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장개석)

장개석은 어떻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었는가?

중은우시 2013. 12. 21. 18:44

글: 녕녕(寧寧)

 

 

 

상해로 물러난 손중산은 냉정하게 반성하며 생각을 거듭한다.

손중산은 이 때 북대의 저명한 교수이자 중국공산당 북방지구 지도자인 이대쇠를 만난다. 그는 손중산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찾아왔다. 중국지부에서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보낸 지령을 받았는데, 중국공산당원은 개인신분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대쇠가 찾아온 것은 패배한지 얼마되지 않은 손중산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그는 러시아혁명에서 경험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소련이 도움을 받는 것이다.

 

오랫동안 손중산은 수중에 군대가 없었다. 혁명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남방과 북방 양파의 군벌을 도발하며 하루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더욱 한스러운 점은, 남방이건 북방이건 이들 군벌은 모두 사람과 총을 가지고 있으므로 손중산을 무시했고 그를 마음대로 부르고 쫓아버리곤 했다. 그리하여 그는 화가 날대로 나 있는 상태였다.

이대쇠가 온 뜻을 알고는 손중산은 흥분한다. 친히 진독수, 이대쇠를 국민당에 가입시킨다.

공산당의 도래는 차가운 가을에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격이었다. 손중산의 희망은 새로 불씨를 살리고, 금방 사업의 봄날을 맞이한다.

 

1922년 10월 12일, 이미 복주까지 치고 올라간 북벌군은 허숭지(許崇智)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장개석을 참모장으로 하여 동로토적군을 구성한다. 서로토적군은 진(운남), 계(귀주), 월(광동)의 연합군으로 구성되었다. 동서양로는 연합하여 광주의 진형명(陳炯明) 부대를 공격한다.

1923년 1월 16일, 진형명은 연합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광주를 물러나서 고향인 혜주로 도망친다.

'반역' 진형명을 쫓아낸 후, 손중산은 광주로 돌아와서, 대원수부를 재건하고, 장개석을 참모장에 임명한다.

 

1924년 1월 20일,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국립고등사범학교 예당에서 융중하게 개최된다. 손중산의 국민당개조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국민당 "1대"는 "연아(聯俄), 연공(聯共), 부조공농(扶助工農)"을 국민당 3대정책으로 확립한다. 공산당원이 개인명의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한다. 심지어 요직을 맡는다. 손중산은 이대쇠를 "1대"에 출석하도록 초청했을 뿐아니라, 친히 그를 대회주석단 5명의 구성원중 1명으로 지명한다. 그리고 순조롭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당선된다.

 

이때부터, 손중산의 천지는 광활해진다. 그가 소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바램도 수도거성(水到渠成)되었다. 손문이 실패에서 얻은 교훈의 하나는 자신의 적계부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인은 그에게 아이디어를 준다. 그리고 그가 일문일무(一文一武)의 두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도운다.

하나는 "국립광동대학"이고 하나는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이다. 전자는 명성이 별로이지만, 후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광주 황포도에 있었으므로, 속칭은 "황포군관학교"이다. 아마도 그것이 성립될 때의 공식명칭은 이미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1923년 8월 16일, 손중산은 장개석을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을 소련에 보내어 시찰하게 한다. 소련의 경험을 본받아 황포군관학교를 만들기 위함이다. 1924년 1월 24일, 손중산은 장개석을 황포군관학교주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한다. 국민당원로 요중개(廖仲愷)를 주비위원회 당대표로 임명한다.

장개석이 자신감을 가지고 황포도로 갔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멍해진다: 폐허나 다름없는 부지에 거의 쓰러질 것같은 몇 동의 건물, 사방은 잡초가 가득했고, 매일 밀물썰물이 가져다 주는 게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엉망인 곳에 학교를 세우다니, 학생은 어디에 거주하고, 훈련은 어디에서 한단 말인가?

 

이어서 발생한 일은 장개석을 거의 붕괴시킨다.

장개석이 부임한 후, 매일의 업무는 식량을 재촉하는 것이나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도 사람들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한번은, 그가 총리의 뜻을 받들어 전군 제3군군장인 범석생에게 돈을 구하러 갔다. 생각지도 못하게 범석생은 그의 코를 가리키며 욕을 해댄다: "손대포(孫大砲, 손중산의 별명)가 나에게 돈을 빌려갈 때도 공손했다. 네가 뭐라고, 이런 태도이냐. 어르신이 돈이 있어도 너에게는 못주겠다. 꺼져라."

 

장개석이 어찌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다른 사람의 영역범위내이니 이를 악물고 참았으며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문을 나선 후에 돌맹이를 걷어차며 욕을 했다: "냥시피(娘西匹, 장개석이 자주 했다는 욕). 네가 대단한 줄 알지만, 내가 언젠가 손을 봐주겠다."

