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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고대 창기업(娼妓業)의 역사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양혜(楊慧)

 

 


매춘이 합법화되었던 시기에도 '창기업'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제한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번 통치자가 주도하는 단속활동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매 왕조는 거의 모두 "핍량위창(逼良爲娼)"을 금지한다. 진입단계에서 문턱을 통제하는 것이다. 명나라때의 법률을 보면, "무릇 창우악인(娼優樂人)은 양가집 자녀를 사서 창우(娼優)를 하게 하는 경우는 곤장 일백대에 처한다."  명선종은 중국에서 제1차 대규모단속활동을 벌였고, 태평천국시기에는 법령이 가혹하여 거의 창기가 멸적되기까지 한다.


기원전645년, 제환공의 동의를 받아, 관중은 중국 최초의 관청에서 운영하는 기원을 만든다. 이름은 "여려(女閭)"였다. 진,한이후에 점차 "악호제도(樂戶制度), "관기제도(官妓制度)"가 형성되고, 이에 수반하여 청루문화(靑樓文化)가 나타난다. 당나라때는 기녀의 지위가 가장 높았던 때이다. 역사상 유명한 설도(薛濤)는 바로 당시 검남서천절도사 위고(韋皋)로부터 인정을 받아, 그녀는 원래 막료들이 하는 안독(案牘, 공문서)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기실 이는 현재로 보면 공무원이 하는 일이다. 위고는 거의 조정에보고하여 정식으로 문건을 하달하여 설도를 정실로 만들려고까지 하였다. 당나라이후, 기녀의 지위는 하락하기 시작한다.


양송때 기원(妓院)은 여전히 합법적이었다. 유영(柳永)은 심화문류(尋花問柳)로 유명한 사인(詞人)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점때문에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한다. 이를 보면 송나라때는 기녀를 대하는 태도가 이미 내려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정에서는 명확히 규정한다. 관리는 관기(官妓)와 술을 같이 마시고, 춤을 같이 출 수는 있지만, 잠을 같이 잘 수는 없다고. 만일 위반하면 가벼울 때는 곤장 몇십대이고, 중하면 관직을 삭탈하여 서민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금으로 먹고 마시고, 다시 술과 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자를 찾는 것은 더더욱 절대 금지되어 있었다. <명공서판청명집>에 이런 판례가 있다. 남송때 숭안지현은 '매일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새벽까지 그러했고,기녀들을 불러서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결국 현주부로 강등된다. 공금을 쓰는 것이 아닌 경우에도 관리가 기녀들이 나오는 사적 연회에 참석하면 역시 처분을 받았다: "여러 주의 상평관이 현,진에 속한 관기,악녀 및 가기(家妓)와 연회를 여는 것은 사법처리한다. 공금을 쓰지 않고 술과 음식을 먹은 자는 곤장 80대이고, 감할 수 없다."


송나라때 관리들이 기녀를 데리고 노는 것이 금지된다. 송인종이 황제일 때 이렇게 규정한다. 형옥을 관장하는 관리인 제점형옥은 기녀를 데리고 놀아서는 안된다. 당시의 용어로는 "부득부기악(不得赴妓樂)"이다. 4,5십년후, 송신종이 황제일 때는 전체 감사(監司)로 범위를 넓힌다. 제점형옥뿐만이 아니라, 모든 감찰관리는 기녀들과 놀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만 예외는 있었다. 1년 365일중에서 하루는 풀어주었는데 바로 송신종의 생일 즉 "성절(聖節)"이다. 당시 사람이 쓴 싯구에 이런 말이 나온다: "공군금야불수수(共君今夜不須睡), 미도효종유시춘(未到曉鍾猶是春)"이 바로 성절의 밤의 광경이다.


