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손월(孫越)
1676년 러시아특사 미리에스쿠는 북경에서 러시아로 돌아와서 짜르에게 보고한다. 빨리 군대를 보내어 중국을 평정하라고. 가히 광망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그후 비록 러시아가 미리에스쿠의 말을 가볍게 믿어 대군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하여 중국흑룡강유역에서 주민을 약탈하고 부녀를 노략질했으며 모피를 강탈했다. 그리고 중국의 강에서 몰래 진주를 채집했다. 대청의 이번원은 여러번 질책했으나 러시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1677-1679년, 러시아인은 중국경내 징치리(精奇里) 강안에 여러 개의 성보를 짓고, 군사장비를 확충하며, 모피를 약탈하고, 광산자원을 탐사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한걸음 한걸음 청나라정부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1680-1681년, 짜르는 한편으로 어전시위 푸예코프를 네르친스크통령으로 임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찌기 북경에 사신으로 간 바 있는 미로완로프를 징치리강안을 따라 강물의 흐름에 따라 남하하며 양안을 정찰하고 지도를 그리고 다시 새로운 성보를 짓도록 한다. 동시에 그곳에 병력을 증원하고 미로완로프를 징치리 성보의 채주로 임명한다. 1682년이후, 러시아는 북방침입을 가속화 한다. 미친듯이 성보를 지으며 영토를 잠식한다. 그리고 야만적으로 무고한 부족을 약탈하여, 각부 민족들이 대공황에 빠진다. 변방의 부족들은 도탄에 빠진다. 그들의 저항도 갈수록 심해졌고, 러시아의 우환은 이미 중국북부변방지녁에 큰 재앙이 되었다.
청나라의 전적 <호종동순목록>과 <팔기통지>를 보면, 이미 '삼번의 난'으로 고생을 겪은 강희제는 마침내 1681년(강희19년) 내란을 평정한다. 그는 즉시 손을 뻗어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고, 코사크와의 전투를 준비한다. 그리고 러시아와 협상을 통하여 국경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그는 비록 내심으로 러시아를 멸시했지만, 우자라촌의 일전은 그로 하여금 마음 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희가 북방에서 대전을 벌여 내지를 교란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월 28일, 강희제는 대리시정 청명애와 이번원낭중 어얼사이를 파견하여 징치리강유역으로 가서 러시아인과 담판을 한다. 가기 전에 강희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찰(러시아)는 극변절역(極邊絶域)에 사는 외국이 소인이다 믿어서는 안된다." 이를 보면 강희제는 러시아인의 본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같다.
북방의 안위를 위하여 일찌기 1676년, 청나라조정은 동북변경을 지키는 영고탑장군의 치소를 우라(지금의 길림시)로 이전한다. 1681년, 강희제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하여, 병마를 준비한다. 영고탑장군의 치소는 전방전투지휘부가 된다. 영고탑도통은 바하이(巴海)이다. 1682년 5월 12일, 강희제는 북순을 하여 성경과 우라의 방어상태를 점검한다. 군대의 사기는 드높아진다. 9월, 청나라는 사슴사냥을 이유로, 정찰부대를 야크사에 파견하여, 흑룡강의 수륙지형을 정찰한다. 그리고 성내 러시아군의 동정을 살핀다. 1683년 1월, 강희제는 다시 바하이에게 명하여 목재를 준비하고 장인들을 모아서 우라에서 선박을 건조하고 수량은 백여척에 이르도록 하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영고탑장군 바하이와 부도통 사부쑤(薩布素)에게 명하여 흑룡강으로 가서 강을 따라 목성을 만들고 양식을 비축하고 군대를 확충하게 하며 무기를 준비하며, 훈련을 시키도록 한다. 1684년 연초에 이미 전투대비식량을 90%이상 확보한다. 즉 4570석을 아이훈, 우라 일대로 운송해놓는다.
