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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무협소설에서 돈은 중요하지 않다.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왕로(王路)


이것은 필자의 지난 토요일 김용논검활동의 발언원고이다. 펑황(鳳凰)신문의 클라이언트와 예마(野馬)재경이 주관하여 육신뢰뢰(六神磊磊), 웅태행(熊太行)과 내가 함게 얘기를 나누었다.


주제는 김용소설에서 대협의 돈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였다. 나의 의견은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위소보(韋小寶, <녹정기>의 주인공)는 오배의 집을 몰수하여, 돈이라면 평생 쓸만큼 생겼다. 다만 위소보는 돈에 신경쓰지 않고 돈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러나 돈은 더욱 많아진다. 위소보와 상반된 사례는 풍제중(風際中)이다. 풍제중은 천지회(天地會)를 배신하고 관직을 얻어 돈을 벌려고 한다. 청나라조정은 별것아닌 관직을 주면서 그를 매수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가난뱅이로 지낸다.


위소보와 풍제중은 두 세계를 상징한다. 위소보는 무협세계의 사람이고, 풍제중은 현실세계의 사람이다. 무협세계에서 돈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게 만드는 동력은 무학상의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양봉, 주백통이 그렇다; 혹은 부친을 죽인 복수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봉, 석파천이 그렇다; 혹은 친구와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연객, 강남칠괴가 그렇다. 강남칠괴는 구처기와 한 약속때문에, 강남에서 막북으로 가서 18년이나 생활하고 형제 1명의 목숨까지 잃는다. 한 사람이 일생에서 몇 번의 18년이 있을까? 무협세계에서는 하나의 약속이 생활의 동력이 될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현실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의 생활을 움직이는 동력은 돈을 버는 것이다. 비록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최종목표는 아니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이다. 한 사람이 먼저 돈을 벌어야 자신과 처자식을 먹여살릴 수 있고, 나아가 인생의 의미를 실현할 수 있다. 다만 보통사람들은 자주 이 첫걸음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한 사람이 매 7일중 오5일을 돈벌기 위하여 살아간다. 이렇게 한 평생이 지나고서도 돈이 아직 부족하다고 여긴다.


무협소설에서는 돈버는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무협소설의 사람은 모두 수예인(手藝人)이다. 아무렇게나 불의의 재물을 빼앗아서 8년 10년을 먹고 산다. 김용은 말할 것도 없고, 협의소설 <수호전>에도 무송은 맹주로 유배를 가는데 몸에 지닌 돈은 한 푼도 없다. 옥졸에게 뇌물로 줄 돈조차 없다. 시은은 그래도 그에게 먹고 마실 것을 충분히 사준다. 왜냐하면 무송의 재주는 몸에 있기 때문이다. 싸울 줄 아는 것은 하나의 수예(手藝)이다. 수예는 몸에 지니고 있고 언제든지 현금화할 수 있다. 수예인에 있어서 돈은 영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용이 막 곽정을 보았을 때, 거지로 분장하고 있었다. 곽정은 그에게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한다. 점소이는 마지못해서 그릇과 접시를 가져다 준다. 황용은 좋은 요리를 먹겠다고 하고, 곽정은 점소이에게 빨리 소고기 1근과 양의 간 반근을 썰라고 한다. 황용은 말한다. 먼저 고기를 먹지 않고, 먼저 4개의 건과, 4개의 신선한 과일, 두개의 염산(鹽酸), 4개의 밀전(蜜餞)을 먹겠다고 한다. 점소이는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무슨 과자와 밀전을 먹을 것인지 물어본다. 황용은 말한다. 건과 4개는 여지, 계원, 증조, 은행이고, 밀전 4개는 매괴금귤, 향약포도, 당상도조, 이육호랑군이라고. 점소이는 그제서야 그녀를 다시 본다. 황용이 술안주를 시킬 때 녹두양강요, 원앙전우근, 국화토사, 폭장퇴같은 것을 시키자, 점소이는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런 것을 얘기할 수 있다면 절대로 거지 무리가 아닌 것이다.


김용의 고명한 점은 어디에 있는가? 고명한 점은 바로 소설을 쓰는 것이 그의 인생에서 주요 추구하는 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무협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무협세계의 사람이었다. 현실세계의 사람이 어찌 무협소설을 쓰겠는가? 오늘날 SF소설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집안에 쳐박혀서 매일 이만자씩 쓰면서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곽정, 황용의 이런 요리이야기를 쓸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단예는 남송시대 대리국의 태자이다. 나중에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이다. 우리가 이 사람을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시대 대리국의 풍물인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태호에서 중년과부 왕부인을 만났다고 치자. 소설의 내재적인 논리대로라면 분명히 모순갈등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런 갈등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뻔한 방법이라면, 장생과 최앵앵과 마찬가지로 단예는 그녀의 딸을 좋아하여 계속 쫓아다니고, 왕부인은 동의하지 않고, 다리를 분질러버리겠다고 하고...이런 것은 너무나 뻔한 스토리이다.


