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17세기 중국과 러시아의 대결

중은우시 2014. 12. 12. 20:44

글:손월(孫越)

 

17세기 중엽, 코사크는 중국변방을 침범하고 괴롭혔는데 갈수록 심해졌다. 1652년 4월 3일 새벽, 중국과 러시아는 흑룡강 우자라촌(烏扎拉村)에서 격전을 벌인다. 중국의 통치자는 마침내 북방의 외환을 의식하게 된다. 1653년 6월 청나라정부는 수군과 기병을 송화강으로 보내어 코사크의 두목 제파노프(捷潘諾夫)를 포위 소탕한다; 1654년에는 명안달례(明安達禮)를 파견하여 경사에서 부대를 이끌고 침입한 러시아인을 토벌했다; 1659년에는 청나라의 장군 사이호달(沙爾瑚達)은 1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화강유역의 코사크침입자를 포위소탕했다. 1660년에는 청나라군이 코사크에 강제점령당했던 아크사성채를 수복한다. 이후 이 지역에서 러시아 코사크무장의 침입은 잠시 없어진다.

 

다만, 제정러시아의 대중국정책은 일관되게 교활하고 간사했다. 제정러시아는 한편으로 중국북방에서 피와 불의 약탈을 시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국에 공개적인 외교를 내세워 비밀리에 간첩활동을 한다. 중국의 정치에 침투하고, 러시아는 중국이라는 동방시장을 개척하여 러시아의 부속시장으로 삼고자 했다. 1618년 8월말 혹은 9월초 제정러시아의 특사 피터린(彼特林)이 중국에 사신으로 온다. 그가 떠날 때, 명나라정권은 그에게 국서 1부를 주어 짜르에게 전하도록 한다. 거기에서 중국은 러시아와의 통상에 동의한다. 누가 알았으랴. 러시아의 조정내에 한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 국서는 왕궁에 반세기나 그냥 보관되어 있었고, 아무도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제정러시아는 계속하여 머리를 짜내어 대중국통상로를 열려는 전략을 세운다. 1644년 청나라군대가 산해관을 넘어 들어오고, 명나라는 멸망한다. 그 해는 보야코프(波雅科夫) 코사크원정대가  흑룡강유역을 유린하고 있을 때였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간의 우자라(烏扎拉)전투 및 나중의 야크사전투의 원인이 된다.

 

1654년, 청군은 대규모로 흑룡강과 송화강유역에서 사하로프 잔당을 소탕한다. 제정러시아의 짜르는 페도르 바이코프를 사신으로 북경에 보낸다. 공개적인 사명은 제정러시아의 대중국 '친선우호'를 표시하는 것이지만, 암중으로 그는 첩보활동을 한다. 중국이 러시아에 사신을 보낼 수있을지와 통상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청나라의 군사장비, 재정, 교통, 인구와 도시등의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강희6년(1667년), 다오르족 솔론부의 좌령 건터무르는 부하 40명을 데리고 제정러시아가 점령한 네르친스크(니부추)로 도망친다. 그리고 300여명의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청나라에 항거하고 러시아를 도와 코사크침입자들이 중국변경을 교란시키는 것을 도운다.  강희9년(1670년), 강희제는 짜르에게 강경한 태도의 국서를 보내어, 건터무르를 중국에서 재판받도록 인도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짜르는 이를 거절한다. 1670년 4월 하순, 짜르의 특사 미로바노프가 짜르의 훈령과 국서를 가지고 북경으로 온다. 훈령에서는 러시아인들의 협상안이 명시되어 있었다. 건터무르를 인도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리고 그가 중국에서 저지른 범죄를 변호한다. 그리고, 중국이 통상의 문을 열도록 요구한다. 국서의 마지막에는 협박조로 쓰여 있었다. 대청이 만일 짜르에 귀순하지 않으면, 일거에 소멸시킬 것이며, 중국인은 영원히 짜르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국서가 이렇게 중국을 모욕하는 내용으로 쓰여 있었지만, 유감스러운 점은 당시 조정에 러시아어 통역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국서를 그냥 받아준다. 그 결과 미로바노프의 방문은 양국관계를 개선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키고 만다.

 

1675년, 짜르는 라신의 반란과 서유럽과의 무역이 부진하여 타격을 입자 대중국통상을 서두르게 된다. 그해 3월, 미리에스쿠를 대사로 삼아 160명의 거대한 외교사절단이 북경으로 온다. 미리에스쿠는 러시아인으로 저명한 학자, 번역가, 외교가 겸 지리학자이다. 짜르가 그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뛰어난 정치음모가라는 점이다. 미리에스쿠는 일찌기 몰도비아왕조에서 일을 했는데, 기회를 틈타서 황위를 찬탈하려다가 나중에 처벌을 받아 코가 잘려서 축출당한다. 나중에 예루살렘교회의 소개로 러시아외교부에서 통역을 지냈다. 그는 루마니아어외에 러시아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프랑스어, 라틴어, 터키어, 고대그리스어에 능통했다. 

