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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강건성세: 산업혁명과 르네상스를 만났을 때.....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아억(阿憶)

 

강희제는 외국의 조공을 아주 좋아했다. 그것은 변방이 중앙에 대하여 공순(恭順)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서방의 과학기술 공물도 그에게 특별히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과학기술을 완전해 배척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과학사상이 사회변혁에 가져다주는 역량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희제가 <빅뱅이론>의 셀든 박사를 만나면 서로 얘기가 통할 것인가?

 

강희제는 매일 아침 일찍 어두울 때 일어나서, 물리, 천문, 지리를 공부하고, 하루종일 망원경과 수평의(水平儀)를 가지고 논다. 같은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맞다. 강희제는 셀든 집의 거실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강희제의 현대과학에 대한 열정은 중국의 유사이래 모든 황제들보다 많았다. 그 때, 이미 서방 선교사들이 궁정에 와 있었고, 황제에게 서방의 선진적인 과학성과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지식욕이 왕성한 어린이처럼, 접촉하자마자 바로 거기에 빠져버린다. 그는 6명의 프랑스과학자를 초청하여 과학고문으로 모시고, 매일 많은 시간을 들여 그들에게 과학을 배운다.

 

강희제는 수학과 기하학에 특히 흥미를 나타냈다. 그에게 수학을 가르쳤던 벨기에 선교사 남회인(南懷仁)을 이렇게 쓴 바 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나는 궁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즉시 강희제의 내전으로 불려가고, 보통 오후 3,4시경이 되어야 물러난다. 나는 단독으로 황제와 함께 있으며 그에게 책을 읽는 것을 도와주고, 각종문제를 풀어준다."  또 다른 프랑스 선교사 백진(白晋)은 프랑스황제에게 보고하면서 강희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어떤 때는 그가 친히 기하방법으로 거리를 측량한다. 산의 고도와 연못의 너비를 자신의 위치와 각종 기기를 조정하여 정확하게 계산한다. 그 후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거리를 측령하게 하고는 그가 계산한 결과와 다른 사람이 측량한 수치가 부합하면 그는 아주 기뻐한다." 강희제가 남순할 때, 일찌기 바지를 걷고 친히 강물에 들어가서 기기를 들고 수위(水位)를 측량한 바 있다. 신뢰할 만한 데이타자료를 가지고, 정확하게 치수공사를 감독했다. 아마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이런 일을 왜 곁에 있는 호위무사나 태감에게 시키지 않았느냐고. 아주 간단하다. 그들은 모두 측량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프랑스 선교사로 하여금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트의 <기하원본(기하학원론)>을 만주어로 번역하게 시킨다. 선교사들은 만주어가 뛰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강희제는 만주어 번역본의 문구를 친히 고쳐서 강희의 어필 비홍(批紅)과 전조(箋條)가 있는 만주어 <기하원본>원고를 남긴다. 이는 지금까지 내몽고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가 오늘 자주 쓰는 수학용어인 원(元), 차(次), 멱(冪), 근(根), 해(解)도 모두 강희제가 외국선교사들과의 교류를 편하게 하기 위하여 친히 만든 것이다.

 

2003년, 프랑스 베르사이유궁에서는 강희시대에 중국에서 만든 여러가지 정밀한 서양과학기기를 전시한 바 있다. 거기에는 수요계산기(手搖計算機)가 있는데, 가감승제의 계산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회도의(繪圖儀), 각척(角尺), 비례규(比例規)도 있는데, 모두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강희제가 과학기술을 좋아한 것은 그저 놀이로서 였다. 그는 과학기술이 인류문명의 중대한 추진작용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손자인 건륭제도 이 점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건륭제는 심지어 서양과학기술을 모조리 "기기음교(奇技淫巧)"라고 평가절하했으며, "서양의 제품들 중에 종표(鐘表, 시계) 하나는 배울 점이 있지만, 나머지는 모조리 우리 중화상국에 훨씬 못미친다." 건륭이 흥미를 보인 것은 시를 짓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구분법으로 말하자면, 강희와 건륭은 하나는 전형적인 이과생으로 셀든과 공동언어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는 전형적인 문과생으로 셀든과 만나서 말을 하더라도 불꽃이 튀지 않을 것이었다.

 

일반인의 관념에서, 강희,건륭은 모두 업적이 있는 좋은 황제이고, 강건성세(康乾盛世)를 개창으나, 단지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서태후의 화란으로 청나라조정은 서양열강과의 싸움에서 일패도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이 과연 그러한가?

 

확실히, 강희, 건륭은 통치에 힘을 써서 열심히 했고, 크고 작은 반란을 평정했으며, 생산을 발전시켜서 그 이전이나 이후와 비교하면 많이 좋았다. 다만 소위 '강건성세'를 전세계의 큰 배경하에서 보면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것은 되지 않는다.