김용의 전개는 차화(茶花)였다. 왕부인은 차화를 기르기 좋아한다. 그러나 그녀는 잘 모르고, 단예는 잘안다. 그녀가 심은 것은 낙척수재라고 말한다. 한 화분에 18개의 꽃이 피면서, 꽃마다 색깔이 다르고, 모두 순색이면 십팔학사라고 부른다; 13개의 꽃이면 십삼태보라고 부른다. 그리고 팔선과해도 있고, 칠선녀도 있고, 풍진삼협도 있따. 풍진삼협가운에 어느 것이 이정이고 어느 것이 규명객이며, 어느 것이 홍불녀인가? 모두 내력이 있다. 흰바탕에 붉은 점이 있는 것은 홍장소과(紅粧素裹)이다. 녹운(綠暈)과 홍조(紅條)가 있는 것은 조파미인검이라고 한다. 녹운은 앵무새의 털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문을 걸어닫고 쓴다면, 이런 것을 써낼 수 있을까? 자주 네티즌들이 그들이 쓴 소설을 봐달라고 한다. 많은 경우 천편일률적인 캠퍼스이야기이고, 이름마저도 천편일률이다. 나와 어느 형, 대머리...나는 자주 그들에게 글을 쓰지 말라고 권한다. 특히 소설은 쓰지 말라고 권한다. 왜냐하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떤 SF소설을 쓰는 사람은 서른살 때까지 주마덴을 벗어나지 않았다. 소학교도 주마덴에서 다니고, 대학도 주마덴에서 다녔다.


김용소설에는 방파구분이 있다. 개방, 소림, 무당, 공동, 모두 내력이 있다. 소림은 하남에, 무당은 호북에 있다. SF소설의 작가는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이런 것들을 모호하게 처리한다. 모든 방파는 일률적으로 무슨 족이라고 부른다: 낭족(狼族), 혼족(魂族), 인족(人族), 수족(獸族). 그리고 매 족의 구성원들은 개성이 비슷하다. 마치 원소주기표와 같이. 탄소족의 원는 탄소족의 특색을 지니고, 철족의 원소는 철족의 특색을 지닌다.


김용소실에서 방파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중이 되고 싶으면 소림으로 가고, 머리카락을 남기고 싶으면 환속한다. 그러나 SF소설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슨 족의 사람이다. 죽어도 그 족의 귀신이다. 그것은 혈통으로 나눈다. 그래서 원시사회, 씨족공동사회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많은 SF소설은 너무 엉성하다. 이런 엉성함은 작자의 생활경력과 학식이 빈천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인기에 영향이 없고, 읽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한다: 우리는 오늘날 생활범위가 아주 좁아졌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생활의 가능성은 이전보다 너무나 많아졌다. 다만 실제 살아가는 생활은 이전보다 좁아졌다. 나의 부친은 항상 말한다. 그가 나같은 나이였을 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고. 다만 그들 세대의 사람들은 서른이 되면 결혼하여 아기를 낳으면 다 알게 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마흔까지도 아직 학생같을 것이다.


나의 한 동료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결혼했다.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향에서 자신은 어른같다고, 그러나 북경에서는 어린아이같다고. 고향에서 장인장모를 만나서 물건사는 법을 배우고, 처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 처의 둘째외숙, 사촌, 이모부, 사촌동생, 사촌형을 모두 응대해야 했고,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편안하게 느끼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이모의 아들은 집을 짓기 위해 돈을 빌렸는데, 건자재를 사는데 같이가자고 했다. 이런 일이 바로 단련이다. 다만 일단 북경에 돌아오면, 생활은 졸지에 간단해진다. 비록 아는 사람은 많지만, 관계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친구사이의 권익의 선이 분명히 그어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는 그저 그런 관계이다.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한끼라도 하려면 자신이 그릇을 씻고 담고 할 필요가 없다. 그냥 호텔에 예약만 잡으면 된다.


나의 부친대의 사람들은 등을 갈 줄도 알고, 라디오를 수리할 줄도 알며, TV를 고칠 줄도 알았고, 결혼 장례등의 일을 스스로 처리할 줄 알았다. 나는 못한다. 현재 못한다. 오십이 되어도 아마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활에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기가 막히면 전화를 걸어서 관리실에서 와서 수리하게 하면 된다. 이런 생활하에서 사람은 점점 부속품처럼 되어 간다.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 1872-1945)는 <놀이인간(Homo Ludens)>라는 책을 썼다. 그는 한 사람이 진정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진실한 사람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놀이를 할 때, 사람은 생활의 여러가지 속박과 구속을 잊을 수 있으며 최대한도로 창조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다만 현실생활에서 창조력을 발휘할 공간은 너무나 좁다.


