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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고대황제는 후궁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12. 8.

작자: 미상

 

중국역대제왕은 후비관리제도를 규정했는데, 대체로 비슷하지만, 각각 차이는 있다. 진(秦)에서 청(淸)까지, 많은 수의 비빈을 맞이한 것은 황제의 음욕을 만족시키면서, 자손을 번성하게 하기 뮈함이다. 그리하여 삼궁육원칠십이비(三宮六院七十二妃)라는 말도 있고, 후궁가려삼천(後宮佳麗三千)이라는 말도 있다. 황제의 후비는 과연 몇 명이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관리했을까?

 

명태조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 대신들에게 역대후궁제도릉 연구하게 했다. 대신은 연구를 마치고 이렇게 보고한다: "주(周)나라의 제도는 후궁에 내관(內官)을 두어 다스리는 것이었다. 한나라대는 내관 14등을 두고 수백명에 이르렀다. 당나라때는 육국이십사사(六局二十四司)를 두고 관리가 무릇 190명, 여사(女史)가 오십여명인데, 모두 양가집 여자로 채웠다." 주원장은 이상의 숫자는 너무 많다고 여겨서, 명나라는 당나라보다 140여명을 감소시킨다. 실제로 후궁비빈이 몇 명인지는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황제들도 아마 확실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를 세우고 법규를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주원장은 전대의 여화(女禍)를 고려하여, 한림학사 주승(朱升)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治天下者, 正家爲先). 집안을 바르게 하는 도리는 부부간의 근신화목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강을 세우고, 내교를 엄격히 하낟(立綱紀, 嚴內敎). 첫째, 후비는 모의천하(母儀天下)이며, 정사에 간여하여서는 안된다. 명나라때는 태후의 수렴청정이 없었다. 둘째, 후비의 직책을 규정하여, 황제의 궁침을 돌본다. 셋째, 쇠에 금으로 쓴 홍패를 만들어, 후비가 지켜야할 규율을 새겨서, 각 궁에 걸어두었다. 넷째, 후비(后妃)이하 빈어(嬪御)등의 의식(衣食), 기용(器用), 금은(金銀)등의 공급까지 모두 급별로 공급제를 시행한다. 다섯째, 내외서신교류를 금지하며 만일 교류가 있으면 사형에 처한다. 그래서, "명나라때에는 궁중이 깨끗했다. 논자들은 그 가법이 좋아서라고 말한다. 한,당나라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명나라의 후궁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모후전권(母后專權)과 외척전권(外戚專權)의 난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후비의 사료는 아주 적다. 예를 들어, 효장태황태후는 천명제, 천총제, 숭덕제, 순치제, 강희제의 5명의 황제시기를 거치고 향년 75세였다. 두번이나 어린 황제 순치제와 강희제를 보좌했다. <청사고.효장문황후전>은 겨우 941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강희제의 비(妃)의 경우 어떤 경우는 겨우 6자의 기록만이 있다: "진씨(陳氏), 자일(子一), 상녕(常寧)", 그리고4자반인 경우도 있다: "장씨. 여일(張氏, 女一)". 그럼, '반'자는 어떻게 된 일인가. 왜냐하면 연이어 4명의 명호가 없는 딸을 낳았고, 이들 딸은 "개상(皆殤)". 즉 요절했다고 적었다. 4명인데 겨우 2글자만 적었으니, 평균 1인당 반자이다. 비빈이 만일 자녀를 낳지 않고, 특수한 사적이 없으면 1글자도 쓰여지지 않는다. <명사.후비전>에서는 "정호(正號)가 있는 후비이거나, 특수한 사정이 발생한 비빈은 기록하고,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궁의 규정을 제정하고, 엄격하게 관리했다. 청왕조때는 <흠정궁중현행칙례(欽定宮中現行則例)>를 제정하는데, 828페이지에 달한다. 후비관리는 기본적으로 "사정(四定)"이다: 편제를 정하고, 급별을 정하며, 대우를 정하고, 법도를 정하는 것이다.

