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의 '학력'

중은우시 2015. 1. 14. 00:50

글: 유계흥(劉繼興)


요즘은 가짜가 횡행한다. 학력은 더욱 그러하다. 특히 일부 해외에서의 학력은 정보불균형으로 더더욱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워 중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클라이든대학"과같이 세상을 속이는 사기꾼이 적지 않다. 외국유학으로 얻은 학력은 근대에 들어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고, 중국에서 겨우 100여년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근대 중국의 대인물들도 학력위조가 있었다. 그는 바로 풍운을 질타한 불가일세의 장개석(蔣介石)이다.


가장 먼저 장개석의 가짜학력을 폭로한 사람은 이종인(李宗仁)이다. 이종인의 구술을 당덕강이 쓴 <이종인회고록>에 따르면, 이런 이종인의 회고가 있다: "장선생의 원래 이름은 지청(志淸)이다. 약관의 나이로 보정육군속성학당에 입학했으나, 학당의 규칙을 지키지 않아서 퇴학당한다. 나중에 일본 육군진무학교에 들어가서 군사교육정도의 훈련을 받았다. 귀국후에는 그가 일본사관학교 제6기생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북경에 오니, 이전에 그의 부관장(副官長)을 지낸 진명각(陳銘閣, 하남인)을 시켜서 미시후통 남병마사로 보내어 사관학교동창회책임자 유종기(劉宗紀, 일본사관학교6기, 일찌기 손전방이 참모장을 지냄)에게 오만원을 출연하여 동창회 경비로 삼게 했다. 그때 일부 사람들 4기의 장작빈, 뇌수영, 6기의 양문개, 노향정등은 모두 유종기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 풍운을 질타하는 대단한 동창이 나타난 것이냐고. 유종기가 말했다. 거액을 기부하는데 좋은 거 아니냐. 뭐 굳이 따질 필요가 있느냐고." 


이종인은 장개석의 정치적 숙적이다. 그의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민국의 역사를 깊이 연구한 이오(李敖)는 그의 <장개석평전>에서 장개석의 가짜학력에 대하여 사람들이 충분히 믿을만한 고증을 했고, 이를 통해서 이종인의 주장이 정확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오는 <장개석평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개석은 육군속성학당의 62명 학생과 함께 1908년의 봄날, 동북의 육군부로 가서 집합한다. 대련에서 윤선을 타고 고베로 가고, 다시 도쿄로 가고, 진무학교에 들어간다. 진무학교가 무슨 학교인가? 이는 경자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난 후, 중국통치자들은 머리가 깨어져서 유학을 보낸다. 청나라 광서27년(1901년)부터 33년(1907년)까지 몇년간, 중국의 일본유학생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나중에 계속 늘어난다. 그러나 늘어나는 건 늘어나는 것이고, 자질이 큰 문제였다. 왜냐하면 일본의 정규학교과정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을 위하여 보충수업식의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런 필요때문이다. 이런 학교는 아주 많았다. 법정분야에서는 법정대학이 있고; 보통학습과 사범분야에는 굉문학원이 있었고; 육군방면에서는 성성학교(成城學校), 진무학교가 있었다.


진무학교 이전에 중국유학생이 육군을 배우려면, 모두 먼저 성성학교에 들어갔다. 1903년(광서29년) 성성학교는 중국학생을 더 이상 받지 않고, 진무학교가 대신하여 중국유학생을 받는다. 진무학교는 이 해 7월에 설립된다. 장소는 동경 우구(牛區) 하전정(河田町)(현재의 동경여자의과대학 소재지)였다. 훈련기간은 3년이다. 졸업후에는 일본 국내의 각 연대로 실습을 간다. 그래서, 이 학교는 여동방(黎東方)등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사관학교의 예비학교가 아니다. 그저 중국학생들이 군사를 배우도록 해주는 예비학교이고, 사관학교와는 무관하다. 장개석은 진무학교에서 1907년(광서33년)에서 1909년(선통원년)까지였고 교육받은 기간은 3년이 되지 않는다.


1904년(광서30년) 음력 사월의 연병처 <육군학생분반유학장정>을 보면, 당시 선발되는 학생은 "나이 18살이상 22살이하"로 되어 있다. 장개석은 진무학교에 들어갈 때 이미 21살이었다. 나이가 이미 적지 않았다. 진무학교에셔 편찬한 <진무학교연혁지>를 보면, 3년제로 바뀐 후, 수업총시간수는 아래와 같다: 진무학교창립시기의 <과정개요>(실등혜수저 <중국인일본유학사>)를 보면 3년제의 과정은 일본어문방면에서 1212시간이 늘었고, 3년제로 개정되기 전과 비교하여 반나절로 바꾸었다. 중점은 일본어문훈련을 강화하는 것뿐이다. 종합적으로 관찰하면, 3년기간동안 군사과정외에, 장개석이 배운 것은 오늘날 고등학생의 과목보다 훨씬 못하다. 심지어 중학생보다 낮다(과목에는 산술이 있는데, 중학생 수준이다). 이를 보면 그의 교육정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저 중고등학생수준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장개석이 입교한 것은 1908년이고, 말로는 3년제이지만 흠정연표로 보면, 그의 수업연한은 의심이 간다. 왜냐하면 분명히 3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황복경의 <청말유일학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무비학생이 예비교육을 받은 기간은 학교,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르다. 성성학교시대는 개략 16개월이었고, 진무학교는 여러번 변경되었다. 창립초기에는 15개월이고, 1905년 10월부터 18개월로 바뀌고, 다음 해에는 다시 2년으로 바뀌고, 바로 3년으로 바뀌고 이 학교가 폐지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며 다시 바뀌지 않았다." 장개석은 '바로 3년으로 바뀐' 시기의 3년제이다. 그래서 비록 3년이라고 하지만 성분이 부족하다.


