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당보민(唐寶民)
양진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먼저 그가 유명한 '사지태수'라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청렴을 천하에 이름떨치게 만든 유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저녁에 한 사람이 양진에게 뇌물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밤이고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양진이 말한다: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할 것인가?"
기실, 양진에 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그가 청렴하기때문만은 ㅏ니다. 그가 감히 직언할 수 있는 쟁신(諍臣)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귀족에 굴복하지 않고, 여러번 상소를 올려 시정의 폐해를 직언하고, 심지어 이로 인하여 목숨까지 잃는다.
양진은 자가 백기(伯起)이며 동한(東漢)의 명신이다. 형주자사, 동래태수, 사도(司徒)등의 직을 역임한다. 성격이 강직하고, 황상에게도 직언을 했으며, 불공평한 일이 있으면 바로 말했고, 권력귀족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체면을 봐주지도 않았다. 한안제(漢安帝)의 유모 왕성(王聖)은 한안제를 길러준 공이 있어서, 전혀 거리낌없이 여러가지 불법적인 일들을 많이 저지른다. 사람들은 한안제의 체면을 보아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양진이 나섰다. 그는 글을 올려 이렇게 말한다: "아모(阿母) 왕성은 출신이 비천하나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 황상을 길러주었습니다. 비록 폐하를 부양하면서 고생을 하였으나, 폐하는 그녀에게 여러번 상을 내려서 부와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는 이미 그녀의 공로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욕심이 많아서 만족하지 못하고, 자주 조정신하들과 교제하면서 뇌물, 청탁을 받아 천하를 교란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청정한 명성이 훼손되고 있으니 이는 해와 달에 먼지가 앉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모를 궁에서 반드시 내보내 그녀가 바깥에 거주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야 은정과 덕행이 모두 보전될 수 있을 것이고, 폐하와 아모에 모두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한안제는 나중에 그가 쓴 주절(奏折)을 아모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아모등은 양진을 뼛속까지 미워하게 된다.
왕성의 딸 백영(伯榮)은 이미 사망한 조양후(朝陽侯) 유호(劉護)의 먼친척 당형(堂兄) 유괴(劉瑰)와 붙어 간통을 했다. 한안제는 유귀로 하여금 유호의 작위를 승계하게 하여 관직이 시중에 이른다. 이에 대하여 양진은 결사반대한다. 다시 한안제에게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신이 듣기로, 천자는 공로가 있는 신하만을 봉하여야 합니다. 제후는 덕행으로 작위를 얻어야 합니다. 유괴는 아무런 공로나 덕행이 없습니다. 겨우 아모의 딸과 짝이 된 연고로 일시에 관직이 시중에 올랐고, 다시 후에 봉해지다니, 이는 고조께서 정한 옛법도에도 어긋나고 도의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의론이 분분하고 백성들도 무슨 일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역사를 거울로 삼아, 제왕이 마땅히 따라야할 법도에 따라 일을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인심이 다독여지고, 천하가 안정될 것입니다." 아쉽게도 한안제는 여전히 그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다. 번풍(樊豊), 주광(周廣), 사운(謝惲)등은 양진이 연이어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더 이상 거리낌없이, 대거 대사농(大司農)의 돈과 식량, 대장의 일꾼, 목재를 가져가서, 호화주택, 정원과 연못, 누각과 정자등을 짓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를 계산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양진은 이에 다시 상소를 올린다: '작년 십이월 사일, 경성에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가까운 근신들이 교만방자호화사치가 법률의 한계를 넘어서서 대량으로 일꾼을 데려가서, 저택을 짓고, 위세를 부려서 행인들이 길에서 시끄럽게 떠들게 만들었습니다. 지진의 재난은 아마도 이것때문에 일어난 것일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제왕의 양강지덕(陽剛之德)을 떨쳐서, 교만방자호화사치의 근신들을 버리시고, 하늘의 경고를 받아들이시옵소서." 번풍등은 이로 인하여 양진을 반목질시하게 되고, 더욱 미워한다.
얼마후, 하간(河間)의 남자 조등(趙騰)이 상소를 올려 조정의 득실을 비판하자 한안제는 분노하여 조등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고 심문한다. 그에게 기군망상, 대역무도죄를 씌운다. 양진은 즉시 상소를 올려 조등을 옹호한다: "조등에게 감형해주어 그의 목숨을 부지시켜 줄 것을 청구합니다. 그리하여 초야의 백성들도 나라를 위하여 진언할 수 있게 하시옵소소." 그러나 한안제는 듣지 않는다. 조등은 결국 사형을 당한다.
한안제가 동방을 순시할 때, 번풍등은 황상이 바깥에 있는 틈을 타서 앞다투어 저택공사를 버린다. 태위부연(太尉部掾) 고서(高舒)는 대장령(大匠令) 사순(史詢)으로 하여금 조사하게 시킨다. 그리하여 번풍등이 위조한 조서를 확보한다. 양진은 모든 상황을 상소문으로 써서, 한안제가 도성으로 돌아온 후에 올릴 준비를 한다. 번풍등은 크게 당황하여, 한발 앞서 상소문을 올려 양진을 모함한다: "조등이 죽은 후, 양진은 크게 불만을 품고 있고, 그는 등씨(鄧氏)가족의 옛 사람이어서 원한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결국 한안제는 참언을 듣고, 낙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에, 사자를 보내어 양진의 태위 인신을 회수한다. 양진은 이로 인하여 집의 문을 걸어잠그고 더 이상 손님들을 만나지 않는다.
번풍등은 대홍려(大鴻臚) 경보(耿寶)를 시켜 상소를 올리게 한다: "양진은 원래 대신으로 죄를 달게 받지 않고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한안제는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결국 양진을 원군(原郡)으로 돌려보낸다.
양진은 낙양성 서쪽의 석양정(夕陽亭)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아들과 제자들에게 말한다: "죽음은 선비가 통상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나는 황은을 입고 높은 관직에 있었으며, 간신들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미워했다. 그러나 징벌할 수가 없었다. 음탕한 여인이 작란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얼굴로 다시 해와 달을 보겠는가. 내가 죽은 후, 잡목으로 관을 만들고, 이불로 싸라. 몸만 덮으면 된다. 조상의 묘에 묻지도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리고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직신(直臣)이 이렇게 죽자 길가던 행인들까지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세계에서 눈치를 살피며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개인의 안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직언할 수 있는 용사는 많지 않다. 이런 분위기가 농후하고 습관의 힘이 지배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감히 거리낌없이 직언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숭고한 덕행이고, 용감한 장거이다. 양진은 직언으로 인하여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적인 품격은 영원히 역사의 하늘에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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