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링지화사건

링지화사건의 수수께끼

중은우시 2014. 12. 25. 01:18

글: 장천량(章天亮)

 

링지화가 낙마하였다. 이는 해외에서 오랫동안 떠돌던 소문을 사실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링지화를 둘러싸고,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 있고 단기간내에 풀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이상한 점들을 열거하고, 추측성의 해석을 내놓아보기로 한다.

 

외부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링지화가 낙마한 것은 "페라리사건"때문이라고 한다. 즉, 아들 링구(令谷)가 페라리를 몰고, 바오푸쓰(保福寺) 부근에서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차도 부서지고 사람도 죽었다. 링지화는 사건을 감추기 위하여, 중앙경위국을 동원하여 현장을 봉쇄하고, 사망자의 신분을 위조하였다. 이로 인하여 저우용캉과 모종의 합의를 달성했고, 저우용캉, 보시라이, 쉬차이허우의 쿠데타집단에 가담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해외에서는 월스트리트저널이 국내에서는 왕치산과 가까운 <재신망>이 보도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점을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3월 18일 "페라이사건"을 전후하여 2가지 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3일전인 3월 15일 보시라이가 정직조사를 받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 날인 "3.19사건"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군용차량이 북경성으로 진입했고, 중남해에서 총성이 울렸다고 한다.

 

페라리사건이 발생한 시간을 보면, 보시라이가 정직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쿠데타집단의 주요구성원이자 시진핑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가 패배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중국관료사회의 규칙으로 보자면, 링지화가 저우용캉, 보시라이의 편에 붙는 것은 필패의 선택이다. 이는 정치적 자살에 다름아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당시의 국면은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링지화는 중앙판공청주임의 신분으로 중앙경위국을 동원하여 저우용캉의 무경부대와 3.19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만일 성공한다면 링지화는 저우용캉,보시라이진영의 대공신이 된다.

 

다만, 링지화는 확실히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변이 실패한 후, 주모자와 참여자들은 금방 조사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났다. 링지화가 9월이 되어서야 돌연 면직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외에서는 계속하여 링지화를 공격하는 매체가 있었다. 그리고 면직된 것은 바로 '페라리사건'으로 후진타오의 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페라리사건'을 돌아보면 의문점이 아주 많다. 링지화는 저우용캉,보시라이가 세력을 잃은 후에 비로소 그들의 편으로 돌아서서 이어지는 쿠데타에 참가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단지 2가지 가능성이다. 한 가지 가능성은 링지화가 일찌감치 저우용캉, 보시라이진영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아마도 링지화는 아예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먼저 첫째 가능성을 얘기해보자. 만일 링지화가 계속하여 저우용캉, 보사리이를 위하여 일했다면(양자의 배후는 쩡칭홍과 장쩌민이다. 이 점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링지화는 분명 왕리쥔 사건을 '대사화소(大事化小), 소사화료(小事化了)하여 흐지부지 처리했을 것이다. 허칭롄 여사는 뉴욕타임즈 보도를 인용하여 중요한 의문점을 제기했다: "왕리쥔이 베이징으로 이송된 후, 링지화가 책임지는 중앙판공청은 비밀리에 수도의 한 부대 의원에 명령하여 왕리쥔에 대한 정신감정을 하도록 했다. 이 병원은 왕리쥔이 간헐성정신문제가 있다고 확인한다. 만일 이 소식이 전파되면 사람들은 분명 왕리쥔이 모살에 관한 주장이나 다른 고발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될 것이고, 보시라이에 유리할 것이다. 보시라이의 친구로 여겨져온 류위안 장군은 보시라이의 요청을 받았지만 정신감정결과를 누설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이미 보시라이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관여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링지화도 이 정신감정결과를 대외에 공표하지 않는다. 이것은 최소한 "3.18"교통사고이전에 링지화, 저우용캉동맹은 형성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저우용캉, 보시라이, 링지화의 삼각동맹이라는 주장은 순전히 헛소리이다."