 

순치6년, 영국의 부르조아혁명으로 영국국왕 찰리1세가 단두대로 보내어지고,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강희42년, 러시아의 짜르 피요트르 1세는 네바강의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델타위에 작은 나뭇집을 짓는다. 나뭇집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개방항구를 건설하고, 유럽의 과학기술성과를 대거 도입한다. 옹정11년, 영국인은 북(fly shuttle, 飛梭)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의 서막을 연다. 건륭54년,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한다. 즉, 중국은 천조상국의 아름다운 꿈에 빠져 있을 때, 외부 세계는 이미 천번지복(天飜地覆)하고 있었다.

 

강희건륭 130년동안 청왕조는 유목문명의 농경문명으로의 전환을 완성한다. 농경사회의 생산방식은당시의 생산력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산업사회의 생활방식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강희제는 과학기술에 열정을 지녔으나, 그는 과학기술의 보급은 중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은 산업사회의 것이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여러번 엄격한 '금해령(禁海令)'과 '천해령(遷海令)'을 반포하고, "어떤 배도 바다로 나갈 수 없다"고 명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 이런 폐쇄적인 법령은 해외무역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며, 청나라를 다른 세계국가들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강희제는 서방의 위협을 인식했을까? 강희55년의 공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해외 예를 들어 서양등 국가는 천년백년후에 중국이 그들로 인하여 피곤해질 것이다. 이것은 짐이 예상하는 말이다."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의 예언이 실현되었고 그것도 무지하게 빨리 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륭제는 전혀 위기감이 없었다. 말투도 건륭제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칙유영길리국왕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천조는 물산이 풍성하여 없는 것이 없다. 원래 외국의 물건을 받아서 무역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이런 대국의 자신감은 중국으로 하여금 좋은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고, 서방에 멀리 낙후되게 만든다. 중국은 그후 150년간 쇠락세를 보이는데, 바로 고보자봉(固步自封)의 강건성세때 그 씨가 뿌려진 것이다.

 

1793년, 강대한 대영제국은 융중한 사절단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중국까지 온다. 81세의 건륭제에게 생일축하를 하고, 그 기회에 통상을 하고자 한 것이다.

 

영국이 보낸 사람은 경험이 풍부한 매카트니이다. 그는 건륭제에게 600건의 선물을 90량의 마차에 실어서 가지고 온다. 중국에 온 후, 사절단은 예상했던대로 대청제국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건륭은 두 조정의 고위관리를 보내어 천진 대고구에서 영접하게 한다. 중국인들이 준 선물과 먹을 거리가 너무 많아서, 사절단의 배에 다 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득이 남는 것은 돌려주게 된다.

 

매카트니는 원래 순조롭게 사명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건륭제가 황궁에서 그를 친히 접견하지 않고 황실수렵장의 장봉(帳蓬)에서 그를 만나줄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중국황제에게 삼궤구고(三九叩)의 예를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영국인에게 있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다. 매카트니는 절하는 것을 거절한다. 이에 온 나라가 깜짝 놀란다. 쌍방은 협상을 거쳐, 각각 한 발씩 물러나서, 영국인이 한 무릎을 꿇는데 동의하여 억지로 접견을 진행한다.

 

그후, 중국인의 영국인에 대한 태도는 급변한다. 그들의 식탁의 요리는 2/3가 줄어들었고, 나머지도 먹을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풍부한 공급량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심지어 영국인들이 머무는 객실의 등급도 한 단계 낮추어버린다. 당연히, 매카트니는 양국통상의 건의를 내놓는다. 그러나 건륭제는 한 마디로 거절한다.

 

