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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조비(曹丕)는 왜 명장 조홍(曹洪)을 싫어했을까?

by 중은우시 2015. 2. 22.

글: 이치아(李治亞)

 

조홍은 조위의 명장이다. 조조 수하의 주요 장수중 하나로, 조인(曹仁)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조조가 바깥에 나가 전투를 벌일 때면, 무장은 항상 조인, 조홍, 하후돈, 하후연등이었다. 이 조홍은 어려서부터 조조와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조조를 따라 혁명에 가담한다.

 

혁명을 하려면 위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조조는 일찌기 여러번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동탁을 을 형양(滎陽)에서 추격하여 습격하다가 서영(徐榮)에게 패배하여 말을 잃었을 때인데, 조홍은 이때 자신의 말을 조조에게 주어 조조가 위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190년(초평원년) 이월, 조조는 거병하여 동탁을 토벌한다. 형양에 도착했을 때 동탁의 부장인 서영에게 패배당한다. 그때 조조는 타고 있던 말을 잃었고, 동탁의 부대가 바로 추격을 해왔다. 조홍은 그 모습을 보고는 말에서 뛰어내려 말을 조조에게 양보한다. 조조가 사양하며 말을 받지 않으려 하자, 조홍이 말한다: "천하는 나 조홍이 없어도 되지만, 당신이 없으면 안된다!" 그리고, 걸어서 조조를 따라 판수(汴水)의 가로 간다. 물이 깊고 물살이 거세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조홍은 강물을 따라 올라가며 찾아서, 마침내 배 한 척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조조는 강을 건널 수 있었고, 초군(譙郡)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소설에서, 마초가 관중을 습격할 때, 조홍은 서황과 함께 나란히 전부(前部)였다. 그러나 도발을 참지 못하고 관을 잃는다. 그러나 나중에 마초와 전투를 벌여서 다시 조조가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조홍은 조위에 큰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조조의 심복이다. 그러므로 생활에서 아주 무절제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잘못을 알면 고쳤다. 218년, 조홍은 촉한의 명장 오란(吳蘭)을 대파하고, 그의 부장 임기(任夔)등을 참한다. 경공연(慶功宴)에서 조홍은 주연을 크게 열어, 가녀(歌女)들에게 아주 얇은 옷을 입고 북을 밟게 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이때 부하인 양부(楊阜)가 엄히 조홍을 질책하며 말한다: "남녀가 유별하고, 이는 국가의 큰행사인데, 어찌 여러 사람들의 앞에서 여자가 옷을 벗을 수 있는가? 하걸, 상주의 패란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분연히 일어나 떠난다. 조홍은 바로 상하에 가가의 공연을 멈추게 하고 양부를 다시 불러서 자리에 앉게 한다.

 

조조가 죽은 후, 조비는 위왕을 세습하고 얼마후 한나라를 대체하여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조홍에게는 크게 살계를 펼친다. 사람들은 이해를 못했다. 원래 조홍의 집안에는 돈이 많았지만 아주 인색했다. 조비가 젊을 때 그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이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조홍의 문객이 법을 어긴 일을 가지고, 조홍을 감옥에 넣고 그를 처형하려 했다. 여러 신하들이 나서서 조홍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때 변태후가 조비를 질책한다: "양.폐의 사이에서 자렴이 아니면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곽황후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조홍이 오늘 죽는다면, 내일 나는 황제에게 너를 폐하게 시킬 것이다." 곽황후는 통곡하며 여러번 조비에게 조홍을 사면해달라고 간청한다. 나중에 조홍은 마침내 사면을 받는다. 다만 관직, 작위, 봉호, 가산은 모두 박탈당한다. 변태후는 다시 조홍을 위하여 청하여, 조비는 조홍의 가산을 돌려준다. 조홍은 태조의 공신인데, 조비가 이렇게 그를 대하는 것에 대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많이 원망을 했다.

 

이를 보면, 조비가 왜 명장 조홍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첫째, 공신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려는 것이다. 조홍은 비록 전공을 많이 세웠지만, 스스로 황친국척이라는 것을 믿고, 부하들로 하여금 불법적인 일들을 많이 저지르게 했다. 조비는 자신의 가족이 이렇게 함부로 행동할 것을 우려했고, 그리하여 그를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둘째, 조비는 원한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비는 부친 조조처럼 흉금이 넓지 못했다. 이전에 투항해온 장수에 대하여도 악감점을 드러냈을 뿐아니라, 당시 자신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은 인색한 숙부도 이렇게 박정하게 대한 것이다.

 

셋째, 조홍은 확실히 득의망형(得意忘形)했고, 자제하지 않았고, 안으로 숨기지도 않았다. 이는 아마도 그 자신에게 그런 방면의 소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말년의 그가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도 잘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