영고탑도통 바하이는 1683년 5월 4일, 청나라의 병사주둔현황을 강희제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야크사성보에 대한 '속행정초(速行征剿)"계획을 진행할 것을 제출한다. 나중에 강희제는 명을 내려 바하이에게 지키고 있으라고 한다. 그 해에 바하이는 수등(叟登)등의 풍년수확을 거짓보고하여 바하이는 삭탈관직된다. 강희제는 사부쑤로 하여금 흑룡강군사업무를 주재하게 한다. 그리고 1683년 겨울에 러시아와 전투를 개시할 것을 계획한다. 다만 사부쑤는 겨울작전은 난이도가 높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군인은 돌아가면서 방어를 하여야 하는데, 아이훈의 성벽방어도 공고히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희제는 그래서 공격시간을 1684년 봄으로 늦춘다. 청군에게 먼저 러시아군의 곡물을 베어 먹을 것이 없어 퇴각하게 하도록 하고, 다시 공격하라고 명한다. 누가 알았으랴. 청군의 전투준비는 1684년 6월중순까지 늦춰진다. 야크사의 러시아군은 이미 성밖의 곡물을 모두 벤 상태였다. 그래서 성내에 식량은 충분했다. 게다가 1685년 1월, 강희제는 아직 산동, 하남과 산서 3개성에서 공격을 맡을 등패대도대(藤牌大刀隊) 대원을 선발하는데 빠빴다.그래서 야크사계획은 다시 연기된다. 1681년에서 1684년의 기간동안 강희제는 여러번 사신을 보내어, 러시아측과 담판하고 짜르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들에게 침략을 정지하고 정치적으로 중국러시아간의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짜르는 본체만체 했고, 태도는 오만했다. 결국은 귀족 토르부신을 보내어 야크사성보에서 진을 친다. 중국에 대한 무력침략을 그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1683년 가을, 짜르는 전쟁이 가까워졌다고 여기고, 한편으로 야크사를 러시아관할지로 편입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베리아에 병력 1000명을 증원시켜 야크사로 보낸다. 그러나 중도에 여러 부족무장세력때문에 늦어지고 나중에 야크사에서 전투가 일어날 때까지 그들은 도착하지 못한다.
중국측에서는 1685년 2월, 강희제가 명을 내려 펑춘(彭春), 랑탄(郎談), 반다르사(班達爾沙), 사부쑤, 마라(馬喇)와 임흥주(林興珠)로 전투지휘부를 구성한다. 5월 30일, 아이훈의 청나라군대는 수륙 양선으로 나누어 야크사로 출발한다. 6월 14일, 펑춘은 선두부대를 이끌고 야크사의 성밖에 도착한다. 러시아군의 목장에 있는 말들을 빼앗는다. 그리하여 성보내의 러시아군 기병은 탈 말을 잃는다. 그리하여 돌진하거나 도망칠 수가 없었다. 6월 20일, 청군의 대부대가 배와 말을 타고 야크사 성아래에 도착한다. 6월 21일, 펑춘은 강희제의 명에 따라, 야크사의 러시아군 우두머리 토르부신에게 만주어,몽골어,러시아어의 3종언어로 된 최후통첩을 보낸다. 엄정하게 러시아군에 통고한다. 야크사에서 속히 퇴각하라 그러지 않으면 전멸시키겠다. 만일 깨닫지 못하고 명에 따르지 않으면, 분명히 죽음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토르부신은 본체도 하지 않으며 성보에 의존하여 버티려고 한다. 최후통첩에 대하여 불손한 말을 내뱉을 뿐아니라, 끝까지 저항하려고 준비한다.
원래, 그들은 청군이 성을 포위했을 때, 네르친스크등지의 코사크에 지원서신을 보낸다. 그들은 확신했다. 우군이 야크사의 위기를 해결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6월 25일, 청군이 공성하는 날, 지원온 러시아군 40여명은 흑룡강상류에서 목선을 타고 왔으나, 청나라수군이 포위하고 투항을 권했으나 러시아군을 거절하며 총을 쏘아 반격한다. 청군은 목선에 올라 모조리 죽여버리고, 러시아군인의 가족 15명을 생포한다. 그날 밤, 청군은 자세히 지형을 살펴본 후, 4면에서 동시에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한다. 성의 남쪽에서는 거짓공격을 하면서, 흙으로 방벽을 쌓아 막으면서 화살을 쏘았다. 동시에 홍의포를 가지고 와서 성의 북쪽을 주로 공격한다. 그리고 양날개에서는 신위장군포를 러시아군에 쏜다. 그리고 성의 동남쪽에는 전선을 배치하여 수전에 대비한다. 전투는 하룻밤동안 꼬박 진행된다. 청군의 포화는 러시아군의 성루와 성보의 여러 곳을 무너뜨린다. 성안의 교회, 종루, 점포, 양식창고등에서 불이 붙는다. 불길과 검은 연기가 가득 피어오른다. 전투는 다음날 오전까지 계속된다. 청군은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펑춘은 명을 내려 서을 불태우게 한다. 청병은 야크사성의 바깥 3면에 장작을 쌓는다. 그들이 불을 붙이려 할 때, 토르부신의 코사크부대는 마침내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깃발을 올려 투항한다. 랑탄, 반다르사등이 가서 투항을 받는다.