영국인들은 아주 불쾌해 했다. 재수없게 생각없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청나라가 왜 이렇게 했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영국사절단이 중국에 온 목적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신하국가가 군주국가에 공손함을 표시하러 온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멀리서 온 작은 나라의 앞에서 중앙제국의 호호탕탕한 위엄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영국사절단을 영접하기 위하여, 건륭제는 친히 접대업무를 안배했고, 대신이 배 위에 걸었던 깃발에도 "홍이진공(紅夷進貢)"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오랑캐들을 위하여 먹을 것과 일용품을 계속 공급해 주었다. 사절단내의 기술자, 호위병, 시종들에게도 모두 한 몫씩 나누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개화하지 못한 양귀자(洋鬼子)는 그런 뜻도 모르고,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을 뿐아니라, 통상을 하자고 요구했다. 이는 중앙제국과 대등하게 무역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너무나 자신을 모르는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절을 하는 문제로 씨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중국과 영국의 대화가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불가능했다. 이번에 영국은 준비를 잔뜩 해서 왔다. 요구사항이 많았다. 정상적인 통상이외에, 감세, 여러 무역도시의 개발, '땅을 내주는 것'도 있었다. 가져온 선물 중에는 총포모형이 많았다. 목적은 강대한 군사력을 암시하면서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없는 청나라황제는 이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무식하면 묭감한 법이다. 그저 우리는 지대물박하니 뭐든지 다 있고, 너희들이 가져온 것은 눈에 차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아편전쟁을 얘기하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것같다: 청나라의 이전 황제들 강희, 건륭은 모두 '위대한 황제'이나, 그 이후의 황제들 도광, 함풍, 동치는 하나하나 유약하고 무능하여 결국 외국인들에게 당했다. 그래서 자주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이렇게 묻곤 한다. 만일 아편전쟁이 건륭제때 발발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다시 쓰여지지 않았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건륯치하의 중국은 중국역사상 인구가 가장 많고, 국력이 가장 강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 스스로 강대하고 부유하다고 자부하는 천조상국도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외강중건(外强中乾)으로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1792년, 영국의 매카트니사절단이 영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건륭을 접견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신경을 많이 썼다. 그들은 건륭에게 생일축하한다는 명목을 내걸었다. 그리고 유럽의 과학기술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선물을 가져갔다. 사절단의 규모와 선박의 설계에서, 황제의 입맛에 맞게 하였따. 쌍방이 만났을 때, 비록 절을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툼이 있었찌만, 천조상국의 체면을 고려하여, 건륭은 사후에아주 시원시원한 태도를 보인다. 통계에 따르면, 건륭이 이번에 영국인들에게 하사한 예물은 모두 130종, 3000여건이다.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저대비는 영국사절단이 사후에 계산해본 바에 따르면 50만냥백은이 넘었다. 오늘날의 인민폐로 환산하면 1억위안이 넘는 셈이다. 이처럼 손 큰 하사품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반대로, 이번에 근거리에서 중국과 접촉한 후, 매카트니는 느꼈다. 청나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강대하지만, 실로는 허약하다는 것을.

 

매카트니사절단이 내방하기 전에, 건륭제는 국위를 선양하기 위하여 정교하게 준비한다. 무릇 영국인이 지나가는 곳에서 청나라군대는 반드시 완전무장하여 줄을 서서 영접하라고. 그러나, 건륭이 보기에 기율이 엄정하고, 장비가 양호하고, 훈련이 잘된 청나라병사들을 보고 열국인들은 엉터리라는 인상을 받는다. 영국인들이 본 것은 청나라병사들이 자주 부패를 들고 훈련을 하고 있다. 만일 사절단이 미리 예고하지 않고 방문하면, 청나라병사들은 질서없이 혼란스러웠다. "황급히 군영으로 들어가서 명절에 입는 예복을 꺼낸다. 그들이 이런 복장을 입은 후의 모습은 전쟁터의 무사라기보다는 그저 연극무대의 배우같았다. 그들은 꽃을 수놓은 배심(背心), 비단신발, 포선, 겉으로 보기에 멍청해 보였고, 여성스러움이 묻어났으며, 군인기질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청나라의 무기장비가 낙후되었다는 것이다. 매카트니가 건륭의 제국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바꾸어 말하면, 아편전쟁이 앞당겨 졌다고 하더라도 건륭은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매카트니는 귀국한 후 영국인들에게 말한다. 중국황제와 관리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고 스스로를 모르고 있다. 누구를 보든지 오랑캐로 여기고 다른 나라와 정상적인 무역을 할 생각이 없다. 이런 국가는 겉으로 보기에 강대하고 부유해 보이지만, 안으로는 아주 허약하다. 앞날이 없는 국가이다. 시종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으로는 영국하원의원 스탠튼 주니어가 있다. 이 저명한 영국의 한학자는 매카트니를 따라 중국을 방문할 때 겨우 14살이었다.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건륭제와 교류할 때, 건륭의 하사품을 받게 된다. 중국에 가장 직관적인 느낌이 있어서, 그는 1840년 영국하원에서 중국에 출병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이 벌어질 때, 이렇게 말한다. 무력을 사용하는 것만이, 중국의 대문을 열 수 있다고. 왜냐함녀 중국인들은 지금까지 망자존대(妄自尊大)하여 스스로 잘난줄 알고 있어서, 그들과 이치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결과를 얻으려면, 담판을 하는 동시에, 무력을 과시해야 한다."

 

결국 영국하원에서 투표를 하고, 271표대 262표로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결의가 통과된다.

 

건륭이 죽은 후 41년만에, 아편전쟁이 발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