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일명(佚名). <쾌락노인보> 2013년 6월 17일 제16판
장개석의 몸에는 적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장위국(蔣緯國)이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등이다. 그의 신세내력에 관한 수수께끼, 사생아 수수께끼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소문이 있다. 여기에서는 장개석을 친척이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한다.
정발(鄭發)
정발은 하남성(河南省) 허창현(許昌縣) 하가향(河街鄕) 후정장(後鄭莊) 사람이다. 1884년생이다. 형인 정대발(鄭大發)은 어려서 요절했다; 동생의 아명은 정합성(鄭合成)인데, 정삼발(鄭三發) 혹은 삼발자(三發子)라고도 불렀으며, 정발보다 3살이 어렸다. 정발의 부친은 정복안(鄭福安)이고, 모친은 왕채봉(王采鳳, 봉화의 장개석 모친의 이름인 王采玉과는 1글자 차이임)이다. 정발 본인 및 그의 딸 정희운(鄭喜雲)에 따르면, 1891년 허창은 대가뭄이 들어, 정발의 일가는 외지도 떠나서 먹고 살 길을 찾기로 결정한다. 앙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개봉(開封)으로 간다. 간지 얼마 지나지 안아 정복안은 집에서 사망한다.
개봉에 도착한 후, 우연한 기회에 왕채봉은 봉화(奉化)에서 개봉으로 와서 익태염행(益泰鹽行)을 운영하는 장씨집안의 보모가 된다. 1년여후, 장씨는 원부인이 사망하고, 왕채봉(王采鳳)과 결혼한다. 정발은 동생 정합성만큼 총명하고 기민하지 못해서 집안에서 냉대를 받았다. 나중에 장씨집안을 떠나서 혼자서 살아가게 된다. 정발은 부대로 들어가서 사병에서 점차 연대장까지 승진한다. 1921년 부대가 풍옥상(馮玉祥)의 부대에 병합되고, 정발은 군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1904년 정발은 개봉의 장씨저택에 간 적이 있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후에 정발은 모친과 동생을 만나지 못한다.
정발은 허창으로 돌아온 후,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33년 원소절에 정발은 아들 정쌍희(鄭雙喜)를 데리고 도시로 나가서 등을 구경한다. 그때 장개석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바로 자신의 친동생 정합성이라고 확신한다.
1941년, 정발은 산넘고 물건너 중경(重慶)으로 가서 장개석을 만나고자 한다. 국민정부 고시원 원장인 대계도(戴季陶)가 친히 정발을 그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5000냥 대양이라는 거금을 주겠다고 하면서 허창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정발은 그러나 자신이 중경에 온 것은 돈때문이 아니고, 형제를 만나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후정장에 사는 사람인 정희창(鄭喜昌), 유병환(劉丙煥) 및 정발의 자녀들은 이렇게 말한다. 송미령(宋美齡)도 정발을 만나준 적이 있다. 송미령, 대계도는 모두 정발을 돌려보내지 못했다. 장개석은 고자거(郜子擧)등에게 문서를 작성하여 "대립(戴笠)이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장개석은 진짜라고 인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짜라고 명백히 말하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고려한 다음, 대립은 정발은 백공관(白公館)에서 편하게 살도록 조치해준다. 1944년 설날이 막 지난 후, 중경에서는 정발의 명의로 가족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정발의 가족들은 중경으로 와서 함께 모인다. 정발의 일가는 중경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귀주(貴州) 식봉(熄峰)의 집중영으로 보내어진다. 당시 식봉감옥에 갇혀 있던 황동광(黃彤光)이 쓴 글에 다르면 "집중영에서 정노두(鄭老頭, 정발)의 일가를 아주 우대해주었다. 영내에 특별히 새로 지은 집 1동에서 대한간 주불해(周佛海)의 가족과 나누어 살면서 자체적으로 음식을 해서 먹었다."
항전승리후, 정발의 일가는 대계도의 권유하에 '금의환향'한다. 나중에 정발은 다시 두번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을 찾아갔다고 한다. 장개석은 모두 사람을 보내어 그와 만났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전국에서는 보편적으로 반혁명진압운동이 벌어진다. 정발은 장개석이 그의 친형제라는 것을 극구 부인하였고, 3개월간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다. '문혁"이 발발한 후, 정발은 아픔을 참고 모든 서신, 증명등 자료를 붙태웠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역사에는 유감을 남긴다.
장연국(蔣連國)
1950년 가을, 중경대학 와국어과 2학년 학생인 장연국이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연국의 모친은 여성접대원이었다고 한다. 일찌기 호종남(胡宗南) 부대의 초대소(여관)에서 일을 한 바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그녀가 시찰을 나온 장개석이 눈에 들어, 며칠간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에 의하면, 장연국의 모친은 원래 여성접대원이 아니라, 용모가 출중한 사교계의 꽃이었다고 한다. 장연국은 자신의 신세내력을 얘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 자신에 따르면, 그는 장개석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의 모친도 나중에 다른 사람과 정식으로 결혼했고, 자신이 장개석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극구 부인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것도 부인한다. 그녀는 스스로 의지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1949년 가을, 장개석은 중경으로 가서 '중경보위전'을 지휘한다. 장연국은 부친을 찾아가서 '삼공자'의 신분을 되찾을 생각을 한다. 호종남은 그를 말린다. 그리고 그에게 또 다른 선택의 여지를 준다. 그에게 자금지원을 해줄테니 중경에서 대학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조건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다. 장연국은 타협을 했고, 중경대학 49학번 학생이 된다.
1951년, 전국에는 반혁명진압운동이 벌어진다. 장연국은 자신이 이미 목표가 되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이 낫겠다고 여긴다. 그의 수중에는 호종남의 친필서신이 한 통 있었다. 이 서신은 그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뿐아니라, 서신을 보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장연국의 숙식을 해결해주고 그가 버마쪽으로 출국할 수 있게 도와주라는 내용도 있다. 서신에는 특무교통참의 주소까지도 기재해 두었다.
장연국이 도망친 후, 중경대학은 긴급히 공안기관에 보고한다. 공안국은 지명수배령을 내리고, 금방 그를 생포한다. 반혁명진압기간동안 체포된 사람들은 처음에 국민당이 남긴 백공관감옥에 갇힌다. 장연국도 그 곳으로 보내어진다. 반혁명죄로 무기징역을 언도받는다. 간수의 말에 따르면, 그는 중경석판파감옥에서 결국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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