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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양영태(楊永泰): 장개석의 제일모사

by 중은우시 2015. 2. 20.

글: 유계흥(劉繼興)

 

 

 

 

역사상 일종의 지식엘리트들은 "문객(門客)", "군사(軍師)", "막료(幕僚)"등의 신분으로 자신의 '주인', '주공'을 위하여 계책을 내고, 근심거리와 어려움을 해결해주는데, 이들을 "모사(謀士)"라고 불렀다. 고대의 저명한 모사로는 범증, 진평, 곽가, 가후(賈詡)등이 있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지모가 출중하고, 기계묘책(奇計妙策)을 많이 내놓았다. 장개석의 곁에도 국민당정계에서 '제일모사"라고 불리던 사람이 있었다. 장개석의 수석지낭(首席智囊)"으로 이름은 양영태이다.

 

1928년, 장개석이 일찌감치 결의형제를 맺은 당시 국민정부 외교부장 황부(黃郛)는 장개석에게 지식이 뛰어난 양영태를 추천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나중에 송호경비사령관 웅식휘(熊式輝)는 다시 양영태의 '삭번(削藩)' 묘계를 장개석에게 올린다. 이때, 장개석은 마침 각지에서 병력을 지니고 있는 군벌의 세력이 커져서 고민하고 있었다. 양영태의 헌책은 설중송탄과 같았다. 장개석에 있어서는 오랜 가뭄끝애 내린 단비와 같았다.

 

장개석과의 첫번째 만남에서, 양영태의 지모는 장개석을 크게 탄복시킨다. 그는 장개석을 위하여 현대판의 <융중대>를 내놓는다. 장개석이 당금천하의 대사에 관한 견해를 묻자, 양영태는 미리 생각해두었다는 것이 시원시원하게 설명하며 오랫동안 생각해둔 '삭번책'을 말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풍옥상의 제2집단군을 와해시키고, 정치적으로 염석산의 제3집단군을 해결하며, 군사적으로 이종인의 제4집단군을 해결하며, 외교방법으로 장학량의 동북군을 상대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장개석은 마치 성호관정(醒醐灌頂)처럼 머리가 맑게 깨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풍옥상이 점령하고 있던 하남, 섬서, 감숙, 청해등의 성은 모두 척박한 땅이다. 풍옥상의 방대한 부대를 먹여살리는데는 힘이 들었다. 풍옥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돈이 있어야 군수를 해결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의 수하의 적지 않은 장수들은 병력을 이끌고 전투하는 것이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고 돈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그후 장개석은 돈을 이들에게 건네고, 관직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풍옥상의 부하들을 매수한다. 예를 들어, 석우삼(石友三), 한복구(韓復榘)가 그들이다. 여기에 다시 무력으로 위협하여, 마침내 풍옥상의 집단은 와해되고 만다. 중원대전후, 고뇌에 빠진 풍옥상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서북군은 뭐든지 다 좋았는데, 하나는 돈을 못이겼고, 둘은 여자를 못이겼다.

 

계산에 밝은 염석산은 스스로 자신의 역량이 장개석집단에 대항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염석산은 정력을 산서경영에 쏟는다. 한 마음으로 산서를 그의 '독립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양영태는 이 점을 알아보았고, 염석산에 대하여는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하기를 제안한 것이다.

 

실력을 갖춘 몇몇 거대한 지방군벌중에서 계계(桂係)는 일찌감치 국민당에 귀부한다. 북벌때 계계는 제7군으로 편제되고 장개석 산하의 주력군이었다. 다만 그들은 장개석이 급양분야에서 제1군(황포계)에 치우치는데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계계는 군사실력이 계속 증가하면서, 야심이 커져갔다. 1927년 8월, 장개석이 제1차 하야를 하는데, 이는 계계의 압박과 관련이 있다. 양영태는 계계에 대하녀는 반드시 군사적으로 철저히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후, 1949년까지 20여년동안, 장개석과 계계의 갈등은 어떤 때는 완화되고 어떤 때는 긴장되었다. 지방실력파중에서 장개석에게 타격이 가장 크고, 투쟁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사집단이 된다. 장개석과 계계의 갈등은 공산당이 승리할 때까지 이어진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패주한 후에야 끝이 난다. 이를 보면 당시 양영태의 문제에 대한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친 장작림의 의발을 이어받은 장학량은 동북의 옥토에 웅거하고 있어, 장개석의 남경정권의 핵심통치구역에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서히 도모해도 되었다. 그래서 양영태는 외교수단을 사용할 것을 건의한다. 이를 통하여 우환을 사라지게만들면 되는 것이다.

