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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중기)

강희제의 근신 고사기(高士奇)의 "기(奇)"

by 중은우시 2014. 1. 15.

글: 포강객(浦江客) 

 

 

 

강희연간의 대신 고사기는 역사상 쟁의가 아주 큰 인물이다.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하늘보다 높이 평가하고, 낮게 평가하는 사람은 땅바닥보다 낮게 평가한다. 실로 기중지기(奇中之奇)라 아니할 수 없다.

 

고사기는 자가 담인(澹人)이고, 호는 강촌(江村)이며 조상은 절강성 여요(餘姚)에 살았고, 전당적의 항부부학(杭州府學) 생원(生員)(秀才)이다. 강희10년 국자감에 들어갔고, 시험후 한림원에 남아서 일을 한다. 내정에서 일을 하며 강희제의 총애를 받는다. 어떤 사가는 고사기의 일생동안 관료생활을 종합하여 그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7가지 "기(奇)"가 있다고 말했다.

 

일기(一奇): 가난한 수재의 신분으로 글씨를 잘 쓰는 것만 가지고 사람을 추천을 받아 금방 강희의 심복비서가 되었다.

이기(二奇): 강희가 매번 외출할 때면 고사기를 데려갔고, 두 사람은 거의 떨어지지 않았고, 나누지 않는 얘기가 없을 정도였다. 명목은 군신관계이지만, 실제는 친구같았다;

삼기(三奇): 고사기는 금전으로 강희신변의 시종들을 매수하여, 공개적 반공개적으로 강희제의 생화릭거와 업무에 관한 정보를 취득해서, 그 후에 이를 가지고 사기를 치고, 팔기도 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그가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었다.

사기(四奇): 고사기는 위법한 짓을 저지르고 범죄를 저질렀지만 겅희제는 그를 보호해 주었다.

오기(五奇): 탄핵을 받아 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강희제는 고사기에 대하여 은혜를 계속 베풀었고,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돌보아 주었다;

육기(六奇): 고사기가 은퇴하기 전에, 강희제는 그에게 관직을 1등급 올려준다. 그리고 그가 은퇴한 몇년후에 다시 그를 승진시켜 실직(實職)을 준다. 이는 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이다.

칠기(七奇): 고사기의 주소는 정부의 제2정모집결처 혹은 정부의 제2사무실이 되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시종 못들은 것처럼 했고, 추궁하지도 않았다.

 

고사기의 관료생애에서의 "기"에 관하여 청나라때이 야사필기에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소련(昭槤)의 <소정잡록> 제8권 <고강촌>에는 이런 기재가 있다: "강촌은 성격이 재빠르고 교묘하여, 일을 처리할 때 먼저 황상의 뜻을 살펴서, 황상의 뜻에 들어맞았다. 하루는, 황상이 사냥하는 중에 말이 쓰러져서 황상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촌(고사기)는 그 말을 듣고, 일부러 옷에 진흙을 묻히고, 들어가서 옆에 섰다. 황상이 괴이하게 여겨서 물으니, 강촌이 말한다: '신이 말에서 떨어져 진흙탕에 쳐박혔는데, 아직 옷을 씻지 못했습니다.' 황상이 대소하며 말한다: '너같은 남쪽 사람은 유약해서 그렇다. 짐은 말이 쓰러졌지만, 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기분이 풀어진다. 그리고 금산에 오르다가 글을 쓰고 싶어했는데 오랫동안 붓을 적시고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강촌은 '강천일람(江天一覽)'이라는 네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앞으로 나가 먹을 간다. 그러면서 글자를 슬쩍 황상에게 보여준다. 황상은 그가 쓴 것을 따라 붓을 움직여 글을 쓴다. 그가 황상의 뜻에 영합한 것은 모두 이러했다."

 

이 필기는 고사기가 강희제의 뜻에 영합한 두 건의 일을 기록했다. 앞에서 얘기한 것은, 고사기(호 강촌)가 성격이 기민하여 일을 만나면 황상의 뜻을 잘 헤아려서 그의 뜻에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번 황상의 환심을 샀다는 것이다. 하루는 강희제가 사냥을 하다가 말이 발을 잘못디뎌 쓰러져서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다. 그리하여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고사기는 그 말을 듣고는 진흙을 옷에 ㅜㄷ히고, 급히 궁안으로 들어가서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강희제는 기이하게 여겨서 왠 일인지 물어본다. 고사기는 답한다: "저는 금방 말에서 떨어져 진흙에 빠졌습니다. 옷을 씻거나 바꾸어입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강희제는 그 말을 듣고는 가가대소한다. "너희 남방사람은 원래 이렇게 유약하다. 금방 나는 말이 발을 잘못 디뎌 쓰러졌지만,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강희제의 노기는 사라진다.