어떤 사람은 여행(한자로 旅遊))이 경력을 풍부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고대에 '여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집밖을 나서서 장사를 하면 '상(商)'이라 하고, 장사를 하지 않으면 '여(旅)'라고 한다. 우리같은 북표(北漂)는 바로 '여'이다. 미국까지 가면 '여미(旅美)'이다. 공자의 점괘에 <여(旅)>가 나오면 아주 기분좋지 않아 했다. 이것은 평생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遊)'는 오리가 물에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모가 계시면 멀리 유(遊)해서는 안된다. 유(遊)할 때는 반드시 어디에 가는지를 알려야 한다" 이 '유'는 오늘날의 '랑(浪)'과 같다. '랑'이라고 하면 약간은 욕하는 것같다. 리장으로 유랑가고, 상서로 유랑가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두목의 시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감한왕손낭유거(堪恨王孫浪遊去), 낙영낭자시귀래(落英狼藉始歸來)"


오늘날의 여행은 어느 한 곳에 가면 호텔을 예약하고, 입장권을 사고, 관광지를 돌아보고, 쇼핑을 하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다. 삼일, 혹은 칠일. 풍물인정은 전혀 모른다. <사조영웅전>의 여행은 곽정과 황용이 소홍마를 타고, 남으로 간다. 목표도 없다. 여행가이드북도 없다. 좋은 산, 좋은 물을 만나면반달을 머무르며 수영을 배운다. 한 마을에 도착해서 먹을 것이 없으면, 황용이 남의 집 닭을 훔쳐오고, 털도 뽑지 않고 진흙을 발라서 굽는다. 그리고 진흙을 벗겨내면 털과 함께 떨어져 나간다. 이때 홍칠공을 만나서, 3사람이 함께 여행한다. 그들은 여행파트너인 관계이다. 그들이 하나의 마을에 도착하고 그다지 볼만한 관광지가 없으면, 황용이 가서 요리재료를 사와서 친히 요리를 한다. 한달여를 머무른다. 하는 요리는 계속 달라진다. 오늘날의 여행에 아무도 시장에서 요리거리를 사지 않는다. 호텔에서 스스로 요리를 해먹을 수도 없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한 도시를 갔는데, 구경을 하지 않고 시장에서 요리거리나 사다니. 그렇게 하면 정신병자취급을 받기 딱 좋다. 다만 이런 관념은 생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린 것이다. 인생은 신속하게 돈을 벌어서 신속하게 돈을 쓰는 것으로 바뀐다. 마치 임무를 완성하는 것처럼 생활을 완성하는 것이다.


공자의 시대는 사람들에게 <시경>을 읽으라고 가르쳤다. 시는 흥관군원(興觀群怨)할 수 있고, 초목조수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이야 말로 생활에서 중요한 것이다. 김용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있다. 그는 대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검을 들고 바깥나들이를 다녔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그래서 그의 붓아래에는 화단금족(花團錦簇)이 있는 것이다. 만일 나에게 화원을 묘사하여, 분위기를 내라고 하면 나는 묘사할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풀의 이름은 다섯 가지도 넘지 못한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초목조수의 이름을 많이 알지 못한다. 새와 짐승은 없고, 풀과 나무는 어른들도 모른다. 오늘날의 아이들이 잘 하는 것은 자동차로고를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아주 많은 아이들을 보아왔는데, 할머니나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가면서, 이것은 아우디, 이것은 벤츠라고 말한다. 어른들은 아이가 차를 좋아한다고 여긴다. 마치 모든 어린아이가 다 자동차를 좋아하는 것같다. 기실 어린아이가 자동차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는 만사만물에 호기심이 있고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런 호기심을 다른 곳에 발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동차로고를 인식하는데 쓰는 것이다. 과거에 아이들은 이것은 괴화(槐花), 이것은 유화(榴花), 이것은 작약, 이것은 금규(錦葵)라고 알았다. 나는 한 아이를 보았는데, 베이징의 지하철노선도를 외웠다. 다른 사람이 어디에서 어디까지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면 모든 역의 이름을 얘기한다. 이 아이는 아주 총명하다. 그러나 그가 일단 어른이 되면 이런 지식취미는 재미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런 심미감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꽃의 이름, 나무의 이름이었다면, 풍토인정, 시사가부에 관한 것이었다면 거기에서 얻은 심미경험이 평생을 함께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기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한 사람이 잘 생활하려면, 돈이 있고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심미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다. 세계의 여러가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다. 조설근, 김용은 모두 심미대가이다. 나는 김용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이야기를 읽고, 두번째 읽을 때는 의경(意境)을 느낀다. 동해에 도화가 가득 핀 섬에서 도화꽃이 떨어지며 신검은 춤을 춘다; 파란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고, 옥피리의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상당히 아름다운 광경이다.