 

"각개격파"를 하되 효과적인 '삭번책'을 내놓은 후, 양영태는 장개석에게 원교근공, 조호이산, 차도살인, 부저추신등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장개석이 그후에 '삭번책' 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양영태는 중시받는다.

 

1931년, 장개석은 양영태를 파격적으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비서장에 임명한다. 양영태가 제출한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는 장개석이 채택한 이 시기의 집정방침이었다. 장개석의 '공농홍군'포위포벌에 공로가 있어, 양영태는 다시 국민당 제5기 후보중앙위원에 당선된다.

 

이 시기에 명목상으로 전국통일을 완성한 장개석은 자신의 체제내의 '삭번'을 하면서, 공산당을 상대했다. 그러다보니 업무에 두서가 없었다. 양영태는 적시에 장개석에게 건의한다. 시종실을 두어, 공문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장개석이 비준한다. 시종실이 건립된 후, 장개석은 일처리가 아주 편해진다. 이후 전국각지에서 오는 보고서, 서신, 건의, 청시(請示)등 각종 공문은 모두 시종실로 모였다. 시종실이 다시 장개석에게 보내어 결재받는다. 그러나 문건이 너무 많아서, 장개석의 시간을 많이 빼앗게 된다. 양영태는 이 모습을 보고는 다시 아이디어를 낸다: 먼저 받은 문건전보를 정리할 후 문건의 요점을 정리하고, 처리의견을 제출하며 일종의 공문보고양식을 만들어낸다. 그 후에 경중완급을 나누어 장개석에게 보내어 결재받는다. 이 방법은 과연 효과가 있었고, 장개석의 업무효율은 크게 제고된다.

 

시종실의 권력은 갈수록 커졌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비서장인 양영태는 장개석의 수석군기대신이 된다. 많은 군정요원들이 장개석을 만나려면, 양영태를 거쳐야 했다. 이 시기는 양영태등을 핵심으로 하는 국민당 정학계(政學係)가 대거 팽창한 단계이다. 봉강대리직급의 관료들 중에서 정학계가 거의 3분의 1을 점한다. 당시 "성부주석(省府主席)은 열중의 아홉, 행영주임(行營主任)은 다섯중 셋"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정학계는 정부를 장악했을 뿐아니라, 진과부, 진입부형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CC계로부터 당무대권도 배앗아 온다. 이렇게 하여 양자간의 갈등은 격화되고, 투쟁은 지속된다.

 

호한민(胡漢民)등 국민당원로도 양영태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CC계, 황포계와 연합하여 양영태 및 그의 조종하에 권세가 커진 정학계를 공격한다. 장개석은 각파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영태의 직무를 조정하여 공격을 피하게 할 생각을 가진다. 1935년 12월 17일, 장군(張群)은 외교부 부장이 되고, 장개석은 양영태에게 호북성정부주석을 맡게 한다. 다음해 1월에는 성보안사령관을 겸직하게 한다.

 

누구도 생각지 못하게, 그후 1년도 되지 않아, 양영태는 목숨을 잃는다. 1936년 10월 25일 오후, 양영태는 한구 강한관 성정부전용부두에서 암살당한다. 도대체 누가 양영태를 암살했을까? 원래 애국청년의 자발조직인 '중화청년항일서간단(中華靑年抗日鋤奸團)'이 한 일이다.

 

모두 알다시피, 정학계는 친일적이다. '양외필선안내'는 바로 양영태가 내놓은 방침이다. 그래서 양영태는 '중화청년항일서간단'의 암살대상이 된 것이다. 양영태가 장개석의 곁에 있을 때는 경비가 삼엄해서 접근할 수 없었지만, 장개석을 떠나서 지방으로 오게 되니 그들은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암살임무를 집행한 사람은 진기초(陳夔超와 공백주(龔柏舟)였다. 도망과정에서 진기초는 돼지를 잡는 백정에게 허리를 붙잡히고, 공백주는 남경까지 도망친 후에 붙잡힌다. 진유광(陳有光)은 나중에 귀주의 산으로 도망쳐 숨는다. 진기초와 공백주는 사형판결을 받는다. 집행하기 전에, 일본비행기가 무한대공습을 한다. 중경으로 가는 도중에 공백주는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구하고, 진기초는 중경까지 압송된 후 총살당한다.

 

양영태가 암살된 후, 장개석은 그를 그리워했다. 일찌기 시종실의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양영태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힘을 많이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같은 류의 말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장개석이 양영태를 잃은 것은 조조가 곽가를 잃은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