 

두번째 얘기는 이렇다. 한번은 강희제가 진강 금산을 오를 때, 편액을 쓰고 싶어졌다. 그러나 붓을 오랫동안 적시고 있으면서도 적절한 문구가 생각나지 않았다. 고사기는 그 모습을 보고는 손 바닥에 '강천일람'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는 앞으로 걸어나가 먹을 가는 것처럼 하면서 강희제에게 네 글자를 슬쩍 보여준다. 강희제는 그의 손바닥에 쓴 글씨대로 편액을 써준다.

 

기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두번째 사건은 별 것이 아니다. 비서로서 모시는 상사가 곤경에 처했을 때 당연히 그 곤경을 해결해주어야 한다. 앞의 일은 아부의 혐의가 짙다. 세상사람들의 욕을 얻어먹는 것이 당연하다. 고사기의 일생동안의 관료생애를 살펴보면, 강희제로부터 이렇게 총애를 받은 것이 이유가 있다. 고사기의 관료생애에서 "기"에는 4가지 "기"가 있다.

 

첫째, 기우(奇遇)이다. 고사기가 강희제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소정잡록>등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모두 대학사 밍주(明珠)가 추천했다고 한다. 젊었을 때 고사기는 경성으로 가서 찾은 첫번째 일이 바로 밍주의 집에서 한 문위(門衛)의 집에서 글을 가르친 것이다. 한번은 문위의 추천으로 고사기는 밍주에게 몇 통의 긴요한 서신을 대필해주는데, 밍주가 아주 만족해 한다. 그리하여, 고사기는 집안에 남겨서 서기의 역할을 한다. 나중에 밍주는 다시 고사기를 강희제에게 추천한다. 또 다른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조택심(祖澤深)이라는 관리가 고사기를 대학사 소어투(索額圖)의 심복인 가노에게 추천하여 노복이 된다. 얼마후 이 가노는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된다. 고사기는 그에게 아이디어를 내주어 난관을 넘기게 된다. 그리하여 소어투의 주목을 받는다. 소어투는 고사기가 사람의 생각을 잘 읽고 글씨를 잘 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를 남겨서 막료로 삼는다. 그후 강희제가 고문으로 삼을 서생을 찾자, 소어투는 고사기를 강희제에게 추천했다.

 

둘째, 기교(奇巧)이다. 강희제가 고사기를 떠나보내지 않은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야사필기에는 고사기가 여러번 황제를 따라 남순할 때 남긴 몇 건의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한 해는 강희제가 남순할 때 항주 영은사로 가서 편액을 쓰는데, "영(靈)"자를 쓰다가 위의 "우(雨)"를 너무 크게 써버렸다. 아래에 글씨를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고사기는 그 모습을 보고는 급히 손바닥에 "운림(雲林)"이라고 써서 강희에게 보여준다. 강희제는 잘못된 것을 그대로 마쳐서 "운림"이라는 두 글자를 쓴다. 그래서 영은사(靈隱寺)는 운림사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그리고 또 한 건은 <소정잡록>에서 말하는 강희제의 '강천일람' 글자쓰는 것의 에피소드이다.

 

고사기가 황상의 뜻에 영합하는 방식은 아주 교묘했다. 실제로는 모두 '공부'를 상당히 했기 때문이다. 고사기는 출근하여 강희제의 곁은 반걸음도 떠나지 않았을 뿐아니라, 퇴근한 후에 강희제가 무슨 일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하여 그는 방법을 강구하여 알아냈다. 그는 강희제가 무슨 책을 읽는지에 대하여 특히 흥미를 나타냈다. 이를 위하여 매일 집에서 나설 때 고사기는 주머니에 금두를 가득 넣고 다니며서, 궁안에 도착하면 강희제를 곁에서 모시는 태감을 찾아가서 상세히 강희제의생활기거와 업무정보를 얻어낸다. 태감은 가치있는 정보를 제공할 때마다 고사기로부터 금두(金豆) 하나씩을 받았다. 많이 말해주면 많이 받았고, 말해주면 그 자리에서 주었다. 왕왕 주머니를 가득채운 금두는 퇴근할 때면 텅 비곤 했다. 고사기가 강희제의 희노와 호오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으므로, 강희제의 일언일행을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강희제가 읽는 책을 그는 미리 읽어둔다. 그래서 강희제가 무엇을 묻더라도, 설사 그것이 잘 보지 않는 책의 내용이라고 고사기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했고, 황상이 뜻에 맞추었다.

