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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노신(魯迅)과 곽말약(郭沫若)의 문투(文鬪)

by 중은우시 2015. 2. 25.

글: 역도선(易道禪)

 

 

 

 

노신과 곽말약은 문단의 두 숙적이다. 일생동안 만나지 않았지만 서로 계속 싸웠다. 필자는 이 두 사람의 전집이 있다. 기본적으로 진지하게 읽어보았다. 나는 노신과 곽말약 두 사람의 문단에서 싸우는 방법이 아주 재미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노신의 소설 및 산문분야의 재능은 곽말약이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곽말약의 시가와 희극분야의 재능은 노신이 발끝도 따라갈 수 없었다. 노신의 소설집 <눌함(吶喊)>과 <방황(彷徨)>은 현대소설의 선구이다. 오늘날 이런저런 결함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쨌든 신문화 계몽문학의 개산지작이다. 노신의 산문집 <야초(野草)>와 <조화석습(朝花夕拾)>은 현대미문의 전범이고 지금까지 거의 모든 문화인의 산문은 그에 비견할만큼 아름답게 쓰지 못했다. 곽말약의 시집 <여신(女神)>과 <성공(星空)>은 현대시가의 최초의 가장 성숙한 경전적인 작품이다. 곽말약이 만년에 추악하기 그지없는 구호시를 얼마나 많이 썼든지 간에, 그의 초기시집의 문학적 의의는 절대로 말살될 수 없다. 곽말약의 희극 <삼개반역지여성>은 춘추전국의 4대비극과 현대희극의 걸작이다. 나중에 시극과 비극의 미학성분을 지닌 희극작품은 거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확실히 노신의 후기는 안타깝고 탄식할 만하다. 곽말약의 후기는 더더욱 비애이고 가소롭다. 그러나 이는 중국문화특색이 조성한 결과이다. 노신은 좌(左)의 희생품이다. 잡문은 거의 남을 욕하는 글이다. 곽말약은 더더욱 좌(左)의 포회(砲灰)이다. 시가는 전제문화의 초혼번(招魂幡)이 되었다. 당연히 오늘날 이 두 사람의 득실을 얘기하면서 만일 이데올로기방면의 악의적인 선입견을 버린다면, 두 사람의 초기신문화운동에서 한 공헌은 당연히 나누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할 것이다.

 

다만, 노신과 곽말약 두 사람의 초기 문학창작에서 서로 상대방에 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일련의 악투가 벌어진다.

 

노신은 노자에 관한 <출관(出關)>이라는 단편소설을 쓴다. 곽말약도 노자에 관한 <주하사입관(柱下史入關)>이라는 단편소설을 쓴다. 노신과 거꾸로 간 것이다. 네가 '출관'을 쓰면 나는 '입관'을 쓰겠다. 노신이 장자에 관한 <기사(起死)>를 쓰자, 곽말약도 장자에 관한 <칠원리유량(漆園吏遊梁)>을 쓴다. 네가 장자가 인생을 희롱한 것을 쓴다면, 나는 장자가 권력을 희롱한 것을 쓰겠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곽말약이 먼저 쓰고, 노신이 그에 반대되게 썼다고 한다. 저작연표를 고증해보면 모두 선후로 따라가며 싸운 사례가 있다.

 

곽말약이 여와창세기의 <여신의 재생>을 쓰자, 노신도 여와가 인류를 창조한 <보천(補天)>을 쓴다. 곽말약이 역사소설집 <시제(豕蹄)>를 써서 8개의 단편을 수록하자, 노신도 역사소설집 <고사신편(故事新編)>을 출판하는데, 역시 8편의 단편을 수록했다.

 

다시, 노신이 신문화운동에 대한 "일별(一瞥>"를 쓰자, 곽말약도 신문화운동의 "십년"을 쓴다. 노신이 곽말약을 "재자가유맹(才子加流氓, 재자에 깡패)"이라고 욕하자, 곽말약은 노신을 "소추가봉건여얼(小醜加封建餘孼, 어릿광대에 봉건잔재)>이라고 욕한다. 노신이 "항일민족전쟁문학"이라는 구호가 좋다고 말하자, 곽말약은 "국방문학"이라는 구호가 좋다고 말한다.

 

다시 예를 들어, 조식이 쓴 소위 <칠보시(七步詩)>에 대하여 노신은 <반칠보시(反七步詩)>를 쓴 바 있다. 제목은 <체두기신원(替豆萁申寃)>이다: "자두연두기(煮豆燃豆萁), 기재부하읍(萁在釜下泣), 아신이숙료(我燼你熟了), 정호판교석(正好辦敎席)". 곽말약도 <반칠보시>를 쓴다: "자두연두기(煮豆燃豆萁), 두숙기성회(豆熟萁成灰), 숙자석상진(熟者席上珍), 회작전중비(灰作田中肥), 불위동근생(不爲同根生), 연하감자훼(緣何甘自毁)" 당연히 이 두 수는 선후의 쓴 시기가 다르다. 그리고 모두 두기(콩깍지)의 억둘함을 토로하는 것이다. 노신과 곽말약의 이런 문투는 오히려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게 된다.