장개석은 화를 참지 못하고 황포로 돌아온다. 그러나 자신은 겨우 부교장으로 선임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신은 장지를 품고 총리와 환난을 함께 하고자 하였는데, "1대"때 아무런 위치도 얻지 못했다. 현재 교장도 다른 사람이 가져가고 자신은 부교장이라니, 죽은 진기미를 생각했다. 자신은 바보처럼 모욕을 견디고 화를 참으면서 멍청하게 일을 한 것이다. 이것은 남을 위하여 좋은 일만 해준 꼴이 아닌가.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화가 난 나머지, 해산비를 나눠주고, 주비위원회를 해산한다. 총리(손중산)에게 편지 한통을 남기고, 소매를 떨치고 상해로 돌아간다.

 

이퇴위진(以退爲進)의 전략은 장개석이 가장 익숙하게 잘 쓰는 전략이다. 이것은 그의 성격과 맞는다. 일반인이 보기에 장개석은 마음대로이고, 조급하며,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함부로 떠나버린다. 이것은 과거에도 여러번 전과가 있고, 이미 상습범이다.

장개석이 떠나자, 요중개는 급해진다. 그의 형님들인 국민당중앙집행위원인 장정강, 대계도와 월군의 큰형 허숭지도 급해진다. 전보가 하나하나 계속 장개석에게 날아간다.

 

장정강은 장개석이 울면서 호소하는 말을 들은 후 마음이 약해져서 광주로 가서 손중산을 설득한다. 요중개와 국민당중앙집행위원 이열균, 대계도 등도 도와준다: "교장직은 장개석이 아니면 안됩니다." 허숭지도 손중산이 그에게 교장을 맡아달라는 호의를 거절하고 장개석을 추천한다. 기실 손중산은 장개석을 편애했다. 다만 그의 경력이 너무 얕아서, 교장을 맡게 되면 말들이 많을까봐 우려한 것이다. 지금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장개석을 극력 추천하니, 자연히 그들의 뜻에 기꺼이 따를 일이었다.

 

장개석이 하루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허숭지는 친히 봉화로 가서 청한다: "형제, 너는 정말 말썽을 잘 부린다. 하늘아래 어디 총사령관이 엉덩이를 쫓아서 참모장을 찾아오는 법이 있느냐. 네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허숭지가 오자 장개석의 체면은 세워졌다. 교장으로 승진된다는 좋은 소식에 그는 더욱 마음이 풀린다. 그는 금방 설두사(雪竇寺)에서 "기회는 잃지 말라(機不可失)"이라는 점괘를 뽑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믿었고, 이번 기회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장개석은 황포로 돌아온다.

 

장개석, 요중개는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입이 부르터라 설득하며 다녔지만, 겨우 청말의 일부 구식 기관총과 소량의 무기탄약만을 구할 수 있었고, 학생들도 겨우 교복 한 세트와 양말 한 쌍, 구두 한 벌을 줄 수 있을 뿐이었다. 낡은 건물은 비록 수리했지만, 여전히 건물밖에 큰 비가 오면 건물안에도 작은 비가 왔다. 황포군관학교는 비록 정부에서 비용을 냈지만, 당시 광동정부는 계,진,월등 군벌이 좌지우지했다. 학교경비는 자주 이들 군벌두목들에게 잘렸다. 매월의 경비도 보장이 없었다.

냉대와 고난에도 장개석은 더 이상 원망하지 않았고, 요중개도 더욱 전심전력을 다 했다. 돈을 구하기 위하여, 요중개는 자주 밤에 광동재정을 좌지우지하는 군벌 범석생의 연탑(煙榻)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서명할 때까지 기다렸다. 범석생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희 그 오합지졸 군관학교에서 오는 자들은 하나같이 돈달라는 것이다. 네가 만일 그 일로 오는 것이면 입을 열지 말라. 내가 말을 거칠게 하면 너희 독서인들의 얼굴에 불이 날 것이다. 이돈을 만일 너 자신이 필요로 한다면 원하는 만큼 주겠다. 괜히 군관학교같은 건 하지 말라."

 

매번 요중개는 좋은 말로 달래면서 갖은 방법으로 돈을 구해왔다. 이 미국화교가정출신에 여러번 손중산의 조각때 재정부장을 맡았던 국민당 원로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면서 집을 찾아가고 돈을 부탁했다. 이를 보면 황포군관학교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군사총교관 하응흠의 회고에 따르면, 황포군관학교 창립때, 캠퍼스면적이 3평방마일에 부로가했다. 경비는 매일 겨우 6000위안이었다. 인력은 학생 500명뿐이다. 무력은 소총 300정 뿐이었다.

이것은 그래도 조건이 좋을 때의 일이다. 학교개교때는 소총이 겨우 30정이었다. 학생들이 보초를 서는데 겨우 쓸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은 자조하며 말했다: 한 끼를 먹으면 다음 끼는 기약이 없고, 망가진 몇 개의 총으로 천하를 얻겠다고 한다.

 

군벌들은 이렇게 손중산을 조롱한 바 있다: "너희가 무슨 군관학교를 만든다고. 그 팔국연합군을 칠 때 쓰든 구식총으로? 내가 대대 하나만 보내면 모조리 처리할 수 있다."

비록 가장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장개석은 운좋게도 행복한 봄날을 맞이한다. 소련의 원조가 도착한 것이다.