 

이것은 한가지 논리적인 방증도 있다. 페라리사건이 발생한 후, 교통경찰에게 넘겨서 처리해야 하는데, 교통경찰은 저우용캉의 휘하이다. 만일 저우용캉과 링지화간에 일찌감치 정치적 거래가 있었다면, 링지화는 중앙경위국의 부대를 동원할 이유가 아예 없다. 저우용캉의 전화 한통이면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만이 남는다. 즉, 링지화는 기실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후진타오를 도와서 저우용캉의 "3.19쿠데타"를 분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외의 모 웹사이트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정변이 성공한 후에 총서기를 한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시진핑이 왜 링지화를 체포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링지화는 시진핑이 취임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시라이의 정직을 선포한 것도 링지화였다.

 

"페라리사건"에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다. 즉 도대체 교통사고인가 아니면 암살인가이다. 지금까지도 조사결과는 여전히 흑막에 가려져 있다.

 

만일, 페라리사건이 링지화 정치생애의 전환점이라면, 또 다른 전환점은 9월에 발생한다. 9월 1일을 전후하여 3건의 큰 사건이 벌어진다.

 

첫번째 사건은 8월 30일의 국제항공(CA)회항사건이다. 베이징에서 뉴욕으로 가던 CA981편은 7시간을 비행하여 항로를 절반이상 갔는데 강제로 회항한다. 베이징에 돌아온 후 경찰이 포위했다. 도대체 누구를 잡으려 하고 누구를 잡았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다만 9월 1일, 링지화는 중앙판공청주임직위에서 면직당하고, 통전부부장으로 옮겨간다. 그후 9월 5일 시진핑은 원래 예정된 미국국무장관 힐러리와의 면담을 취소하고 10여일동안 실종된다.

 

이때는 "18대"가 개최되기까지 2개월이 남은 때였다. 후진타오의 권세는 그의 10년 집권생애중 최고봉에 이른다. 확실히 그는 시진핑과의 결맹을 통하여 보시라이를 잡아넣고, 이미 태자당의 지지도 확보했다; 궈보슝과 쉬차이허우는 연이어 후진타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저우용캉은 "3.19사건"이후 이미 권력을 멍젠주(孟建柱)에게 이양해주었다. 당내에서 정상적인 조직채널을 통하여 후진타오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없었다. 동젠화(董建華)는 심지어 후진타오가 군사위원회 주석을 연임하려고 준비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후진타오가 왜 비서실장인 링지화를 보호해주지 않았을까?

 

이런 문제는 해외의 각종 보도에 기초하여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가능한 한 가지 상황은 이렇다. 중국에는 부패하지 않은 관리가 없다. 만일 링지화가 큰 탐관오리라면 그것도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시진핑이 쿠데타집단을 제거하는 명분은 반부정부패이다. 외부에서는 이를 권력투쟁으로 본다. 그러므로, 시진핑은 쿠데타집단 바깥의 사람을 침으로서 그가 하려는 것이 반부정부패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후진타오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링지화와 일찌감치 선을 그은 것이다. 장쩌민이 저우용캉과 한데 묶여서 끌려가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만일 시진핑이 친 것이 쿠데타집단 밖의 사람이라면 시진핑은 현재 이미 여유가 생겼고, 쿠데타집단은 반격할 힘을 이미 잃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는 원래의 기세로 계속 제거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장쩌민과 쩡칭홍은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게 된 것이다.

 

만일 링지화가 정말 대간사충(大奸似忠)의 인물이어서,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사이에서 이중간첩역할을 했다면, 링지화의 낙마는 실은 장쩌민을 향한 것이다.

 

최근 시진핑은 군대내의 직위를 대폭 조정했다. 최근 들어 40여명의 군단장급이상의 간부가 이동되었다. 특히 무경사령관과 정치위원은 동시에 교체되었다. 이는 통상적이지 않은 일이다. 이어서 궈보슝과 창완췐(常萬全)의 스캔들이 터졌고 두 사람은 이미 낙마하거나 조사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필자는 여전히 시진핑이 겨냥한 다음번 목표는 중요한 장쩌민계의 정치국상임위원 혹은 군대내 우두머리라고 본다. 장쩌민 쩡칭홍집단을 철저히 분쇄할때까지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