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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서황(徐晃): 관우이후의 삼국제일명장

by 중은우시 2015. 2. 23.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관우는 유비와 헤어진 후 조조에 의하여 토산에 포위된다. 가솔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약심사(約三事)"를 하고, "항한불항조(降漢不降曹)"를 투항조건으로 하여 투항한다. 이 일은 관우의 충성과 의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조조의 도량을 반영한다. 기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후의 '과오관참육장'도 모두 <삼국연의>의 허구의 이야기이다.

 

관우가 조조의 군영에 있을 때, "장료(張遼)를 제외하고 오직 서황(徐晃)과만 교분이 깊었다" 이것은 세 사람이 모두 항장(관우는 유비의 부하였고, 장료는 여포의 부하였음, 서황은 양봉의 부하였다)이었을 뿐아니라, 그들은 모두 산서(山西) 사람이었다. 모두 당시 천하에 이름을 떨친 병주기병집단(幷州騎兵集團)에 속했다. 삼국시대, 산서 병주에서 온 기병은 서로 다른 정치집단에 가입하여 전투력이 놀라운 대오가 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여포가 이끄는 집단이었다. 삼국시대초기에 백전백승이라 할 만했다. 심지어 천하를 차지할 기회까지 있었다. 다만 정치적인 강령이 없고, 지도력이 모자라서, 병주기병의 각부대는 차례로 실패하고, 속속 원소, 조조등 집단에 병합된다. 그 간접적인 결과는 병주지구의 유표 흉노집단이 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거병하여 동한천하를 멸망시킨다. 관우, 장료, 서황이 조조의 휘하에 모였으니, 고향사람들이 고향말을 하면서 고향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니 서로 교분이 생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온 후, 여전히 연전연패하다가, 최종적으로 형주, 당양에서 대패한다(영화 <적벽>의 시작부분은 바로 이 시기의 역사이다). 다만 이번 대패는 오히려 동오와 연합하여 조조에 항거하는 계기가 된다. 적벽대전에서 유비는 주유를 따라 대승을 거두고, 형주지구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관우도 연이어 전공을 세우며 유비 수하의 가장 중요한 장수가 된다.

 

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보내주었다는 이야기도 소설이다. 관우가 조조의 낙담한 모습을 볼 때의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가 만일 제갈량이 고의로 그를 보내 조조를 잡으라고 했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여 형님인 유비의 대업이 자신의 손에 망쳐졌다는 것을 알았다면, 관우의 성깔로 보아 제갈량을 용서하지 않아을 것이다. 유비도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연의>에는 관우와 장료, 서황등 같은 고향사람들의 감정묘사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간략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화용도부분에서 "관우가 멈추라고 소리지르려 할 때, 장료가 말앞으로 달려나오는 것을 보고는 부지불식간에 장탄식을 한다....." 이는 관우가 확실히 감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감정을 중시여기는 것은 그의 집단입장을 거의 동요시킬 정도였다.

 

유비, 제갈량, 장비, 조운등이 주력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가 전투를 벌일 때, 형주를 지키는 임무는 관우에게 주어진다. 관우는 형주부대의 주력을 이끌고 북상하여 먼저 조인을 격파하고, 번성을 포위한다; 그후에 성을 포위하고 지원군을 친다. 그리하여 우금, 방덕이 이끄는 증원군을 대파하고, 우금을 포로로 잡고, 방덕을 죽인다. 일시에 중원에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인심은 동요하고, 조위는 심지어 천도까지 논의했다. 그러나, 이때 얻은 승리는 관우를 난감한 지경에 처하게 만든다. 번성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중원은 공격해 들어가지 못한다. 철수하자니 앞에 세운 공이 물거품이 된다. 문제의 관건은 바로 형주와 익주가 수천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전략적인 협력이 어려웠다. 병력을 움직여 도와주기는 더욱 어려웠다. 비록 관중의 촉한군이 관중에 계속하여 압력을 가했지만, 조위는 마침내 역량을 빼낼 수 있었고, 지원군을 모은다. 그리고 북에서 남으로 관우를 맹공한다. 그리고 결국 관우부대를 궤멸시킨다. 이 조조군대의 총사령관이 바로 관우의 고향친구인 서황이다.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는 것은 동오의 여몽, 육손의 백의도강(白衣渡江)이다. 역사상 서황이 조위의 원군을 이끌고 북선전투에서 거둔 걸출한 승리를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다. 서황이 임시로 모은 증원부대를 통솔하여 남하한 후, 금방 형주 촉한군이 포위하고 있는 진지의 외곽을 포위한다. 관우는 조위의 또 다른 증원군에 대하여 이미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세심하게 배치를 마쳤다. 구덩이를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았을 뿐아니라, 방어를 엄밀하게 하였다. 심지어 적을 깊이 끌어들여 이 적군을 모조리 섬멸하고 번성을 함락시키고, 중원을 석권할 장지를 품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서황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더 용맹한 자가 이긴다는 기개를 가지고 전군을 이끌고 맹열히 촉한군의 방어진지를 공격한다. 계속하여 관을 돌파하고 채를 점령하면서 파죽지세였다. 관우부대의 방어체계를 파괴하여, 관우는 황급히 철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조조는 전후에 형주군방어진지를 시찰하면서 견고한데 깊은 인상을 받는다. 나아가 서황의 전공을 높이 평가한다. 관우는 감정을 중시하고 의기를 따지는 사람이다. 서황은 관우와의 사적인 우의로 공사(公事)를 그르치지 않았다. 관우가 패배한 것은 미방과 부세인이 출병하여 원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서황의 작전지휘가 적절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서황은 북방전투의 승리를 거두고, 남쪽의 동오군이 후로를 차단하자, 관우는 할 수없이 서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결국은 맥성으로 패주헤 들어가고, 패배하여 피살당하게 된다. 그러나 관우를 이긴 제일의 공로를 따지자면, 역시 험지를 깊이 들어가서 그를 격파한 서황을 꼽아야 할 것이다.

 

<삼국지. 위지. 서황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서황은 조조의 부하 '오자양장(五子良將)의 하나이다. 여러 중대한 전투에 참가했고, 지용(智勇)을 모두 갖추었으며 전공이 탁월했고, 군대를 다스리는데 뛰어났다. 조조는 일찌기 서황을 이렇게 칭찬한다: "서장군은 주아부(周亞夫)의 기풍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번성의 포위전에서 승리한 후, 조조는 이렇게 말한다: "적이 포위는 참녹각이 10중으로 되어 있었다. 장군이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의 우두머리를 여럿 베었다. 나는 군대를 움직인지 삼십년이 되었는데, 옛날에 병법을 잘 쓰는 자들도 이렇게 깊이 적의 포위망으로 쳐들어갔다는 거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번성, 양양이 포위를 당하고 있는데, 거, 즉묵을 지났으니 장군의 공은 손무, 양저보다 뛰어나다." 이를 보면, 관우이후, 서황이 삼국제일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