명나라초기에서 중엽까지 창기업은 더욱 발달한다. 많은 고관대작은 조정국사는 신경쓰지 않고 가무승평(歌舞昇平). 등홍주록(燈紅酒綠)에 탐닉한다. 명사와 현인들이 기녀를 끼고 놀며 즐겼다. 나중에는 기녀를 연구,평가하는 <표경(嫖經)>까지 나와서 당시 기녀들을 데리고 노는 가이드북 역할을 한다. 당시에 기녀는 온천하에 깔려 있었고, 대부분은 수천을 헤아렸다. 시골구석에도 기녀는 있었다.


명나라 선덕4년, 즉 1429년 가을, 30살된 주첨기는 더 이상 참지 못한다. 명선종 주첨기는 명인종이 장남으로 건문원년(1399년)에 태어났고, 그는 문무에 능한 명군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국가의 기강은 느슨해져서, 관리들은 날로 부패하고 음일해졌다. 하루종일 지취금미(紙醉金迷)하며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 주첨기가 등극한지 4년이 되는 해, 주첨기는 마침내 만조의 문무백관들의 생활기풍이 날로 타락하는 것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전국에서 관기를 없애고, 법과 기율을 엄정히 하여, 제국의 관리들이 부패황음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하기로 결정한다. 


주첨기가 발동한 이 조치는 중국에서의 제1차 기녀단속활동이다. 그는 북경과 기타 대도시의 기원을 대거 폐쇄하고, 원래의 관기제도를 폐지하며, 관리의 휴기숙창(携妓宿娼)을 금지한다. 다만 민간의 창기업에 대하여는 제한하지 않는다. 당시 주첨기가 단속한 주목적은 제국이 전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관리가 표창(嫖娼)을 하지 않으면, '부모관'으로서 이미지가 긍정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단독은 그저 관리들에게 약간의 겁을 주는 작용이 있을 뿐이었다.


그의 조치가 과단성있는 것은 맞다. 대명의 양경(兩京, 북경과 남경), 13개성에서 수십년간 경영하던 관영기원은 모조리 없어진다. 어사는 관리의 품행과 덕성을 엄격히 규찰한다. 그래도 영을 어기고 압기숙창(狎妓宿娼)한 자는 파직되고 영구히 관직에 나올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선비들이 기녀와 노는 것도 처벌을 받았다. 심지어 과거시험에서 선발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개국과 더불어 양경에서 번성하던 국영기원에 있어서 이 금지령은 치명적이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에 화려하던 기원들은 거의 철거되고, 원래 기원이 있던 자리는 황폐하게 된다.


다만, 문무백관에 있어서 긴장된 분위기는 잠시였을 뿐이다. 비록 관기를 단속하여, 관리들이 드러내놓고 기원을 출입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집안에는 여전히 여악가기(女樂家妓)를 두고 있었다. 이는 조사해도 조사해낼 수 없고, 금지해도 금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선덕10년(1435년), 38세의 명선종이 붕어한다. 명선종때 잠시 정풍이 이루어졌지만, 명나라의 상하백관들의 억눌려져 있던 주색의 욕망은 신속히 분출되어 전체 사회는 '음풍대치(淫風大熾)'하게 된다.


청나라때의 금창(禁娼)은 진정한 '법률금창'이라고 할 수 있다. 조정의 단속기세도 아주 컸다. 그래서 한때 큰 효과를 거둔다. 당시 전국의 저명한 '홍등도시'인 양주(揚州)를 예로 들면, 당시의 성산업종사자들은 크게 긴장한다. 양주는 수,당이래로 성산업이 아주 발달하였다. 조정의 단속에도 창기는 없어지지 않고, "사과자(私窠子)", "반월문(半月門)", "양빈(揚濱)", "선낭(船娘)"등의 암창(暗娼), 사창(私娼)이 계속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성산업종사자들은 단속정보에 아주 영통하여, 일단 기미만 보이면 그녀들은 '집단소실'된다. 청나라초기 문인 오기(吳綺)는 <양주고취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단 금지령을 만나면, 생사를 걸고 도망친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청나라초기는 명나라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경성에 교방사(敎坊司)를 두었다. 다만 순치제는 두번에 걸쳐 교방의 여악을 줄였다. 궁중에서 활동할 때, 48명의 태감을 훈련시켜 악기(樂妓)를 대신하게 했다. 순치제는 처음에 여악을 쓴 후에, 48명의 태감으로 하여금 악기가녀를 대신하게 했다. 순치8년(1651년) 조정은 명을 내려 교방여악을 금지시키고, 금창(禁娼)을 개시한다. 위로부터 아래로 청나라의 '금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순치16년(1659년)에는 직접적으로 여악을 없앤다.


