더하기 '삼백대언(三百代言)'(일본어로 무자격 소송꾼, 궤변꾼)이다" 노신은 중국깡패의 기원을 탐색한다. "깡패가 형성된 것은 개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자의 무리로, 유(儒)이고, 다른 하나는 묵자의 무리로 협(俠)이다." 노신은 유학과 묵학을 깡패주의의 기원으로 삼았으며, 처음으로 깡패주의와 지식분자(사대부)의 기원학에서의 친연(親緣)관계를 밝혔다.

 

상해와 조계에 있으면서 도필지전(刀筆之戰)에 빠진 말년의 노신은 다른 경우에도 '깡패'라는 말을 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상해문예의 일별 - 팔월 십이일 사회과학연구회에서의 강연>(<이십집>에 수록됨))이라는 글에서 섭령풍(葉靈風), 원앙호접파 작가와 창조사의 곽말약등을 "깡패+재자"라고 격렬하게 공격한다. 다만 상술한 논증외에, 그 뜻은 대부분 불확정적이고 왔다갔다 했다. "깡패"는 노신이 적수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무기로 썼기 때문에, 노신의 "깡패"설은 개인적인 기분을 드러낸 것이어서 학술사상으로 깡패학의 연구범위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독점기(1950-1980)

 

1949년 북경에 신중국을 설립한 후,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계급이론이 주류를 이루고, 나머지 학파는 벙어리가 된 것처럼 침묵했다. 황원생과 두아천의 연구는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반대로 그들의 목소리는 그저 빈 골짜기에 메아리없이 울렸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엄격한 탄압과 관제로 깡패는 중국사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일찌기 50년대초, 청방의 깡패두목 황금영이 상해시 인민정부에 "인죄서(認罪書)"를 제출하면서, 상해를 중심으로 한 남방도시의 깡패집단과 향촌토비세력(예를 들어, "삼합회"와 "포가(袍哥)")은 신속히 소멸되고, 깡패는 호적과 새로 분배된 토지로 고착화된다. 국가주의는 보기 드문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이처럼 깡패가 퇴출됨으로써 또 다른 측면에서 막 시작된 지식계의 깡패학연구가 종결되고 근 30여년간의 공백상태를 드러낸다.

 

비록 지식계에서 깡패는 조용해졌지만, 국가주의의 깡패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계속 하층당원과 민중에 대하여 권위적인 지도를 계속 진행했다. 마르크스는 일찌기 <공산당선언>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깡패무산계급은 구사회 최하층의 가장 소극적인 부패화된 부분이다. 그들은 어떤 때는 무산계급혁명으로 일어났다. 다만 그들의 전체적인 생활상황으로, 그들은 기꺼이 매수되고, 반동의 역할을 한다." 마르크스는 또한 지적했다. 중세기 깡패는 용맹하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고, 나태하고 게으른 점이 있었다. <대영백과사전>은 이를 근거로, '깡패무산계급'이라는 항목과 해석을 두었다.

 

마르크스의 깡패에 대한 정의는 20세기공산주의운동과 깡패의 관계의 이론적기초가 된다. 다만 초기의 모택동은 여전히 후자에 대한 깊은 호감을 나타냈다. 모택동은 1926년 3월에 쓴 <중국사회각계층의 분석>이라는 글의 말미에 "깡패무산자"라는 말을 넣었다. 그들은 "인류생활에서 가장 불안정한 자"라고 하며 그들이 "각지에서 모두 비밀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복건,광동의 '삼합회', 호남,호북,귀주,사천의 '가로회', 안휘,하남,산동등의 '대도회(大刀會)', 하북및동북삼성의 '재리회(在理會)', 상해등지의 '청방(靑幇)'은 모두 그들의 정치와 경제투쟁의 상호부조단체였다. 이들을 처치하는 것은 중국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의 하나였다. 이들은 용감하고 잘 싸우지만, 파괴성이 있다. 잘만 이끈다면, 혁명역량이 될 수 있다."

 

다만 모택동의 깡패에 대한 호감은 신정권의 건립과 더불어 사라진다. 1967년에 춮판된 <모택동선집> 제1권에는 위의 글을 수록함과 동시에 상세한 '학술'적 주석을 달아 놓아서, 전면적으로 국가의 깡패방회에 대한 해석을 시정한다. 거기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농민과 수공업자는 이런 낙후된 조직에서 출로를 찾을 수없었다. 이런 낙후된 조직은 왕왕 지주, 호족세력에 조종되거나 이용되기 쉬웠고, 게다가 그들은 맹목적인 파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반동역량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었다."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주석에는 아주 인내심을 가지고 '1927년 장개석이 반혁명정변을 거행할 때, 일찌기 이런 낙후된 조직을 이용하여 노동인민의 단결을 파괴하고 혁명을 파괴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점을 설명했다." 이 주석에서 얻어낼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은 이러하다: "근대공업무산계급의 역량이 성대하고 흥기하면, 농민은 노동자계급의 영도하에 점진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조직을 만들게 된다. 이런 류의 원시적이고 낙후된 조직은 그들의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의문의 여지없이, 새로운 '주석'은 모택동본인보다 더욱 명확하게 북경정부의 깡패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각기기(1980-2002)

 

80년대이래의 포스트모택동시대는 집권주의가 점차 해체되면서, 인구의 심각한 과잉으로 대규모의 토지위기가 나타난다. 도시경제개혁으로 인하여 새로운 일자리가 대량 나타나고, 이로 인하여 깡패현상이 권토중래하고, 또한 훨씬 더 심해졌다. 광의의 깡패사회는 다시 부활하고, 전면적인 부흥의 길을 걷는다. 이런 격렬한 사회변화는 깡패학의 소생을 불러온다. 80년대후반부터 본문을 쓸 때까지, 개략 수십종의 관련저작이 중국대륙, 홍콩과 대만지구에서 출판되거나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이렇게 하여 깡패학연구의 첫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중 정식출판된 것으로는 진보량의 <중국깡패사>, 왕학태의 <깡패문화와 중국사회>, 공붕정의 <유(遊)의 정신문화사론>(대만)이 대표적이다. 인터넷의 글은 왕의의 <명나라때 깡패문화의 악성팽창과 전제정체의 관계 및 국민심리에 대한 영향>과 임불매의 <재변론>을 대표로 한다. 모든 이런 저작은 깡패학연구를 크게 심화시켰고, 새롭게 인식의 고도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