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구양박문(歐陽博文)
대만 <연합보(聯合報)>의 보도에 따르면,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는 31명의 장개석의 신변에서 일했던 시종인원들을 인터뷰하여, 근 60만자에 이르는 구술역사를 완성했다. 대만당국의 '유엔퇴출'시 장개석이 분노하여 압설모를 집어던지고 화가나서 눈물을 흘린 일도 기록했고, 장개석의 마지막 하루도 기록했다.
장개석의 시위관, 내무조 부주임등의 직위를 지낸 응순인(應舜仁)의 회고에 따르면, 1971년 10월 26일 장개석을 모시고 대계빈관(大溪賓館)으로 갔다. 그날 무관이 장개석에게 '유엔퇴출' 소식을 보고한다. 장개석은 '압설모를 집어 바닥에 던졌다' 응순인은 장개석을 오랫동안 모셨지만 처음으로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도했다고 말한다.
대만당국이 전 외교부장 전복(錢復)은 당시 장개석의 영문통역이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엔에서 대만으로 돌아온 후 장개석에게 개략 40분간 보고했다. 장개석의 표정은 상당히 평정했고, 담담하게 그에게 말했다: "너희는 모두 노력했다. 너희가 미국에 가기 전에, 나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많은 시종들이 가까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장개석은 차를 타거나, 산보하거나, 길을 걸을 때, 모두 일을 생각했다. 그래서 시위관이 쉽게 끼어들지 못했다. 일찌기 장개석의 수석시위관을 맡은 바 있는 곽빈위(郭斌偉)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화원을 산책하는데, 장개석이 돌연 큰소리로 말했다. "안돼, 안된다고." 곁에 있던 시위들이 깜짝 놀랐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원래 그가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다가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개석의 수석시위관을 지낸 곽빈위는 이렇게 말한다. 장개석은 매화를 좋아했고, 송미령은 장미를 좋아했다. 장개석이 송미령에게 말한 바 있다: "매화의 향기가 가장 좋다. 이 향기를 맡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같다."
그는 말했다. 사림관저에는 원래 수백그루의 홍앵화가 심어져 있었는데, 장개석이 어느날 특별히 당부하여 양명산으로 옮겨심는다. 그리고 관저, 부흥향 각판산, 양명산빈관에는 모두 매화를 많이 심는다. 그후 매번 매화가 피는 계절이 되면, 장개석은 시간을 내서 각판산에 올라가 매화를 구경했다. 긜고 마음에 드는 매화를 꺽어서 송미령의 서재로 보냈다.
사림관저의 주방장 장무발(蔣武發)의 회고에 따르면, 장개석이 영화를 보고싶어하면 모두가 같이 보도록 틀어주었다. 그에게 가장 인상깊은 것은 <양산백과 축영대>였다. 관저에서 십여차례나 틀어주었다. "우리도 함께 보았다. 관저에서 경위안검을 맡은 대위형(戴位珩)은 장개석이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으면 "그거 틀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모두 알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려화(李麗華)와 엄준(嚴俊)이 주연한 <이묘환태자>이다.
1975년 4월 5일, 장개석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 아침, 장경국(蔣經國)이 아침에 평소처럼 문안을 왔고, 그날이 청명절이라고 얘기했다. 장경국은 관음산으로 가서 대만의 전 "국안국 국장" 진대경(陳大慶)의 묘를 보러 가겠다고 하면서, 장개석이 잠을 잘 잤는지 물었다. 장개석은 연속 두번 "좋다"고 답한다. 이것이 장개석이 장경국에게 한 최후의 말일 것이다.
시위 곽빈위는 말한다. 그때 장개석의 몸은 이미 아주 좋지 않았다. "이쪽에 주사바늘을 찌르고, 저쪽에 물건이 걸려 있다" 그렇지만 아들에게는 그렇게 관심을 보였다.
장위국(蔣緯國)은 다음 날 유체를 병원의 냉동고에 넣을 때 도착한다. 장개석의 마지막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곽빈위는 조심스럽게 장개석의 유체를 냉동고에서 꺼낸다. 장위국은 부친을 보자, '풀석'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꿇어 앉아 울면서 소리쳤다: "아버지, 제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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