<팔기통지>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러시아군이 투항한 후, 청군은 강희제의 "인치천하(仁治天下), 소불기살(素不嗜殺)"(인으로 천하를 통치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성유(聖諭)를 받들어, 토르부신일행이 경무기를 휴대하고 네르친스크로 퇴각하도록 윤허한다.그리고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전마와 양초를 제공한다. 토르부신은 이에 대하여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맹세한다: 이 생에 다시는 야크사성을 건드리지 않겠다.
다만 네르친스크성보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안면을 바꾼다. 그는 상사에 보내는 서신에서 전투에서 패배하고 청군의 갖은 학대를 당했다고 적고, 중국의 포로가 되지 않고, 짜르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계속 싸우기 위하여 그들은 야크사에서 도망쳤고, 도망오는 길에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형편없는 모습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실패에 핑계를 찾기 위하여, 고의로 중국의 병력규모를 과장한다. 서신에서 그는 중국의 야크사공격부대는 목선 100척이 있고, 1척당 수군 50명이 있으며, 기병 1000며염이 있어 총인원수가 6000명이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포 100문, 공성대포40문을 갖추고 있으며 대량의 류탄과 경형화기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당시 야크사성내에 포위된 러시아군은 인원수가 겨우 350명(일설에는 450명이라고 한다)이었으며, 성내의 성방어대포는 모두 3문, 탄약약간, 화승총 300자루, 화약과 연탄은 수량이모두 얼마 없었고, 적지 않은 화승총은 이미 낡아서 사격시 폭발하여 러시아군이 스스로 다치기도 했다고 적었다.
실제로 <랑탄전>의 기록에 따르면, 토르부친이 6월 25일 투항할 때, 야크사성내에서 철수한 러시아인은 최소한 600명이다. 여기에는 전사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청군의 참전자수는 3000여명이다. 그중에는 다오르족, 만주족과 몽골족등 부족의 민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청군은 군사장비의 현대화측면에서, 러시아군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청나라군은 대포로 성을 공격했지만, 공성때 최소한 400-500명이 냉병기를 사용했다. 그들은 손애 등나무로 짠 방패를 들고 칼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격했다. 러시아군은 성의 방어가 견고하고 화력이 강했다. 그리고 코사크사병은 거의 전부 화승총을 사용하며 싸웠다. 중국군민에 적지 않은 살상력을 지녔다. 기실 일찌기 1652년 4월의 우자라촌 전투에서 청군은 무기장비의 현대화측면에서 러시아군에 미치지 못하는 결함이 드러났다. 30년이 지났지만, 야크사전투에서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다행히, 강희제는 전쟁전에 정보를 얻고, 양초와 물자를 충분히 준비하였으며, 게다가 북순때 장수를 교체하여 어느 정도 장비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패배하여 퇴각한 후, 청군이 야크사를 수복한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성밖에 남겨둔 곡물을 수확하지 못한다. 그들은 성아래 쌓아둔 장작을 불태우고,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던 야크사성을 모조리 불태워 버린다. 야크사대첩은 강희제를 기쁘게 했다. 강희제는 중국의 북방대환은 이미 제거되었다고 여긴다. 그는 전후에 공로가 있는 대신을 표창하면서 이렇게 말한다:대청은 병력이 정예이고 강하며, 무기는 견고하고 날카롭다. 나찰의 세력이 적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겨우 1개월후에 네르친스크성의 독군 푸라소프는 70명의 코사크소대를 파견하여 야크사성으로 돌아와서 정찰한다. 1685년 8월, 청군의 손에 패한 토르부친은 많은 러시아군을 이끌고 다시 야크사로 돌아온다. 가을이 되기 전에, 그들은 새로 성보를 세웠을 뿐아니라, 대포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중국과 다시 자웅을 겨룰 태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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