 

편제를 정하는 것을 보자. 명나라의 후비는 편제를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나라때는 편제를 정했다. 청나라는 강희제 이후, 후궁의 전제를 완비한다. 황후 1인, 황귀비 1인, 귀비 2인, 비 4인, 빈 6일, 귀인, 상재, 답음, 학생은 정수가 없다. 그리고 동서 6궁에 나누어 거주한다. 당시에는 명분(名分)이라고 불렀다. 기실, 빈(嬪) 이하의 등급 명분은 엄격하지 않았고, 변화가 있었다. 청나라에서 후비가 가장 많았던 황제는 강희제와 건륭제이다. 강희제는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이 41명이고, 건륭제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29명이다. 가장 적은 황제는 광서제로 1후(예허나라씨), 2비(근비와 진비)뿐이었다. 동서6궁중 매 궁원에는 정위(正位)가 있다. 황후이거나, 황귀비이거나, 귀비등이다. 기타의 비, 빈, 귀인, 상재등은 등급에 따라, 동서배전(東西配殿)등의 방에 나누어 거주하였다. 황제는 일반적으로 육궁으로 가서 잠을 자지 않았다. 시침하는 비빈은 황제의 침궁으로 왔다. 예를 들어 건청궁(乾淸宮) 동난각(東暖閣), 양심전(養心殿) 후침전(後寢殿)등이다. 시침후에는 자신이 원래 거주하는 궁원으로 돌아간다.

 

등급을 정하는 것을 보자. 명나라때 후비는 14등급으로 나뉘었다: 황후, 황귀비, 귀비, 빈, 재인(才人), 첩여(婕妤), 소의(昭儀), 미인, 소용(昭容), 선시(選侍), 숙녀(淑女)등의 명분 혹은 등급이 있었다. 각 왕조마다 변화가 있었고,불변의 법칙은 없었다.

 

육궁의 배치는 주로 첫째는 사람이고, 둘째는 물건이다. 우선 사람을 얘기하고 다시 물건을 얘기하자.

 

비빈을 모시는 인원은 주로 태감(太監)과 궁녀(宮女)이다. 태감은 매궁마다 수령태감 2명(팔품시감), 매월 은4량, 쌀 4곡(斛), 공비 은7전3푼3리이다; 태감은 12명으로 매월 은2냥, 쌀 1곡반, 공비 은6전6푼6리이다. 그들의 직책은 '본궁의 진설(陳設), 쇄소(灑掃), 승응전취(承應專取), 좌경(坐更)등의 일을 책임지는 것이다" 태감과 궁녀의 배치는 아래와 같다.

 

황후      태감 12명, 궁녀 10명

황귀비   태감 12명, 궁녀 8명

귀비      태감 12명, 궁녀 8명

비         태감 10명, 궁녀 6명

빈         태감 8명, 궁녀 6명

귀인      태감 4명, 궁녀 4명

상재      태감 3명, 궁녀 3명

답응      태감 1명, 궁녀 2명

 

후비의 대우는 엄격한 등급이 있다. 그녀들이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쓰는 것등의 비용은 모두 등급에 따른 공급제를 시행했다. 황후로부터 답응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의 급여는 '궁분(宮分)'이라고 불렀다. 등급에 따른 차이는 아주 컸다. 황후와 상재를 예로 들어 소개해보기로 하자:

 

황후궁분(皇后宮分)

 

매년: 은1000냥, 대권강주 2필, 장단 4필, 왜단 4필, 섬단 3필, 금자단 2필, 운단 7필, 의소단 4필, 남소단 2필, 모단 2필, 양단 6필, 궁조 2필, 사 8필, 이사 8필, 능 8필, 방사 12필, 항세 8필, 면주 8필, 고려포 10필, 삼선포 5필, 모청포 40필, 조포 5필, 금선 20 류(綹), 융 10근, 면화선 6근, 면화 40근, 이소피 40장, 오랍소피 50장.

 

매일: 반육용돼지고 166근, 양고기 1판, 소생구 2마리, 신갱미 1승 8홉, 황노미 1승 3홉 5작, 고려강미 1승 5홉, 갱미면 1근 8냥, 백면 7근 8냥, 맥자분 8냥, 완두채 3홉, 백당 1근, 분당 4냥, 꿀 4냥, 핵도인 2냥, 송인 1전, 구기 2냥, 말린대추 5냥, 돼지고기 9근, 돼지기름 1근, 향유 1근 6냥, 달걀 10개, 면근 12냥, 두부 1근 8냥, 분과사 1근, 첨장(甛醬) 1근 6냥 5전, 청장 1냥, 식초 2냥 5전, 신선야채 15근, 가지 20개, 왕과(王瓜) 20개, 삼냥중백랍(三兩重白蠟) 1개, 일냥오선중백랍 4개, 1냥오전 중황랍 4개, 1냥오전중양유랍 10개, 양유경랍 1개(여름 5냥, 겨울 10냘), 홍라탄 여름 10근, 겨울 20근, 흑탄 여름 50근, 겨울 60근. 명나라때 궁중에는 시탄(柴炭, 장작과 숯)을 관리하는 기구가 잇었다. 장소는 황성 서안문 밖 비스듬한 북쬭의 홍라창(紅籮廠)에 있었다. 궁중에서 쓰는 홍라탄은 역주(易州, 지금의 하북성 역현)일대의 산에서 벌채한 나무로 만들었다. 먼저 홍라창으로 운송한 다음, 크기에 맞추어 잘랐고, 길이는 약 1척이고 직경은 2,3촌으로 크기가 서로 달랐으며, 소원홍형조(小圓紅荊條)로 만든 바구니를 짜서 담았다. 그래서 '홍라탄'이라 불렀다. 규정에 따라 궁중의 각 처로 보내었다. 홍라탄은 만일 비를 맞으면, 화기가 너무 심해져서, 사람이 어리접고 혼미하며 구토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황자황녀들이 이에 중독되어 요절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일산화중독일 것이다. 고대인들은 그 이치를 잘 몰랐었다.

