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1650년 짜르는 왜 중국에 선전포고했는가?

중은우시 2015. 1. 1. 18:46

글: 손월(孫越)

 

중국-러시아 변경관광프로젝트중에 일찌감치 하바로프스크시를 관광하는 것이 있었다. 그 곳은 바로 중국인들이 가슴아파하는 백력성(伯力城)이다. 하바로프스크의 기차역광장에는 하바로프(1603-1671)의 조각상이 서 있는데, 러시아인들은 그를 하바로프스크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이 조각상은 전체 높이가 11.5미터에 달하고, 조각상인물의 키는 4.5미터이다. 작가의 뜻은 기차역에 내리자 마자 소위 도시창건자의 검열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조각상은 소련정부가 1958년 하바로프스크시 건설100주년을 기념하여 건설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하바로프스크는 일찌기 중국의 땅이었다. 10세기 후반, 중소양국은 친선우호관계에서 중국은 이 도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마다 좌우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소련은 그렇지 않았다. 하바로프의 조각상을 만들 때, 양국은 아직 밀월기였다.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흑룡강에서 살인방화를 저지른 도적두목을 기념했다. 이를 보면 그들은 역사에 대하여 자신들이 하고 싶은대로 할 뿐, 중국인들의 감정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8년 하바로프의 조각상을 건립할 때, 소련 모스크바의 조각가 루카비스니코프는 하바로프의 인물모습에 관한 자료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국가자료관에도 아무런 기재가 없었다. 그래서 조각가는 쩌르의 명을 받아 멀리 중국을 원정한 "새로운 영토의 개척자"를 이런 이미지로 만들었다: 하바로프는 바위를 오르며 멀리 동쪽의 흑룡강쪽을 바라본다. 작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제정러시아시대에서 소련시대로 접어들면서, 러시아인들은 하바로프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기념수법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기념비 이외에, 일찌기 1909년 러시아는 철로간선에 하라로프역을 만들었다: 소련의 각지방 예를 들어, 하바로프스크, 이르쿠츠크, 부라츠크, 우스지쿠트, 아리룬바오, 츠타에 모두 '하바로프'라고 명명된 거리가 있다. 하바로프스크는 '하바로프'라는 이름의 하키대회도 연다. 일찌기 1925년, 러시아작가 바흐루선은 저서 <흑룡강위의 코사크>라는 책에서 하바로프등이 중국을 침략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추켜세웠다. 1969년, 소련작가 로마넨코는 <하바로프전>을 출판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1983년에는 소련작가 사푸론노프가 하바로프스크시 건립125주년을 기념하여, <하바로프: 신토지발견자운명의 이야기>라는 책을 써냈다.

 

1645년 5월말, 흑룡강을 침입한 보야코프 코사크원정대는 연이은 침패를 겪고 나중에 나룻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러시아로 도망친다. 몇년이 지난 1649년, 하바로프라는 졸부가 중국흑룡강유역의 원정에 참가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현지의 봉건지주와 상인들의 자금지원을 받아, 자비로 새로운 원정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보야코프의 뒤를 이어 침략사업을 전개하고, 짜르의 확장정책에 호응한다. 그때 하바로프는 도둑질로 감옥에 들어갔다 석방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고 이르쿠츠크에 살고 있었으며 당시 나이 46살이었다.

 

하바로프가 자비라고는 하지만 기실 현지인들로부터 받은 자금지원은 얼마 되지 않아 원정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진실한 목적은 원정대를 조직한다는 명목으로, 이익을 취하자는 것이다. 그해 봄, 하바로프는 한편으로 신임 독군 프란츠베코프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서신을 보내어 다시 원정대를 조직하여 흑룡강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 신비롭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오류크마강과 퉁구지르강에서 흑룡강까지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 하바로프는 초보적인 윤허를 받은 후 시기를 놓치지 않고 구체적인 요구조건을 내놓는다. 그에게 150명의 원정대대원을 모집하여 지휘하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중국으로 가는 비용, 선박, 양초와 탄약은 모두 그가 개인적으로 조달하겠다고 말한다. 하바로프는 원정에서 실현하려는 목표는 바로 흑룡강유역에서 이미 중국에 귀순한 다오르족 수령 라푸카이를 짜르에 귀순시키고 짜르에 공물을 바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프란츠베코프는 극단적인 확장주의분자였고, 하바로프의 서신은 바로 그의 뜻에 들어맞았다. 그는 바로 하바로프를 원정대 대장에 임명한다. 1649년 3월, 프란츠베코프는 이르쿠츠크가 관할하는 여러 곳의 코사크오십인장에게 훈령을 하달하여, 각지군인들이 원정대에 참가신청을 하라고 한다. 그는 더욱 명확히 말한다. 흑룡강유역의 다오르족은 러시아의 국가반역자이고 짜르에 반역하여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자들이다. 짜르 원정대가 정벌해야 한다고.