 

노신은 고문화에 대한 기본기가 아주 좋았다. 고증업무도 아주 잘했다. <한문학사강요>와 <중국소설사략>은 학술방면의 대표작이다. 그래서 곽말약도 학술상으로 성과를 내야만 속이 시원할 것이었다. 과연 한동안 열심히 써서 <중국고대사회연구>와 <십비판서>를 써낸다. 노신은 위진의 고적과 당송의 전기를 연구하였다면, 곽말약은 갑골문과 금문(金文)을 연구했다. 모두 비범하고 탁월한 성취를 거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저작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표절혐의가 있다는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모두 학술계에서 해명이 된다.

 

곽말약의 외국어 기초도 아주 좋았다. 영어, 독일어, 일어, 러시아어등의 언어에 능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명저를 번역한다. 괴테의 시극 <파우스트>, 장편소설 <빌헬름 마이스터>, 중편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쉴러의 희극, 바이른 셀리의 시, 푸시킨 타고르의 시, 니체의 철학저작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 투르게네프의 <처녀지>, 일본의 단편소설집, 그리고여러 과학거작 예를 들어 <생명의 과학>, <미술고고발견사>등등이 있다. 노신도 일어, 영어, 러시아어가 다 괜찮았다. 그래서 서둘러 번역분야에서 성취를 내놓는다. 고골의 <죽은 혼>, 파데예프의 장편소설 <궤멸>, 쿠리야가와 하쿠손의 문예논문집 <고민의 상징>, <에로센코동화집>, <근대미술사조론>, 줄베른의 공상과학소설 <달나라탐험>, <지구속여행> 그리고 러시아시가와 일본현대소설집 등등이 있다. 곽말약의 번역은 비교적 자유로웠고, 어떤 때는 거의 자신이 재창작한 것같았다. 그러나 노신의 번역은 비교적 생경하여 직역 혹은 경역(硬譯)이라 불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번역계에 좋은 모범을 보였다. 즉 번역을 중시하게 되었고, 외국문학의 도입과 외국사조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것도 신문화운동이 가져온 또 다른 성과라 할 것이다.

 

다리, 곽말약은 초기에 모친이 정해준 결혼으로 원부인 장경화와 결혼한다. 그 후 봉건혼인에 불만을 품고, 일본에서 안나와 결혼한다. 나중에 항전으로 처자식을 버리고귀국하여 다시 젊은 배우 우립군과 결합한다. 노신도 일찌기 모친이 정해준 결혼을 하여 원부인 주안과 결혼하다. 그후 혼인이 불행하여, 곽말약과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찾는다. 그래서 학생 허광평과 결혼한다.

 

사생활 방면에서도 두 사람은 이렇게 양보가 없었다. 그러니 글에서는 어떠했겠는가. 두 사람의 다툼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 두사람의 격렬한 경쟁은 중국현대문학사에 회심의 미소를 지을 이야기거리를 남겼다. 비록 나중에 노신은 자신이 원래 시를 쓰고 싶었는데, 곽말약의 시풍이 풍미하여 자신은 그저 금분세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곽말약의 고고연구는 탄복할만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곽말약도 노신을 공경한다. "공자이전에 공자없고 공자이후에 공자없듯이, 노신이전에 노신없고, 노신이후에 노신없다"는 말까지 한다. 이 두사람은 생전에는 원수처럼 지냈지만, 노신의 사후에 곽말약의 태도는 완전히 바뀐다. 당연히 건국후 곽말약의 문학생명도 죽는다. 학술생명은 아직 남아 있어씨만, 그것도 장애인으로서였다.

 

지금, 노신, 곽말약과 같이 창작도 하고, 학술연구도 하고, 번역도 하는 작가는 거의 없어졌다. 멸종된 것이다. 제도때문인지, 아니면 시대적 요소인지는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노신은 너무 일찍 죽어서 아쉽다. 곽말약은 너무 느게 죽어서 한탄스럽다. 아마도 노신이 일찍 죽은 것은 그에게 오히려 행운일 것이다. 곽말약이 만일 일찍 죽었다면 아마도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된 사상과 독립된 인격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진정한 작가가 나타나기는 어렵다. 진실된 말을 하려면 노신처럼 일찍 죽어야 하고, 오래 살고 싶으면, 곽말약처럼 구차하게 연명해야 한다. 정말 진퇴양난의 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