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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모기령(毛奇齡): 학술이 단정하지 못한 대가

by 중은우시 2014. 1. 15.

글: 주운(周雲)

 

기실 학술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은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고이래로 있었다. 일찌기 한나라때, 누군가 가짜경서를 만들거나, 유명학자의 제자를 사칭하며 여기저기 사기를 치고 다녔다. 그후, 이런 기풍은 계속되었다. 청나라때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청나라때의 학풍은 역대중 비교적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학술이 단정하지 못한 일은 역시 발생했다. 그중 비교적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모기령이다.

 

모기령은 청나라 초기의 저명한 학자이고, 건가학파(乾嘉學派)의 대표인물중 하나이다. 학술성취도 아주 높고, 시문, 서예등 분야의 성취도 있으며, 명망도 아주 높았다. 만일 오늘날이라면, 역시 대가급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원사(院士)같은 것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문과에 원사가 있다면. 다만 유감인 것은 이런 원사급별의 인물이 학술도덕측면에서 올바르지 못한 점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청나라의 또 다른 학자인 전조망(全祖望)이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전조망은 모기령의 여러가지 학술이 단정하지 못한 행위를 열거하고 있다. 대체로 나누면 3가지이다: 첫재는 학풍이 경솔하다는 것이다.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고 함부로 결론을 내린다. 예를 들어 선인의 서적에서의 잘못이 이미 후세인들에게 시정되었는데 모기령은 이를 알지 모하여, 여전히 책에서 선인의 잘못된 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또 예를 들어 동한 가평연간에 한나라조정은 유학경전 <주역>, <상서>, <노시>, <의례>, <공양전>, <논어>, <춘추>를 돌에 새겨 태학(太學)에 두었다. 세칭 "가평석경(嘉平石經)"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원래 <좌전>이 업었다. 다만 모기령은 진지하게 고증하지 안혹, <좌전>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전조망은 이를 "고증하지 않고 헛소리를 했다"고 조롱했다.

 

만일 상기 행위가 학풍이 탄탄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모기령의 두번째 학술부단행위는 성격이 비교적 엄중하다. 학술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번 자신의 논점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고의로 거짓내용을 날조했다. 역사상 발생하지 않은 일을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는 당나라때 이미 태학, 중용이 논어, 맹자와 병렬적이었다고 말했고 소경(小經)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기실 당나라때 그렇게 한 적은 없다. 이것은 모기령이 억측으로 날조해낸 것이다. 그외에 그의 글에 나오는 일부 고대의 역사자료는 다른 사람들이 찾아보면 고서에 아예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도 고인을 사칭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모기령의 세번째 학술부단행위는 권력에 굴종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학술주장을 감히 견지하지 못한 것이다. 절강사람인 노함적(盧涵赤)은 모기령의 은인이다. 노함적은 일찌기 <속충표기>를 썼고, 모기령이 서문을 써준다. 나중에 청나라정부는 문자옥을 일으킨다. 모기령은 <속충표기>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우려한다. 급히 노함적의 아들(노함적은 이미 죽었음)에게 편지를 써서 그에게 <속충표기>라는 책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그 책에 서문을 썼다는 것도 부인한다. 다만 책은 거기에 있었고, 모기령이 쓴 서문도 직접 붙어 있었다. 필적만 봐도 그것은 모기령이 쓴 것이라고 알 수 있었다. 어찌 이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노적함의 아들은 아주 화가 났고, 이 일을 공개해버린다. 모기령은 즉시 비난을 받는다.

 

모기령은 일생동안 주희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주 글을 써서 비판했다. 말년에, 더더욱 주희를 비판하는 글을 모아서 춮판한다. 이름은 <사서개착(四書改錯)>이라고 한다. 나중에 청나라가 주희를 존중하고, 그를 공묘에 배향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기령은 그 소식을 들은 후, 아주 두려워한다 .즉시, <사서개착>이라는 책을 절판시킨다. 이것도 당시 학술계의 웃음거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