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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채견(蔡牽): 청나라 해적의 보물이야기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상어(商漁)

 

 


"해적의 보물"은 천여년이래 인류해양문화에서 오랫동안 전수되며 즐겨 입에 올리는 화제이다. 한 장의 신비한 보물지도, 한 마디 해적두목이 사형집행되기 전에 남긴 유언, 이런 것들은 무수한 모험가들을 망망대해로 이끌었다. 바다 깊은 곳의 어느 작은 섬에 누군가를 하룻밤만에 거부로 만들어줄 수 있는 금은보화가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지가 충만하고, 위험이 충만하고, 무한한 욕망이 충만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눈에, 이런 전설과 모험은 단지 서방의 여러 해적이야기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물섬>, <카리브해의 해적>의 이야기나 인물은 마치 이미 해적보물이야기의 표준적인 이미지처럼 보인다. 그런데, 중국역사상 해적들도 해상에서 풍운을 질타한 바 있고, 그것은 아마도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청나라 가경연간의 채견(蔡牽)은 '휘황'한 해적경력과 신비한 보물전설을 남겼다.


채견(1761-1809, 채건(蔡騫)이라고도 씀)은 복건 동안 사람이다. 청나라 건륭, 가경연간에 해적우두머리로 사람들에게 '대출해(大出海)'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당시 복건과 대만의 여러 거상들은 모두 채견과 관련이 있었다. 채견이 발급하는 노란색 바탕의 '면겁(免劫)' 영기(令旗)는 이들 가족들이 무역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였다. 어느 정도, 채견은 이미 대만해협에 자신의 해상질서를 건립한 것이다.


나중에 채견은 대만의 호미(지금의 담수)에 정권을 건립하고 연호를 광명(光明)이라 하고, 진해위무왕(鎭海威武王)이라 칭한다. 그리고 '광명정대(光明正大)'라고 새겨진 옥새를 만든다. 이런 행위는 이전의 왕직(王直), 진조의(陳祖義), 정지룡(鄭芝龍)등 유명한 해적들보다 더욱 장광(張狂)한 것이다. 민간전설에서는 지금까지도 그를 "해황제(海皇帝)"로 부른다. 그가 건국한 후 청나라의 수군장령이자 그와 마찬가지로 복건 동안출신인 절강제독 이장경(李長庚)과 전투를 벌인다. 1807년, 그는 심지어 광동 흑수양해전에서 포를 쏘아 이장경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성극필쇠(盛極必衰)라고, 1809년, 채견은 절강 태주부근에서 이장경의 옛부하들의 포위공격을 받아 격패당하고, 대세가 기운다. 그는 결국 스스로 만든 폭탄으로 배를 폭파시켜 부하들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아 죽는다. 민남어의 속담중에 "채견이 포를 만들어 스스로를 폭파시켰다(蔡牽造砲炸自己)"는 말이 있는데, 이는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 당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다만, 그의 전설적인 '해황제'경력과 비교하여 사람들이 더욱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의 보물에 관한 신비한 전설이다. 먼저 짧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기로 한다:


복건 <복정현지> 민국35년(1946년)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일본의 도망전범 암전행웅(巖田幸雄)은 채덕해(蔡德海)라는 가명으로 국민당 복건성정부 주석 유건서의 동의를 받아, 유산도(嵛山島)의 개발권을 따냈다. 다음 해, 암정행웅은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된다."


이 암전행웅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회고록을 발표한다. 제목은 <한 해적의 자술>이다. 회고록에서 채견의 사적 그리고 채견이 유산도에 보물을 숨겼다는 이야기와 가요에 관하여 명확히 썼다. 도서개발권을 얻은 일본인으로서 현지의 전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의심이 들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전설이 있길래 그로 하여금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중국의 작은 섬에 남게 만들었을까.


전설에 따르면, 채견은 가난한 집안출신으로 나중에는 한 지방을 통치한다. 심지어 구오지존(스스로 봉한 것이기는 하지만)에 오르기도 한다. 그가 모아둔 금은보화는 충분히 이만명의 병사와 백여척의 선박을 지닌 해상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조정과 맞서싸우면서,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으므로, 채견은 엄청난 금은보화를 모두 대만해협의 한 섬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대요남(大瑤南), 소요북(小瑤北), 대수엄불도(大水淹不到), 소수엄삼각(小水淹三角)" 이는 채견이 남긴 보물보관장소에 대한 암어(暗語)이다. 이 말은 복건 복정현 유산도 현지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백년간 전해져 내려왔다. 바로 이 가요가 일본인을 포함한 무수한 모험가들을 보물찾기에 나서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보물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근거로, 보물보관장소를 유산도의 한 '홍기산(洪紀山)'이라 부르는 곳으로 확정하고, 보물이 이 산의 어느 동굴 속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는 흐지부지 된다.


현지의 노인에 따르면 이런 견해도 있다: 채견의 보물은 유산도의 한 우물 속에 숨겨져 있다. 정명한 채견은 보물 전부를 오금전(烏金塼)으로 바꾸어 이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러해 후, 한 척의 배가 지나가다가 배의 부엌이 망가져서, 선원이 섬에 내려 몇 개의 우물에서 오금전을 떼어와서 아궁이를 만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선주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사람을 시켜 우물의 오금전을 모조리 가져오게 한 후 바다로 사라진다.


이야기는 그외에도 많다. 현지 어민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채견이 보물을 처와 함께 유산도 위에 매장했다고 한다. 나중에 도굴꾼들이 무덤을 도굴하였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저 석비 하나만 발견한다. 그 위에는 크게 '보(寶)'자가 쓰여 있고, 작은 글씨로 아래에 "오도향남북(吾道向南北), 동서장지곡(東西藏地谷), 대수밀매저(大水密賣著), 소수밀삼각(小水密三角), 구단십팔항(九壇十八缸), 일항연일항(一缸連一缸), 수인능득도(誰人能得到), 포로도연강(鋪路到連江)"


재미있는 점은 비슷한 가요가 복건연해의 마조열도(馬祖列島)에도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용은 유산도와 비슷하다: "근건근련련(芹囝芹連連), 칠항팔발구배련(七缸八鉢九排連),  대수밀매저(大水密賣著), 소수밀정건(小水密鼎), 수인득적저(誰人得的著), 쾌활천만년(快活千萬年)". 이는 마조열도 북간도의 보물구결이다. 마조 동인에도 이런 보물관련 구결이 전해진다: "오도향남북(吾道向南北), 동서장지각(東西藏地殼), 대수밀매착(大水密賣着), 소수밀삼각(小水密三角), 주장십팔항(酒樟十八缸), 일항연일항(一缸連一缸), 수인능득도(誰人能得到), 포로도연강(鋪路道連江)" 이 구결은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유산도 홍기산처럼 추측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매년 중추절이 되면, 마조의 해안에서 특수한 각도로 바다를 보면, 달빛아래, 운이 좋으면 특수하게 빛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채견이 남긴 황금백은의 빛이라고 한다.


수백년이 흘렀다. 채견의 보물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서 사람들을 곤혹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신비한 바다로 끌어들인다. 앞에서 말한 일본인 암전행웅이 회고록에서 쓴 것과 간다: "그곳은 내가 그리워하는 곳이다. 아주 아름다운 도서이다. 현재까지 비록 40여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꿈에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