 

셋째, 기화(奇貨)이다. 고사기는 자신의 강희제의 근신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이익을 가득 챙긴다. '기화가거(奇貨可居)'라 할 만하다. 필기야사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고사기는 매번 퇴근할 때, 조정의 각 부서의 대신들이 그의 집앞의 길에 모여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대학사 밍주도 어떤 때면 그 속에 있었다. 고사기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신경쓰지 않았다. 옜날의 '은인'이며 당금의 '재상'인 밍주에 대하여 고사기는 체면을 봐주었다. 밍주는 들어오게 하여 오랫동안 말을 나누곤 했다. 나머지 '상서'나 고관들에 대하여 고사기는 왕왕 그중 한 두명만 들어오게 하여 만나보곤 했다. 이런 상화잉 거의 매일 계속된다. 조정대신은 싫증을 내지도 않고 쑥스러운 얼굴로 고사기를 만나러 갔다. 당연히 그것은 단순히 관계를 가깝게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사기에게 그 만이 알고 있는 내막정보를 얻기 위해서이다. 혹은 고사기의 손을 통하여 황제에게 물건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오는 사람들이 자연히 맨손으로 오지는 않는다. 주머니에는 몇 장의 은표를 가지고 왔다. 이것은 고사기에게 계속하여 재물이 들어오게 해주었다.

 

넷째, 기공(奇功)이다. 고사기는 단순히 아부를 할 줄아는 아첨꾼이 아니었다. 그는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재능이 풍부한 대신이었다. 고사기는 선후로 두번 남서방(南書房)에서 일을 했다. 전후로 합쳐서 14,5년에 이른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저녁 늦게 퇴근했다. 야근도 다반사였다. 고사기는 비록 일류서예가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글자를 아주 잘 썼다. 강희제는 그가 쓴 문서전적을 아주 좋아했다. 고사기는 일생동안 열심히 일하고 공부를 좋아했다. 책도 많이 읽었다. 고증을 열심히 하고, 저술을 많이 했다. 그의 저작은 <사고전서>에 8부가 수록되었다. 강희제는 시종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짐이 처음에 책을 읽을 때, 내감이 사자본경(四字本經)을 가져다 주어 시문(時文)을 지었다; 고사기를 얻고 난 후, 처음으로 학문의 비결을 알았다. 처음에 고사기를 보고 고인의 시문을 얻어 한번 보면 그 시대를 알았다. 마음 속으로 기이하다고 여겼다. 얼마 후 짐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 고사기는 전투에서의 공로는 없다. 그러나 짐이 그를 후하게 대해주었다. 그는 짐의 학문이 크게 성장하도록 도와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고사기를 아주 총애했음을 알 수 있다.

 

강희28년 겨울, 고사기는 마침내 좌도어사 곽수(郭琇)로부터 탄핵을 받아 강희제를 떠난다. 곽수의 상소에서는 고사기가 전임 좌도어사 홍서(洪緖)등과 결탁하여, 일당이 되어, 내외에서 호응하여 사기를 치고, 뇌물을 대거 받는 등의 범죄사실이 많다고 했다. 이 상소문이 올라가자, 고사기 일당이 변명할 여지를 없애고, 강희제가 그를 계속 보호해줄 방법을 모두 막아버린다. 어쩔 수 없이, 강희제는 고사기를 해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당연히 어떤 사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곽수가 고사기등 대신을 탄핵한 것은 실제로 태평성세에 관료집단 내부의 권력쟁탈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그 점은 역사연구가들이 더 연구를 해봐야 할 점이다. 평상심으로 말하자면, 고사기는 역사상 간신, 탐신, 첨신(諂臣)의 류에 속하지는 않는다. 다만 <순자.신도>의 산자유형에 따르면 "태신(態臣)", "찬신(纂臣)", "공신(功臣)", "성신(聖臣)"등으로 구분한다. 고사기는 이 분류에 따르면 "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태신"은 "대내적으로 민중을 통일시키지도 못하고, 대외적으로 환난을 막아내지는 못하며,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기지 않고, 제후들이 신임하지도 않으나, 교묘하고 기민한 말을 잘 하여 군주로부터 총애를 받는 신하"를 말한다.

 

"태신"은 왜 "흘향(吃香)"하는가? 이것은 중국역사상 오래되고 침중한 군신지도의 주제로 넘어간다. 봉건사회에서, 군신관계는 직접적으로 정풍(政風)이 좋고 나쁨과 관련된다. 신하는 군주에게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진실한 견해를 감히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군주는 간언을 잘 받아주고, 허심탄회하게 각종 의견을 들어주어야 한다. "충신은 기개가 있어 멀어지기 쉽고, 영신(佞臣, 아첨하는 신하)은 유순하여 가까이 하기 쉽다. 유순하면 충성스러운 것처럼 보이고 좋은 말을 많이 한다; 기개가 있으면 강한 것처럼 보이고, 직간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말을 하는 자는 기용되니, 아참하는 사람들이 조정에 가득 차게 된다; 직간하는 자는 멀리 하니 충신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중국의 군신지도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유순'이 바로 군신지도의 열쇠이다. 봉건사회에서, 군신관계는 기실 한 마디 말이다: 순종. 이런 체제하에서, 충직한 선비, 직언하는 사람은 충언역이(忠言逆耳), 양약고구(良藥苦口)이다. 왕왕 잡초나 썩은나무처럼 버려진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려면, 할 수 없이 재성(才性)과 노성(奴性)을 완벽하게 결합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바로 고사기와 같은 신하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