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월남역사상의 반중국정서

중은우시 2014. 4. 29. 22:30

글: 복녕객(福寧客)

 

중국인에 있어서 월남에서 역사박물관을 참관하는 것은 특이한 체험을 하는 것이 된다. 기원전3세기부터 18세기까지 거의 모든 전람실에는 안내원이 자랑스럽게 각국의 관광객들에게 월남인민이 "중국침략자'에 항거한 영웅적인 사적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조상이 침략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대하여 중국관광객들은 복잡한 감정이 된다. 다만 월남에서 며칠만 머물면 이미 습관이 된다. 하노이의 하이바쩡사원은 현지의 유명한 명승지이다. 한나라"침략자'에 항거한 여성영웅인 쩡씨자매를 모시고 있다. 호치민시 길거리에는 갑옷을 입은 고대여성항중영웅의 조각상이 있는데, 배낭여행객들이 밀집한 범오노가(范五老街) 부근에는 진흥도(陳興道)의 조각상이 서 있는데, 이 사람은 월남 진왕조의 명장으로 일찌기 2번이나 몽골군대를 물리쳤다.

 

2014년 1월 19일, 수십명의 월남민중이 하노이시에서 반중국시위를 벌인다. 서사해전(西沙海戰) 40주년을 기념하여, "황사(黃沙, 즉 중국의 西沙)와 장사(長沙, 즉 중국의 南沙)는 월남 것이다"라는 구호를 소리높여 외쳤다. 월남세계문화유산 순화황궁(順化皇宮)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지도가 걸려 있다. 월남어, 영어, 중국어의 3가지 언어로 서사와 남사제도는 월남에 속한다고 적었다. 의미심장한 일은 1974년 1월 중국해역에 침입한 "이상걸호(李常杰號)", "진경유호(陳慶瑜號)", "진평중호(陳平重號)"가 모두 월남엯상 항중영웅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는 것이다. 그중 첫번째로 중국영해를 침범한 "이상걸호"의 이름은 1075년 북송 옹주에 침입한 이조(李朝)의 장수 이상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서사해전후, 월남정부출판사가 내놓은 <월남고대사>에서는, "월남역사는 바로 중국침략사이다"라고 적었다. 고대 중국과 월남간에 도대체 어떤 은원, 충돌이 있길래 월남인들은 이렇게 가슴 속에 품어두고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월남"의 의미는 '백월지남(百越之南)"이라는 뜻이다. 기원전214년, 진시황은 영남의 백월족 거주지를 평정하고, 계림(桂林). 남해(南海), 상(象)의 3군(郡)을 설치한다. 그중 계림과 남해는 지금의 광서, 광동이다. 상군은 지금의 광동 동남부와 월남북부, 중부를 포함한다. 월남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바로 중국이 대거 월남을 침략한 시작이다. 실제로 당시 그곳에는 그저 일부 원시부락이 있었을 뿐이고, 독립정권은 없었다. 진시황이 월남을 점령한 것은 그의 중국통일의 단계중 하나이고 남하한 50만대군은 명령을 받고 현지에 남아서 월인들과 잡거하면서 생산의 발전을 촉진한다.

 

진시황의 사후, 각지에서는 할거의 기풍이 일어난다. 남해군 용천령 조타(趙佗)는 그 틈을 타서, 스스로 왕이 되고, "남월국"을 건립한다. 기원전111년, 한무제는 다시 통일사업을 시작하여 '남월국'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구군(九郡)으로 나눈다. 이때부터 오대후기까지 약 1천여년간 이 지구는 중국고대전제왕조에 직속된 일부분이었다.

 

동한초기, 광무제가 월남지구를 부세(賦稅)를 납부하지 않고 공물(貢物)만 바치는 것으로 바꾸어, 각지에 관려를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게 된다. 낙왕(雒王), 낙후(雒侯), 낙장(雒將)등 원시부락의 수령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40년, 낙장의 딸 정측(征側)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 여동생 증이(征貳)도 이어서 호응한다. 그녀들은 한나라주둔군을 물리치고, 65개 성을 획득한다. 정측은 스스로 왕이 되고, 그가 이끄는 의거는 역사상 "이정기의(二征起義)"로 불린다. 정씨정권은 3년간 지속되다가 동한의 복파장군 마원(馬援)에게 평정된다.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정씨바매는 포로로 잡혀 참수당한다. "수급을 낙양으로 보낸다" 월남의 역사전설은 정씨자매가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고, 43년 음력 이월 육일 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한다. 매년 음력 이월 육일이 되면, 월남 민간에서는 기념활동이 벌어진다.

 

마원이 반란을 평정한 후, 교지(交趾)지구는 낙장제도가 폐지되고, 군현제를 도입한다. 중국사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반란진압은 현지의 생산관계의 진보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월남에서는 이정기의는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 시작이었고, 정씨자매는 계속되는 전설 속에 여신으로 존경받는다.