 

상재궁분(常在宮分)

 

매년: 은50냥, 대권팔사단 1필, 대권오사단 1필, 운단 1필, 의소단 1필, 남소단 1필, 춘주 1필, 궁주 1필, 사 1필, 능 1필, 방사 2필, 면화 3근.

 

매월: 소생구 5마리, 양고기 15판

 

매일: 돼지고기 5근, 묵은 갱미 1승 2홉, 백면 2근, 백당 2냥, 향유 3냥 5전, 두부 1근 8냥, 분과사 8냥, 첨장 6냥, 식초 2냥, 신선한 야채 6근, 가지 6개, 왕과 5개, 일냥오선 중황랍 2개, 일냥오전 중양유랍 1개, 흑탄 여름 10근, 겨울 20근.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후비는 각급별로 대우차이가 아주 컸다. 이것은 후비들이 죽어라 총애를 다투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황제만이 그녀들을 발탁해줄 수 있었기 때무이고, 자신을 임신하게 하고, 황자,황녀를 낳을 수 있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우의 차이는 궁분상의 차이만이 아니다. 각 급별로 배치하는 생활용품(鋪宮이라고 함), 가마, 복식등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넷째, 법도를 정하는 것을 보자. 내정의 위계질서는 명확했다. 언행거지는 본분을 준수해야 했다. 윗사람에게는 존경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예로 대했다. 본궁의 태감,궁녀가 아니면 마음대로 일을 시킬 수 없었다.

 

<흠정궁중현행칙례>에 따르면, 내정등위에 부모가 연로한 자는 1년 혹은 수개월만에 특별히 명을 받아 가족을 만날 수 있는 해주는 경우에는, 단지 친부모만이 입궁할 수 있었다. 외가를 위문하거나 명절에는 각궁의 수령태감이 본주의 명을 받들어 찾아갔다. 다만 내외의 일체 사정을 선전할 수 없었다. 각 궁의 소태감은 본궁액문으로 출입했고, 수령태감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본주의 방안에 오래 서서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이상의 4가지 중에서 후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 급별이었다. 비빈의 승진은 배분이나 경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첫째는 자녀를 낳는 것이고, 둘째는 황제가 좋아하는지 여부이다. 그래서 비빈들은 온갖 심기를 짜내고, 재능을 펼쳐서 황제의 총애와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비빈의 최대이익원은 황제의 총애이다. 왜냐하면 황제가 총애해주어야만 자녀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항제가 총애해야만 하사품을 많이 바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급별이 승진할 수 있고, 하사품을 많이 받을 수 있다. 일부다처제하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역대의 후궁은 모두 경심동백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후삼궁(后三宮)을 주체로 , 동육궁과 서육궁을 양익으로 한 제후(帝后) 생활구역에서 많은 후비, 태감, 궁녀들이 있지만 규칙은 단순하다: 한 사람이 육궁을 통치하고, 육궁은 한 사람을 받든다. 가정제의 조모인 흥헌후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입궁하면 인간세상의 즐거움은 없다." 이곳에서는 희비극이 게속하여 일어났다. 비록 후비들은 먹고 입는 것은 풍족했지만, 그녀들은 외롭게 밤을 보내야 했다.비록 비빈들은 짧은 청춘과 기끔이 있지만, 그녀들은 더욱 긴 눈물과 비애가 있다. 동서육궁은 바로 황제시대에 군주의 천당이지만, 더더욱 높은 담장 안의 비빈에게는 연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