황포군관학교의 창건비용은 270만위안이고, 매월 보조금이 10만위안이다. 1924년 10월 7일, 제1차 8000정의 소총과 500만발의 총알이 도착한다. 계속하여 15000정의 소총 및 대량의 기관총과 대포도 보내온다.

 

비록 창건초기의 물질적 조건이 엉망이었지만, 황포군관학교는 최신식의 이념, 가장 엄격한 요구사항으로 관병을 훈련시켰다.

레닌이 홍군을 창건한 경험을 받아들여, 사상정치교육을 중시하고, 관병의 혁명각오를 배양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삼민주의전사로 길러낸다. 장개석은 매일 학생들을 만나서 얘기한다. 황포1기의 학생은 거의 모두 장개석과 단독면담을 했고, 얘기를 나눠보았다.

관병들에게 솔선수범을 강조한다. 부하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도록 요구했고,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라고 요구했다. 현재 보자면 아주 통상적인 요구이지만, 당시의 군벌이 어찌 이런 말을 햇겠는가? 남자를 끌고가거나 여자를 강간했다. 백성들이 그들만 보면 도망치고 숨어야 했다.

 

일본군관학교의 엄격한 훈련이념을 추진하여, 학생들은 매일 아침에 섬 7-8킬로미터를 구보로 돌았다. 군관학교의 훈련장은 주강입구에 가까워서, 밀물때는 훈련장에 물이 발목까지 잠긴다. 그래도 나가서 훈련을 했다. 학생들에게 고생을 견디는 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매일 1끼의 밥을 한번만 퍼갈 수 있게 했고, 짚신을 신게 했으며, 찬물로 세수하고 목욕했다.

가장 엄격하게 교칙을 집행했다. "민중일심(萬衆一心), 만인제력(萬人齊力)"의 <혁명군연좌법>은 장개석이 가장 자랑하는 것이다. 적과 교전할 때, 얼마나 위험한지를 불문하고, 임전퇴각해서는 안된다. 만일 반장이 전체 반원을 데리고 퇴각하면 반장을 죽인다; 소대장이 전체 소대를 이끌고 퇴각하면 소대장을 죽인다. 중대, 대대, 연대, 사단에서 군단장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거꾸로, 군단장이 퇴각하지 않고, 전군관병이 퇴각하여, 군단장이 전사하면, 군단장이 소속된 사단장을 죽인다. 그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1924년 6월 16일, 황포군관학교는 성대한 개교식을 거행한다. 군관학교 대문에는 임시로 송백채문을 만들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대련을 걸었다: "승관발재청왕타처(昇官發財請往他處), 탐생외사물입사문(貪生畏死勿入斯門)", 횡비(橫批)는 "혁명자래(革命者來)"였다.

훈련장의 열병식ㅇ서, 하응흠은 소련식카키군복을 입고, 가죽구두를 신은 499명의 학생은 줄을 맞추어 행진했다. 그 영웅적인 풍모로 검열대를 통과했다. 이 성대한 대오를 보면서 장개석은 웃음을 지었다. 왜냐하면 이 대오는 완전히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비록 500명이지만, 내일은 5천, 5만, 50만 심지어 더 많아질 것이다.

 

장개석이 정성을 들여서 만들고 훈련시켜, 황포학생은 훌륭한 장교로 훈련되었다. 그리고 대명이 자자한 황포정신을 만든다: 친애정성(親愛精誠), 단결합작(團結合作), 위국애민(衛國愛民), 불파희생(不犧牲).

바로 이런 정신은 나중에 반세기동안 전체 중국을 황포의 그림자로 덮히게 만든다.

아마도 아래의 이름만 보아도 놀라서 소리지를 것이다:

호종남, 송희렴, 여정만, 유제시, 계영청, 정동국, 황유, 손원량, 두율명, 진성, 장영보, 임육용(임표), 좌권, 유주서, 유지단, 서상겸(서향전), 장선운, 왕이탁, 주사제, 허계신, 진갱.....

 

아무도 태어나면서부터 장군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황포출신의 장군이다. 이때이후, 이들은 장개석을 교장이라고 칭한다. 자칭 황포 몇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하나의 특이한 국면이 형성된다. 그것은 바로 스승이 학생을 치고, 학생이 스승을 치고, 동창이 동창을 서로 친다. 이것이 다반사가 된다.

만일 이 학교가 없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쓰여졌을까. 우리는 정말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이 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손중산을 여러해동안 따라다닌 요중개가 황포군관학교의 당대표를 맡고, 얼마 후에 암살당한다.

이제심(李濟深)은 한동안 교련부주임을 맡은 후, 신사군에 군장으로 간다.

대계도는 손중산의 마전졸(馬前卒)이고, '당국이론가(黨國理論家)'이다. 정치부주임을 맡은지 1달도 되지 않아, 아무 말도 없이 황포군관학교를 떠난다.

이렇게 하여, 전체 황포군관학교의 대권은 모조리 장개석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비록 장개석은 교장의 좋은 점을 잠시 보지 못했지만, 몇 달 후, 그는 수확을 거둔다. 그것도 아주 풍성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