 

1955년 6월말, 호치민은 월남당정대표를 이끌고 중국을 처음으로 공식방문한다. 모택동은 쌍방의 제1차회담에서 중국은 고대에 월남을 침략한 바 있다고 언급한다. 1956년 11월, 주은래가 월남을 방문할 때 친히 하노이의 "이정묘(二征廟)"로 가서 헌화한다. "1900여년전 중국한왕조의 마원이 이끄는 친략군에 항거하다가 희생된 두 여왕"에 대하여 경의를 표한다. 그날 저녁, 주은래는 중국대사 나귀파(羅貴波)가 거행한 연회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보증한다. 중국은 영원이 오항원칙을 준수할 것이고, 대국쇼비니즘을 굳건히 반대할 것이다."

 

주은래가 이정묘를 참배하기로 선택한 것은 새로운 시기의 중국-월남관계를 위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동한시가의 월남은 비독립국가였고, 동한판도내에 예속된 군현이었다. 마원이 이정부인의 의거를 진압한 것은 한나라의 '내부모순'이다. 다른 성이 농민의 난을 진압한 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이론상으로 이를 '침략'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그후 근 천년의 의거와 진압과 성격이 모두 유사하다. 예를 들어, 삼국시기 조부인의거, 남북조시기의 이비(李賁)의거, 수나라 이불자(李佛子)의거, 당왕조의 두번에 걸친 평민의거와 두번에 거친 장수반란등등. 월남의 역사교육에서, 이번 의거는 월남인민이 영웅의 영도하에 쟁취한 민족해방투쟁이라고 한다. 평화시기에도 월남인민은 북방한족왕조의 "확장정책, 동화음모 및 교활한 통치수단"에 저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939년, 교지사람인 오권(吳權)이 남한군을 격패시키고, 영토를 개척하여 왕에 오른다. 968년, 교지지구의 정부령(丁部領)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구월(大瞿越)"이라 한다. 월남은 이때 비로소 정식으로 독립정권을 건립하고, 국가가 된다. 오권은 지금도 월남에서 국부로 숭상받는다. 이미지는 신격화되었다. 월남사료에 따르면, 오권은 출생시 "기이한 빛이 집안에 가득했고" "자라면서 괴오(魁悟)하며, 눈빛이 번개와 같고, 느린 걸음은 호랑이 같으며, 지용(智勇)이 있으며, 힘은 솥을 들 수 있었다"

 

960년, 조광윤이 북송을 건립한다. 972년 정부령은 사신을 송왕조로 보낸다. 그리고 "지모화풍(志慕華風), 상사내부(常思內附)"의 뜻을 전하며, 책봉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조광윤은 정부령을 "교지군왕"으로 임명한다. 이것은 월남이 중국의 '열번(列藩)"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월남관계는 번속시기로 접어든다. 월남이 진심으로 '내부'를 기꺼이 원한 것은 아니다. 2012년 방영된 드라마 <소동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교지국은 고의로 중원에 없는 기이한 동물을 진공한다. 대송왕조의 문신무관들은 이름이 뭔지를 몰랐다. 송휘종은 이를 치욕으로 여긴다. 그러나 교지의 사신은 이에 득의만면한다. 다행히 소동파는 이것이 "미록(糜鹿)"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서 외교위기를 벗어난다. 이 장면은 비록 전설에서 왔지만, 여기에서 월남인의 중국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1009년, 이공도(李公道)는 월남역사상 가장 강성한 왕조 이조를 개창한다. 통치자는 웅심발발(雄心勃勃)하여, 점성(占城), 캄보디아, 라오스의 진공을 받고 칭신하게 만든다. 그리고 1014년, 1022년, 1028년, 1036년, 1058년, 1059년그리고 1060년에 여러번 '송나라국경을 깊이 쳐들어와서 그 창고를 불태우고 돌아갔다" "송나라 흠주를 정벌하고, 병력의 위세를 빛나게 하고 돌아갔다." 북송은 요나라와 서하를 대응하는데 힘들어, 서남을 돌볼 여지가 없었다. 이조의 침입강도는 갈수록 커진다.

 

1069년, 왕안석은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하는 변법을 추진하고, 국내에서 강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이조의 10만대군은 보국태위의 지휘하에 송나라를 침략하고, 흠주, 염주, 옹주의 3개주를 점령한다. "오만팔천여명을 도살하고, 흠,염 두 주를 합병하였으며 사망자는 수십만명에 달한다" 옹조지주 소함은 과불적중(寡不敵衆)하여 일가족 36명이 불에 타서 죽는다. 이렇게 잔인한 침략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송나라가 변법을 실행하여 백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월남이 "병력을 일으켜 이를 문죄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함"이었다. 구하는 방법이 바로 도살이다. 근현대에 월남은 송나라를 공격한 것이 '자위'목적이라고 말한다. 이상걸은 송나라군대가 침략의도를 가져서 '선발제인(先發制人)'한 것이라고 한다.