강희제는 순치의 금창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12년(1673년) 다시 한번 금창령을 내린다. 19년(1680년)에 반포한 법률에는 명확히 규정한다: "매춘굴을 열어서 부인자녀를 약취유인하는 자는 흑룡강성으로 유배를 보내어 갑인의 노비로 삼는다." 강희연간에 청나라조정은 경성내에서 앙가(秧歌)를 부르는 것도 금지하여, 앙가를 부르는 예인은 경성에 머물수 없게 한다. 또한 매음사염곡을 금지하고, 양가자제가 공연하는 것도 금지한다. 강희48년, 각지관리에게 칙령을 내려 지방에서 '수천수백이 무리를 이루어 남녀가 섞여 있는" 집단오락활동을 금지한다. 음사소설의 출판은 엄격히 금지한다. 그리고, 북경성내에 희관(戱館)을 여는 것도 금지한다. 역시 강희연간에 반포된 것이다.


옹정제는 전국에서 악적제도(樂籍制度)를 폐지한다. 국가는 더 이상 정식으로 기녀를 양성하지 않는다. 관리들이 기녀와 노는 것은 명문법령으로 금지된다. 가경제는 더 나아가 매음표창에 대한 처벌강도를 강화한다. 가경16년(1811년)에 수정된 <대청률>에는 "경성내외에서 매음굴을 열고 시간이 오래된 경우 본법에 따라 치죄하는 외에, 건물을 임대해준 집주인도 초범이면 곤장80대, 유기징역1개월....에 처한다"


태평천국의 천왕, 대왕들은 풍속이 음란해져서 태평군의 투지와 호기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매춘단속을 강화한다. 천왕 홍수전은 자주 군인들에게 말했다: "천하에 많은 남자는 모두 형제뻘이고, 천하의 많은 여자들은 모두 자매뻘이다. 천당의 자녀이고, 남자는 남행, 여자는 여행에 있으면서 서로 섞여서는 안된다."


태평군은 당초에 거의 일가족이 참가했기 때문에, 전사들은 모친, 처, 자매 및 딸과 같이 군중에 있었다. 그래서 서로 항상 만나게 되었다. 1853년 태평천국이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홍수전은 이로 인하여 혼란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남녀를 엄격히 나누고, 남녀노소를 모두 각각 남관, 여관에 편입시켜 군사화편제와 관리를 하게 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성내의 남녀를 각각 별도의 관에 들어가게 하고 사사로이 집에 남길 수 없게 하였다....이 규정을 어겨서....발각되면 즉시 엄히 붙잡아 사람들 앞에서 목을 베고, 절대로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무릇 부녀를 강간하고 억울하다고 하는 자는 즉시 사람들 앞에서 목을 베고, 부녀는 석방한다. 만일 화간(和奸)이면 같은 죄로 보아 남녀를 모두 참한다."


매음표창은 발견되면 바로 목이 베인다. 이는 고대 중국의 금창역사상 가장 지독한 수단으로 아주 효과가 있었다. 당시 충왕 이수성의 신임을 받던 한 영국인이 귀국후에 쓴 <태평천국혁명친력기>에 따르면, 이렇게 말한다: "태평군의 정권범위내에서 '창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滅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