 

누가 알았으랴. 병사모집은 순조롭지 않았다. 20여일동안 하바로프는 모두 70여명만을 모집한다. 오히려 프란츠베코프는 군수방면에서 하바로프를 많이 도와준다. 그는 하바로프를 위하여 국고에서 거금을 꺼내고 무기고에서 무기장비들 대포, 화승총, 화약, 총탄과 갑옷등의 장비를 하바로프에게 빌려준다. 그외에 프란츠베코프는 국가창고에 보관된 물품과 그가 개인적으로 보관한 물품을 하바로프에게 주어서 원정대에서 사용하도록 해준다. 기실 프란츠베코프가 이렇게 한 진실한 목적은 장래 하바로프의 이번 원정에서 흑룡강을 얻게 되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프란츠베코프는 이 기회에 고리로 원정대에 물건을 빌려주면, 하바로프가 원정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프란츠베코프는 지역최고군사장관으로서 그 개인이익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금방 최고행정장관 프란츠베코프는 짜르의 명의로 하바로프에게 원정명령을 하달한다: "최대한 다오르족 우두머리 라푸카이를 복종시켜라. 만일 투항을 거절하면, 상용으 전쟁수단으로 그들을 정복해도 좋다 따르를 위하여 진공품을 빼앗고, 은광을 찾고, 성채를 수리하고 지도를 제작하라."

 

1649년 가을(일설에는 3월), 하바로프는 70명의 원정대를 이끌고 출발한다. 러시아인은 눈바람을 맞으며 퉁지르강에서 겨울을 넘기고, 1650년 1월 18일 더 기다리지 못하고 외흥안령을 넘어 눈썰매를 타고 흑룡강의 지류인 우르카이카 계곡으로 들어선다.

 

당시 이곳에는 5개의 다오르 성채가 있었다. 주민들은 사전에 러시아 코사크가 침략한다는 것을 알았고 일찌감치 노인과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싴놓았다. 그곳은 이미 빈 성채였다. 이때 다오르 추장 라푸카이가 형제 몇 명을 이끌고 말을 타고 적군을 맞이한다. 그 자리에서 하바로프의 속셈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인들이 오면서 "장사를 하고 선물을 준다'는 거짓말을 했다고 질책하며, 이전에 흑룡강에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목적을 따진다. 하바로프는 그들에게 짜르에 귀순하라고 권한다. 라푸카이는 거절하고는 말머리를 돌려서 떠난다. 하바로프는 마음이 조급해져 쫓아갔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다. 하바로프라 라푸카이와 그의 형제들을 추격하지 못하고 다섯째 성채에서 라푸카이의 누나를 찾아낸다. 하바로프는 그녀를 고문하였고, 라푸카이의 누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의 다오르족은 일찌감치 청나라황제에 귀순하였고, 중국에는 수천수만의 강력한 군대가 있고, 기술도 뛰어나고 화기도 갖추고 있으니 무적이라고. 하바로프는 그녀의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진다. 그래서 그해 봄에 50명을 남기고 부사령관에게 지휘하라고 하며, 자신은 심복들만 데리고 이르쿠츠크 본부로 돌아와서 구원병을 청한다. 하바로프가 막 떠나자, 그의 원정대대원은 다오루부족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들이 이르쿠츠크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여러 명의 다오르인을 죽였다"고 한다.

 

1650년 5월 6일, 하바로프는 이르쿠츠크에 돌아온다. 그리고 장관 프란츠베코프에게 그가 그린 "흑룡강유역지도"와 원정조사보고서를 바친다. 그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흑룡강유역은 도처가 밭과 삼림 및 목장이다. 전체 시베리아보다 아름답고 풍요롭다고.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다오르부족을 정벌하여 그를 짜르에 귀순시키려면, 짜르에게 다시 6000명의 원정군을 요청하여 흑룡강으로 보내 중국과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얼마후, 프란츠베코프는 다시 117명의 코사크 사냥군 및 21명의 군인을 그에게 넘겨준다. 모두 138명이 하바로프의 지위흘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3개의 철포 및 약간의 총과 탄약을 주어 제2의 원정대를 조직하게 한다. 하바로프는 1650년 7월 19일 다시 흑룡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바로프의 원정대가 출발하기 전에, 짜르 로마노프 황제의 성지와 중국청나라황제(보거다칸)에게 보내는 서신을 받았다는 것이다.

 

짜르는 서신에서 중국대청황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짜르는 위대하고 위엄있어 여러 국가의 군주이고 영주이다. 역대이래로 무적이었으며 이번에 하바로프를 중국에 파견한 것은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러시아 짜르에게 귀순하여 영원히 노비가 되어 충성을 다하고 공물을 바치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만일 동의하면, 중국주민은 성과 마을에서 살 수 있을 것이고,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하바로프는 바로 무력을 써서 중국의 남녀노소를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다. 그리고 성지에서는 아주 상세하게 설명한다. 중국이 귀순하거나 귀순하지 않았을 때 원정대가 취할 수단과 조치를. 만일 중국이 짜르에 귀순하면 중국황제는 중국민중을  이끌고 그의 종교신앙에 따라 귀순을 맹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은 반드시 짜르에게 공물을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초피(貂皮), 검은여우가죽, 붉은여우가죽, 수달가죽과 해리(海狸)가죽등. 그리고 금, 은, 비단과 보석등 귀중물품등을. 만일 귀순하지 않으면 선전포고없이 전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중국의 군인과 백성을 급습하여 소멸시키겠다고.

 

짜르의 중국청나라황제(보거다칸)에게 보내는 서신은 짜르의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중국에게 살기등등하고 오만에 찬 위협을 가한 것이다. 서신에서 하바로프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중국에 짜르에 대한 은총과 성의에 감사하고 맹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만일 중국황제가 귀순을 거절하면 짜르는 6000명의 대군을 파견하고, 대포와 화기를 가지고 가서 중국을 공격하겠으며, 중국의 '전체 인민과 처자식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하였다. 그후 흑룡강유역의 인민은 하바로프의 인성을 말살한 살륙과 강탈을 당한다. 인민의 저항도 이어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