 

1076년 3월, 송신종은 곽규(郭逵)로 하여금 30만대군을 이끌고 옹주 실지를 회복하게 한다.그후 승기를 틈타 추격하여 이조의 경내로 쳐들어간다. 수도 승룡(昇龍)으로부터 겨우 3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쳐들어가자, 이상걸의 화의를 제안한다. 송나라군대는 이미 점령한 이조의 영토를 돌려주고 송나라와의 종번관계를 회복한다. 호치민시의 월남국가역사박물관에는 인물모형으로 이조군대가 송군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이상걸은 송나라 성을 차지한 '공적'으로 민족영웅의 보좌에 앉았다. 그리고 '천재적인 전략과 탁월한 정치 및 왜교재능이 결합한 걸출한 군사가"라고 평가한다. 그가 중국평민을 도살한 행위는 월남국내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원나라의 건립초기, 쿠빌라이는 사방으로 확장한다. 3번에 걸쳐 대군을 일으켜 월남을 공격한 바 있다. 제1차월남공격만 승리를 거두었을 뿐, 뒤의 두번은 모두 월남의 진조 황족장수 진국준(陳國峻)이 지휘하는 군대에 패배당한다. 진국준은 흥도왕(興道王)에 봉해져서 그를 진흥도라고 부른다. 몽골철기가 유라시아대륙을 짓밟았는데, 자그마한 월남은 정복하지 못한다. 그후에 자주 월남에 의하여 서남변경이 침략당한다. 이것은 월남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일이다. 진흥도는 이로 인하여 최고의 민족영웅이 된다. 몽골은 당시에 이미 중원에 진입하여 원왕조를 건립했고, 월남을 침략한 빚도 모조리 중국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다.

 

명나라 영락제와 청나라 건륭제때 중국은 일찌기 월남에 병력을 보내어 전쟁을 일으킨 바 있다. 출병원인은 기본적으로 모두 월남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거나, 이눗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위기에 처한 왕조가 종주국의 보호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종번관계의 예법체제하에서 중국은 확실히 출병의 의무가 있었다. 이를 현대의 관점에서 중국이 월남의 내정에 간섭했다고 질책할 수는 없는 것이다.

 

1880년대, 중국은 마지막으로 종주국의 의무를 이행한다. 월남을 도와 프랑스군대와 싸운다. 결국 중국은 패하지 않고 패했고, 프랑스는 이기지 않고 이겼다. 청왕조의 타협하에, 1885년, 프랑스는 월남을 점령한다. 중국월남의 종번관계는 이로써 끝이 난다. 1949년이후, 중국월남관계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전례없는 밀월기가 도래한다. 양국지도자들은 형제와 같은 개인적인 우의를 유지한다.

 

중국사서에서, 월남과 관련한 일은 그저 잠시 언급하고 지나간다. 중국과 교전한 월남의 장수는 직급이 너무 낮아서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가 드물다. 다만 월남에 있어서 중국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강대한 이웃나라이다. 중국월남관계는 월남역사에서 아주 긴요하다. 항중영웅을 제사지내고 숭배하는 것은 자고이래로 있어왔다. 당덕강은 <만청칠십년>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월남학생은 나에게 말한다. 월남의 역사상, 모든 월남의 '민족영웅'은 모두 '항중영웅'이다. 나도 그에게 말했다. 역사상 인도차이나반도의 내전에서, 얼마나 많은 '민족영웅'이 나타났는지 모른다. 아마도 항중영웅보다 백배 열배는 밚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항중영웅'만이 그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길 수 있고, 다른 영웅들의 이름은 기억도 못한다. 모두가 한바탕 웃고 말았다."

 

1970년대 후반, 월남은 남북통일을 이룬다. 민족주의정서가 점차 고양된다. 당시 마침 중국월남관계는 긴장된다. 그리하여 고대중국의 월남침략사는 민족주의교육의 주요교재가 된다. 월남의 정부는 대량의 중국침략에 관한 서적을 출판하고, 항중영웅의 사적이 널리 전파된다. 매번 이들 영웅의 탄신일 기일을 만날 때마다 혹은 큰 명절때마다 민중은 영웅의 조각상을 들고 길거리를 행진한다. 현재 기념활동의 빈도는 많이 줄었다. 그러나 여전히 민간에서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월남의 민간에서는 항중영웅을 기념하는 동시에, 공자와 재신야를 제사지낸다. 문묘의 수량은 아마도 이정낭낭묘의 수량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월남의 고대에 전쟁이 발생한 기간은 다 합쳐야 사십년이 넘지 않는다. 나머지 근 이천여년의 시간은 비교적 왕래가 밀접했고, 한자는 월남의 공식문자였다. 프랑트통치후에야 월남에서 한자가 폐지된다. 지금도 월남의 북방에서 한자를 쓰는 것은 하나의 문화격조가 높은 기능이다. 설날에 하노이를 여행하면, 아마도 외국에 온 것인지 모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시간여행을 하여 고대중국으로 돌아간 것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중심도시에는 한자 춘련(春聯)을 걸어놓은 점포가 가득하고, 백발노인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서 붓으로 붉은 종이에 한자를 써서 그 자리에서 판매한다. 남녀노소가 줄을 서서 이를 사간다. 월남은 고대중국에 대하여 애정과 원한이 교차했다. 한 두마디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