다시 곽정, 황용이 태호 귀운장에서 밤에 바람소리를 듣고, 담장을 뛰어넘어 기문둔갑의 촌길을 뚫고 호숫가로 간다. 태호에는 마침 금나라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협사는 그들의 배를 빼앗기로 밀모한다. 곽정, 황용은 몸을 날려 뱃머리로 뛰어오른다. 배는 점점 태호의 중간으로 간다. 사방을 돌아봐도 모두 까맣다. 오로지 먼 곳에 물고기배의 불만 보인다. 선창에서는 집안과 나라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한 쌍의 좋은 나이의 협객과 가인은 이 뱃머리에서 이 태호의 야경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경심동백(驚心動魄)이면서, 시의앙연(詩意盎然)하다. 두공부(杜工部)의 시와 같이: "야경운구흑(野徑雲俱黑), 강선화촉명(江船火燭明)" 이런 의경은 여행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


나는 뉴스 하나를 들었다. 가장은 국유기업의 사장인데, 아들이 나중에 서방상류사회에 진입하기를 바랬다. 그의 서방상류사회에 대한 이해는 모든 사람이 아이스하키를 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어려서부터 아이스하키를 배우게 한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무거운 책가방을 매고 아이스하키훈련장에 가서 10시까지 훈련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숙제를 한다. 이런 가장은 멍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의 교육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천박하다. 그가 아이에게 많은 정력을 들여서 이것을 하게 할 때, 아이는 세계의 천자백태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김용이 어렸을 때 부친이 그를 방안에 가두어놓고 글쓰기훈련만 시켰더라면, 그는 그런 작품을 절대 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용은 곽정이 황용을 업고 산으로 올라가서 등을 하나 구할 때, 길에서 어초경독(漁樵耕讀, 어부, 나뭇꾼, 농삿꾼, 선비)를 만나는데 중간에 와와어, 대련, 난제를 정말 생동감있게 썼다. 마치 한 권의 박물지같다. 이를 보면 김용은 생활에 열정과 흥취가 충만했음을 알 수 있다. 김용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생활의 흥취와 열정을 기르는 것이다. 한 사람이 생활을 좋아해야만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김용은 어렸을 때 무술을 익히기를 좋아했고 중년에는 희극을 보고, 바둑을 두기를 좋아했다. 그의 산문집 <심타천백도(尋他千百度)>에서는 경극, 바득, 호머의 서사시, 세익스피어등을 논한다. 그는 상당히 높은 심미적인 품위를 지니고 있다. 그후에 상당히 통속적이고 읽기 쉬운 소설을 썼다. 그래서 재미있게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저 글을 다듬고, 미스테리를 만들고, 음모를 배치하는데 익숙한 사람을 비유하자면 요리를 연구하는 사람이 요리재료를 보지 않은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글쓰는 것을 얘기하면서 한 가지 사례를 말하고자 한다. 단예가 막 만타산장에 올랐을 때, 아주, 아벽과 소환수는 손에 손을 잡고 꽃밭에 들어간다. 단예만 남겨둔다. 이때 김용은 아주 절묘한 말을 적었다. 


"그는 둑으로 올라사서,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큰 나무의 뒤에서 해수(解手)를 한다."


여기서 절묘한 것은 '해수(오줌은 누다)'이다. 이것은 "협상삼호(頰上三毫)"이다. '해수'를 추가함으로써 이야기가 입체적이 된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허구의 외각에서 자라는 진실한 정감과 이야기이다. 단예는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나 '해수'는 진실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차를 타거나 배를 탈 때 오줌이 마려운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삼호'를 추가함으로써 이야기는 친절하고 생동감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김용이 어찌 이렇게 상세히 생각해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단예가 오줌이 마려울 것이라는 것까지 생각해내다니.


나의 추측은 김용이 앞에 글을 쓰면서 너무 긴장하여 화장실을 못갔던 것같다. 여기까지 써서 일단락짓고보니 오줌이 마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가고, 돌아온 후에 소설의 인물도 아마 오줌이 마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단예로 하여금 큰 나무의 뒤에서 오줌을 누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세부적인 점에서 생활은 소설을 쓰는 자양분이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이를 유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에 신경을 쓰면 된다. 생활은 아마도 무미건조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