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손월(孫越)
적지 않은 역사서에는 중국과 러시아가 <네르친스크조약(중국명 '니부추(尼布楚)'조약)>을 체결한 후 양국은 200년동안 평안무사했다고 적고 있으나, 기실 그렇지 않다. 실제로 러시아는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한 후, 계속하여 흑룡강 출해구, 태평양연해지구에서 추크치반도(유라시아대륙의 동북쪽 끝의 반도)등 미정지구를 노렸다. 유럽열강은 19세기초부터 세계을 장악했고, 제정러시아는 이들을 본받아, 영토확장에 착수한다. 무역국제화와 대중국관계는 국가의 동방개척전략에서 중점이었다. 한편으로 중국에 영토협상을 새로 제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흑룡강출해구와 사할린섬을 노렸으며, 중국의 내하(內河)인 흑룡강의 항행권을 노렸다.
1805년 5월 상순, 제정러시아황제는 참의원인 그로푸진 백작에게 명하여, 백인사절단을 이끌고 북경으로 간다. 가경제와 러시아-중국 국경문제에서 남은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즉 우다강(River Uda, 烏第河) 유역토지의 귀속권, 러시아상인의 중국에서의 무역권, 그리고 러시아선박의 흑룡강에서의 항행권등 문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러시아사절단이 북경에 들어오기 전에, 중국현지관리들과 그들은 쿠룬(庫倫, 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중국황제를 배알할 때의 '삼고구배(三叩九拜)'를 행할 것인지 문제를 놓고 이견이 발생하여, 가경제는 러시아사절단을 국외로 쫓아내 버린다.
그후 반세기동안 중국과 러시아는 공식교류가 거의 없었다. 양국의 변경은 그러나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쌍방은 변경관리를 강화하고, 양국의 변방주민들은 우호적으로 왕래했고, 변방이 군인들은 서로 선물과 먹을 거리를 주고 받았다. 중국측은 심지어 코사크사병이 중국내하로 들어와 낚시를 하도록 허용하기까지 했다. 1806년 6월, 중국북방에 대재앙이 닥친다. 러시아는 중국에 양식을 판매해서 재난구제를 돕는다. 1807년 8월 30일, 러시아측은 중국군민에게 짜르명명일축제에 참가하도록 초청하기도 했다. 다만, 쌍방은 아직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이 기간동안, 러시아 외교부의 고위관리간의 통신을 보면 그들은 중국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심지어 적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청나라군대의 변방장수들은 조정에 보낸 주절(奏折)에서 청군이 비밀리에 조치를 취하여 러시아군의 급습을 방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842년 8월, 중국과 영국간에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러시아인들은 중국이 이미 겉으로 강해보이나 속으로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국, 프랑스등 열강이 극동에 상륙하기 시작하자, 러시아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중국과 다시 국경협상을 재개하고 싶어했다. 동방확장의 호기가 도래하였다고 여긴 것이다. 19세기 상반기에 러시아는 군사목적의 과학고찰대를 대거 극동으로 보낸다. 각 방면에서 흑룡강을 러시아의 판도로 편입시키는데 대한 근거를 찾았다.
일찌기 1816년, 이르쿠츠크성장 코르니코프는 러시아 외교부장 네세르로제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중국러시아국경은 반드시 흑룡강을 경계로 그어야 한다고 밝힌다. 1849년 1월 짜르는 러시아극동고찰위원회를 만들어, 해군대위 네베르스코이로 하여금 오오츠크해와 흑룡강출해구를 고찰하게 한다. 네베르스코이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국영토인 사할린섬은 무주의 토지이다. 흑룡강출해구는 중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1850년 6월 29일, 네베르스코이는 흑룡강북안에 여러 개의 군사초소를 만든다. 7월, 그는 다시 흑룡강출해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군용부두를 만든다. 나중에 군항으로 확장하고,니콜라예프항구라고 이름붙인다. 즉, 현재 니콜라예프스크 온 아무르이다. 그해에 네베르스코이등은 항구에 가서 준공하자마자, 즉시 러시아해군군기를 올리고, 이 항구가 러시아의 영토라고 선언한다. 그때 그의 곁에는 단지 10명의 러시아인이 있었다.
네베르스코이를 가장 옹호해준 살마은 동시베리아총독 무라비예프였다. 그가 부임한 해에 나이가 38살이었고, 그는 러시아군대내의 매파였다. 그는 대중국강경외교를 계속 주장했고, 러시아는 한편으로 무력으로 극동의 서방열강을 몰아내고, 다른 한편으로 신속히 흑룡강출해구를 점령해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중국이 반대하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그의 민족주의적 구호는 '러시아국기가 올라간 곳이면, 그곳이 바로 러시아영토이다"라는 것인데, 러시아의 조야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무라비예프의 전략은 누구든지 흑룡강 출해구를 점령하면, 시베리아와 바이칼호지구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흑룡강출해구를 장악하면 시베리아와 극동의 경제명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후 무리비예프는 전면적으로 흑룡강출해구 고찰대를 넘겨받는다. 1851년 2월 17일, 러시아는 중국영토를 잠식한 것을 감추기 위하여, 그는 러시아측을 대표하여 청나라조정의 이번원(理藩院)에 서신을 보내어 청나라조정과 담판을 거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공동으로 흑룡강출해구와 사할린을 보위하여 외국열강으로부터 침략을 막는 것을 상의하자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는 서신에서 청나라조정이 네르친스크조약때 미해결지구문제를 언급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흑룡강출해구와 사할린을 외국열강에게 점령당하면, 러시아중국양국의 공동이익에 손해된다. 외국선박이 흑룡강을 항행하면 중국주권을 해친다.