장개석은 당시에 장지청이라고 불렸다. 1910년 겨울, 진무학교를 졸업하는데 당시 나이 23살이다. 바로 북해도 신사현 고전진의 13야포여대로 가서 실습한다. 이때 그의 키는 169.4센티미터였고, 체중은 59.2킬로그램이었다.(고전시사 기재, <장총통비록>제2책 2-3페이지) 실습생은 2등병이고 생활이 아주 힘들었다. 군사훈련은 주로 말을 먹이는 것이고, 말을 안마하는 것이었다. 엄동설한에 말의 혈액유통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진정 군사과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모사성의 <민국십오년이전의 장개석선생>이라는 책에 따르면, 13연대의 사단장 장강외사(長岡外史)와 연대장 비송관오(飛松寬吾)는 이등병 장지청이 "아주 우대했다"고 하였다.(제1책 제3편 14페이지). 다만 사실상 사단장은 장개석에 대하여 전혀 인상이 남아 있지 않았다. 1927년장개석이 일본으로 사진을 보내면서, "불부사교(不負師敎)"라는 글을 써서 보낸 것을 받고서 비로소 장강은 그런 이등병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판부호랑 <장군장강외사> 28페이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우대'할 수 있겠는가.


단, 1928년 국민정부 성립후, 장개석 주석의 공식이력서에는 '일본사관학교졸업'이라는 최고학력이 분명히 기재되어 있었다(민국18년 <중국국민당연감>) 1937년 5월에 출판된 <장개석전집>의 <전략(傳略)>에도 확연하게 <처음에 일본진무학당에 입학하고, 일본사관학교로 편입헤 들어갔다"는 말이 나온다.(위책, 정문 1페이지). 그후 자연스럽게 선전이 이루어진다. 공사각계에서는 이를 사실로 여기게 된다. 등문의가 편저한 <장주석>에서는 더욱 생생하게 적었다: "일본에 도착헤서 처음에는 도쿄의 사관예비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은 중국정부가 전문적으로 중국유학생을 사관학교에 입학시기는데 준비하기 위하여 설입한 것이다 나중에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사관학교에 있을 때 공부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커서, 모든 놀이를 사절하고, 무형중에 일반적인 좋은 집에서 편하게 자라거나, 할 일없이 놀러 온 일본유학동창들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를 오만하다고 여긴다. 이것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오만한 것이 아니라 솔직한 것이다."


등문의(鄧文儀)는 투천환일(偸天換日)하여 이름도 없는 진무학교를 대명이 자자한 일본사관학교로 바꿔 버렸다. 당연히 적지 않은 중국학생은 진무학교를 졸업하고 실습을 마친 후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사관학교4기의 장작빈, 6기의 손전방, 염석산, 제10기의 장군(張群)등이 그들이다. 다만 장개석은 사관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 더더구나 졸업은 말도 안된다. 소화15년 십월 흥아원이 출판한 <일본유학중화민국인명조>에는 제4기부터 제10기까지 매 기의 졸업생명단이 있는데 장개석의 이름은 없다. 제11기이후은 하응흠, 곡정륜, 하요조등이 있다. 명단은 이미 '후배'들이다. 당연히 거기에는 장개석이 없다. 여기서 덧붙일 것은 위의 각기중 장(蔣)씨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4명뿐이다. 그중 제4기의 장작빈은 호북 사람이고, 장융분은 호남 사람이다; 제5기의 장국경은 호남 사람이다; 제6기의 장음증은 호북 사람이다. 절강사람은 없다. 자연히 장개석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도 없다. 장개석의 초기 학명은 장지청이고, 자연히 다른 학명이 있을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사관학교 각기 명단에 장개석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미 증거는 확실하다.


이오는 날카로운 글솜씨와 상세한 고증을 통하여 장개석의 가짜학력의 진상을 밝혀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세상사람들을 속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기실 영웅은 출신을 따지지 않는 법이다. 장개석은 일찌기 혁명경력이 있고 능력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국민당내에서 특별히 두드러지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학력같은 것으로 받쳐주어야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역시 본색이 중요하다. 모택동을 보라. 중전(中專) 학력을 속인 적이 없고, 학력조작을 한 적도 없다. 그래도 천군만마를 지휘하며 천하를 종횡했다. 자신의 학력을 대하는 것을 보더라도 모택동과 장개석의 고하를 알 수 있다. 전자는 아주 자신감 있었고, 후자는 스스로를 비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