 

미리에스쿠는 음모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시베리아와 바이칼호를 거쳐 중국으로 오는 도중에 먼저 러시아에 망명한 건터무르를 만난다. 미리에스쿠는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절대로 그를 중국에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그에게 계속하여 러시아를 도와 청왕조에 대항하도록 격려한다. 다음으로, 미리에스쿠는 오는 길의 군사정보를 짜르에게 서신으로 보내어 중국이 '삼번의 난'으로 곤경을 겪고 있으므로 2000명의 병력을 보내어 북방의 다오르족을 평정하고, 최종적으로 장성까지 진격하여 중국의 북방을 차지하라고 건의한다. 그는 짜르에게 재촉했다: "현재가 바로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입니다."

 

1676년 3월 12일, 미리에스쿠는 중국국경을 넘는다. 대청의 예부시랑 마라(馬喇)가 넌강으로 가서 그를 영접한다. 마라는 미리에스쿠에게 짜르가 건터무르를 인도하고 중국북방을 침범하지않는 건에 대하여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묻는다. 미리에스쿠는 이렇게 답한다. 그는 이 두 가지 건에 대하여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마라는 그가 교활하고 말에 신용이 없는 것을 보고는 국서에 또 다시 중국을 모욕하는 내용이 있을까 의심한다. 그래서 그는 미리에스쿠에게 짜르의 국서를 보겠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미리에스쿠는 거절한다. 짜르의 국서는 반드시 강희제에게 직접 전달되어야 한다는 이유를 대었다. 마라가 그 내용에 대하여 묻자, 미리에스쿠는 그저 중국과 러시아의 친선을 표시하는 것이지만 이 말을 마라의 앞에서 문자로 증명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미리에스쿠는 나중에 글을 써서 거짓으로 말한다. 중국관리가 국서를 받지 않으려 했는데 그것은 국서가 러시아어가 아닌 라틴어로 쓰여 있기 때문이라고.

 

1767년 5월, 미리에스쿠가 북경에 도착한 후, 청정부는 먼저 짜르의 국서를 예부로 보내어 번역하게 하고, 그 후에 다시 강희제에게 올리고자 한다. 미리에스쿠는 다시 거절한다. 그는 국서는 그저 직접 강희제에게 전달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짜르의 존엄과 관련이 있다고 얘기한다. 청나라관리는 그와 말로 다투었는데, 그는 중국관리들에게 러시아가 '삼번의 난'을 기화로 삼아 청나라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협박한다. 짜르의 사신이 북경에서 이렇게 광망한 말을 내뱉으니 모두 깜짝 놀란다. 국서를 바치는 문제가 6월까지 해결되지 않고 질질 끌게 된다. 청나라조정은 다시 타협하여, 러시아인의 요구를 만족시켜준다: 조정은 오문에 황색비단의 어안(御案)을 준비하고, 짜르의 국서를 받겠다고. 3일후 미리에스쿠는 자금성으로 들어가 강희제를 만난다. 그와 러시아관리들은 삼배구고후에 황상이 내리는 차를 받는다. 다시 이틀이 니나서, 미리에스쿠는 강희제와 단독으로 만날 기회를 얻는다. 그후에 중국관리는 그와 담판하면서 계속하여 청나라정부는 건터무르의 인도와 북강변경침입을 중단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말한다. 미리에스쿠는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벌컥 화를 내는 등 정면으로 이에 대답하지 않는다. 미리에스쿠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와서 남긴 기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관리들은 담판때 각종 러시아의 나쁜 짓을 열거하면서 '인도와 정전'을 요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1676년 9월, 미리에스쿠가 사절단을 이끌고 귀국하기 전에 중국측은 그에게 3가지 요구를 한다. 인도와 정전을 제외하고, 또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국에 사신으로 오는 자는 반드시 이치를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중국측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중국에서 법도를 지키지 않은 미리에스쿠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원래, 미리에스쿠는 중국에 사신으로 와 있는 동안 간첩행위까지 저지른다: 그는 강희제의 과학선생이자, 대청 흠천감(천문대)의 최고책임자로 관직이 정2품에 이르는 공부시랑 남회인(南懷仁)을 만난다. 남회인은 벨기에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이다. 남회인은 그때 로마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북경에 이르는 선교노선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래서 미리에스쿠에게 잘보이려 애썼다. 그는 개인적으로 그려둔 중국지도를 미리에스쿠에게 주고, 청나라정부의 흑룡강성 군사정보도 절취하여 라틴어로 미리에스쿠에게 전해준다. 그들의 행위를 대청에서 몰랐을까?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미리에스쿠를 국경까지 호송한 마라는 헤어질 때 미리에스쿠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이후에는 더 이상 중국을 침범하는 일을 하지 말라."

 

마라의 말에는 말 속에 뼈가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인으로서는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미리에스쿠는 귀국하자마자 짜르에게 보고하여 중국 어얼구나강과 하이라르지구로 군대를 주둔시키도옥 재촉한다. 그렇게 하여 네르친스크와 넌강유역의 부족을 제정러시아로 귀속시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청군은 군사과학을 모른다. 러시아가 소규모부대만 파견하더라도 중국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