무라비예프는 기다렸지만, 북경이번원의 회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짜르에게 보고하여 허가를 받고, 극동방어를 강화하고, 전쟁에 적극 대비한다. 그는 한편으로 시베리아함대의 본부를 오오츠크해에서 추크치로 옮기고, 다른 한편으로 후바이칼 코사크부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1853년에 흑룡강과 연해지구에 5개의 러시아군항을 건설한다. 그리고 사할린에도 군항을 2개 건설한다. 다음 해, 무라비예프는 다시 '흑룡강출해구, 추크치와 러시아태평양연안의 안전을 보위한다'는 명복으로 짜르에게 병력 500명의 증원을 신청하고, 새로 만든 시베리아함대에 투입한다. 그리고 코사크분대를 하나 파견해서 4문의 산포를 가지고 흑룡강지구로 진주한다. 그는 방어를 명목으로 1854년 여름, 2개영(營)과 수백명으로 구성된 코사크기병을 보내어 화포를 휴대하고 배를 타고 흑룡강을 따라 남하하게 한다. 흑룡강강안과 타타르해협에서 침범하는 적을 물리치는데 편리하도록 했다. 그후 무라비예프의 부대는 다시 오오츠크해에서 바로 태평양으로 나간다. 적을 추크치의 페테르바부로프스크항에서 쫓아냈다.
1854년 4월 14일, 무라비예프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북경 이번원에 서신을 전한다. 그는 짜르의 명을 받아, 흑룡강을 거쳐 태평양으로 향하며, 서방열강이 양국빈해지구를 침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싸울 것이라고. 5월 14일, 그는 중국의 회신을 기다리지 않고, 명을 내려 원정대를 출발시킨다. 당시 그가 보유한 병력은 천여명 함대는 '어얼구나'호 윤선을 포함하여 5척의 소형정, 4척의 능형삼판, 18척의 대형삼판, 13척의 박선(駁船), 8척의 평저선과 29개의 목선이다. 원정군 전투인원은 천명에 달했고, 작전물자와 충분한 총과 탄약이 있었다. 함대는 흑룡강에 진입한 후, 무라비예프가 러시아측 전체 장병을 이끌고 아크사전투에서 중국군대에 전멸당한 러시아군을 위하여 묵념한다. 6월 9일, 러시아군 함대는 중국아이훈성 관할지역으로 들어선다. 중국측의 저지를 당한다. 무라비예프는 사람을 보내어 이번원의 서신부본을 보여주고, 아이훈부도통 호손포(胡遜布)에 전한다. 흑룡강을 거쳐 바다로 나가겠다고 말한다. 호손포는 배에 올라서 막았고, 러시아인들의 요구를 명확히 거절한다. 무라비예프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한편으로 수하에게 중국군대를 향하여 발포하라고 암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선대에 아이훈수역을 강제로 통과하도록 명령한다. 호손포는 북경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으므로, 구두로 경고하고 막는 외에 감히 스스로 결정하여 일을 벌이지는 못한다. 그저 눈을 멀거니 뜨고 러시아군대의 배가 보무당당하게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1854년 6월 9일, 러시아군대가 흑룡강을 강행통과하고, 1855년 5월에서 1856년 5월까지, 러시아군은 최소한 2번 대규모의 선단을 강행통과시킨다. 아이훈의 흑룡강부도통은 모두 배에 올라가서 저지했지만, 러시아측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변방관리는 모두 조정에 보고했지만, 자금성은 보고를 받은 후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이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그러나, 러시아사학자 보보프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측은 러시아선박이 흑룡강을 통과하는데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였다. 정부측에서 막지 않았을 뿐아니라, 중국인들은 보수를 따지지 않고 러시아군에 원조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배를 수리하고, 말을 먹여주는 등이다. 중국러시아 양국군인과 백성은 서로 선물을 교환했다. 무라비예프도 이런 장면을 서신에 적어서 짜르에게 보고한다. 이처럼 양측의 전혀 다른 역사기록에는 무슨 비밀이 숨어 있을까? 그러나, 중국러시아학자들이 제공하는 사실에는 일치하는 점도 여럿 있다; 1857년 봄, 무라비예프는 중국영토에 15개의 코사크이민정착지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1858년 여름, 그는 흑룡강과 우수리강지구에 35개의 러시아주민정착지를 건설했고, 그중 6개는 하이란부(海蘭泡, 현재의 블라고베센스크)에 있었고, 4개는 우수리강에 있었으며, 25개는 하이란부와 하바로프스크의 사이에 있었다. 그때까지 흑룡강유역의 러시아이민자수는 6000명을 넘었다. 러시아병력은 천여명에 달했다. 이제 러시아는 중국흑룡강 하류지구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를 완성하고, 중국에 새로운 국경조약을 체결하자고 핍박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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