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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링지화사건

링지화는 누구 편인가?

by 중은우시 2014. 12. 24.

글: 화파(華頗)

2014년 12월 22일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전국정협부주석, 통전부부장인 링지화가 엄중한 기율위반으로 조직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내놓았다. 이전에 링지화가 심각한 문제로 조사를 받는다는 소문은 인터넷에 널리 떠돌았다. 이번에 그가 '낙마'하였다는 소식은 인터넷에서 떠돌던 소문이 거짓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전 중공중앙 판공청주임, 중앙서기처 서기, 전 중공중앙총서기 후진타오의 비서실장이던 링지화가 이번에 '낙마'하였는데 그 배후에 숨은 비밀은 무엇일까? 그는 후진타오의 적계인가?

 

필자는 링지화의 배경이 아주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통상적인 구분으로 그가 어느 계파의 사람인지를 말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링지화는 "태자당" 이면서 '단파(공청단)'에 속하며, '지방실력파'이면서, '에너지독점집단'에 속하기도 한다. 그래서 링지화는 여러 계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동시에 모두 신임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링지화는 1990년대말에 중공중앙 판공청에 들어가서 후진타오판공실주임이 된다. 2007년 왕강(王剛)의 뒤를 이어 중공중앙판공청주임이 된다. 필자는 당초 링지화가 후진타오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링지화는 여러 계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고, 모두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보면 당초 후진타오가 얼마나 '약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서실장 조차도 스스로 뽑을 권한이 없었다. 후진타오는 당연히 링지화를 받아들인다. 링지화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일처리는 꼼꼼했다. 이 점은 후지타오도 인정했다. 다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과 신임하는 것은 다르다. 링지화의 복잡한 배경으로 그는 시종 후진타오로부터 진정한 신임을 받지는 못한다. 시종 후진타오의 적계가 되지 못했다. 배경이 복잡하여 링지화는 계속 여러 계파의 사이를 오갔고, 각 계파들과 일종이 미묘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는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여러 계파들과 관계를 잘 유지했다. 그는 이렇게 수서양단(首鼠兩端), 좌우요파(左右搖擺)하는 것은 그가 맡은 판공청주임으로서 금기사항이다. 왜냐햐면 중공중앙판공청주임, 즉 중공중앙총서기 후진타오의 비서실장에게는 '충성'이 최우선 덕목이다. 링지화의 충성은 확실히 부족했다. 현임 중공중앙판공청주임 리잔슈(栗戰書)가 판공청업무에 관한 글을 쓰면서 '충성'을 가장 앞에 강조했다. 이것은 아마도 링지화를 간접적으로 얘기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링지화가 중공중앙판공청주임직을 떠날 때, 전국정협부주석, 중공중앙통전부부장직으로 옮겼을까? 통상적인 관례대로라면, 후진타오가 물러나게 되면, 링지화도 당연히 중공중앙판공청주임직을 내놓고 다른 직위로 옮겨가며, 일반적인 경우라면 전인대 혹은 정협의 '부국급(副國級)'의 한직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의외로 링지화는 전국정협부주석을 맡으면서 중공중앙통전부부장이라는 아주 중요한 직무를 겸직했다. 이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링지화가 "보시라이,왕리쥔사건"과 "저우용캉사건"에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요직을 맡은 것은 후진타오, 시진핑이 그에게 내린 포상이라는 것이다.

 

오늘 아침, 공식매체는 간접적으로 2012년 3월 18일 새벽에 발생한 링지화 아들의 "페라리자동차사고"에 관한 소문을 확인시켜 주었다. 다만 또 다른 소문 즉 3월 19일 저우용캉이 무경(武警)을 동원하여 중남해를 포위했다는 소문은 확인되지 않았다. 만일 두번째 소문까지 확인된다면 링지화는 확실히 큰 공을 세웠고, 그 본인도 이로 인하여 참중한 댓가를 치른 것이다.

 

만일 저우용캉이 '궁중쿠데타'를 일으키려면, 자신이 공안부 및 무경부대에 심어놓은 심복으로 하여금 부대를 동원하게 해야 한다. 얼마전에 저우용캉의 비서를 지내고, 공안부의 사단장급 참모가 조사를 받았는데,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이들 부대는 아마도 자세한 상황을 몰랐을 것이다. 저우용캉은 아마도 정정당당한 이유를 내걸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중남해주변의 질서를 유지하고, 중남해주변지구의 안전보위업무를 강화한다"는 등으로 속여서 데려왔을 수 있다. 이들 부대가 저우용캉의 명령에 따라 중남해를 공격하는 것을 받아들일리 없다. 저우용캉이 진정 후진타오를 제압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핵심심복으로 하여금 '특별행동조'를 이끌고 중남해로 진입하게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특별행동조'가 순조롭게 중남해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2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내선(內線)'이 중남해의 대문을 열어주어 '특별행동조'가 들어오게 하고 후진타오의 소재지로 안내해주어야 한다. 둘째, 중남해와 외부와의 일체의 통신연락을 차단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는 링지화가 최적의 인물이다. 저우용캉은 아마도 링지화에게 협조를 요청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링지화는 저우용캉의 요청을 거절했고, 이 생사존망의 순간에 그는 후진타오의 편에 섰다. 아마도 링지화는 저우용캉의 음모를 후진타오에게 보고하고 후진타오는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했을 것이다.

 

저우용캉은 첫번째 방법이 통하지 않자 두번째 행동으로 들어가서 '페라리자동차사고'사건을 일으킨다. 기실 이것은 저우용캉의 조호이산(調虎離山)의 계책이다. 그 목적은 링지화가 자신의 근무지를 벗어나 아들의 자동차사고를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일 링지화가 떠나면 저우용캉은 중남해 내의 다른 '내선'을 통하여 그의 계획을 실현하려 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링지화는 저우용캉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링지화는 자신의 근무지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은 당연히 필자 개인의 추측이다. 진실인지 여부는 공식적인 확인을 거쳐야 한다.

 

시진핑이 반부패행동이 심화되면서, 반대편의 반발도 갈수록 강해졌다. 링지화는 그들의 공격대상이 된다. 반대편이 뜻은 분명했다. 만일 시진핑이 부정부패를 단속한다면 누가 부정부패를 저지르든지 단속해야할 것이 아니냐. 선택적으로 단속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링지화도 잡아넣어라. 시진핑이 링지화를 붙잡아넣을지 말지에 대하여 아마도 망설였던 것같다. 링지화는 어쨌든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래서 시진핑은 링지화를 보호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링정처가 낙마한 후에도 링지화는 빈번하게 매체에 얼굴을 드러낸 이유이다. 어떤 때는 시진핑의 측후방에서 수행하기도 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시진핑이 반부패행동을 더욱 심도있게 진행하려고 하면서 '기득이익집단'과 지방실력파를 붙잡으려 하다보니, 링지화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시진핑은 링지화때문에 국면전체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링지화를 붙잡아 넣은 것은 "읍참마속'의 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링지화가 오늘날의 이런 지경에 처한 것은 그 자신에게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더욱 큰 것은 운명의 장난이다. 링지화는 '비극적 인물'로 운명지워져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