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연운(呼延雲)
청나라 옹정(雍正) 5년(1727년) 칠월 십삼일, 남정원이라는 사람이 광동성 보녕현(普寧縣)의 관아로 들어섰다.
남정원은 청나라때의 기인(奇人)이다. 그의 일생은 기구했다. 비록 경세의 재주를 지녔지만, 과거에 계속 낙방했고,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막료로 지냈다. 4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보녕현의 지현(知縣) 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겨우 1개월여가 지나서 왕사의(王士毅)라는 사람이 소장을 내는데, 기이하기 그지없고 궤이하기 그지없는 "도시안"을 그에게 들이민 것이다.
왕사의는 조주(潮州)사람인데, 그가 보녕현의 관아로 달려와서 고발장을 낸 것은 자신의 당제(堂弟) 아웅(阿雄)이 독살당했다는 것이다.
아웅의 부친은 일찍 죽었고, 모친은 진천만(陳天萬)이라는 사람에게 개가하여 첩이 되었다. 아웅은 자연히 모친을 따라 진천만의 집으로 들어갔다. 왕사의는 고발장에서 이렇게 적었다. 진천만의 부인 허씨(許氏)는 질투심으로 "독약으로 아웅을 죽였으며, 열손가락이 구부러지고, 입술과 이빨이 파랗게 되었다."
왕사의는 만일 그의 고발에 한 글자라도 거짓말이 있으면 처벌을 받겠다고 맹세한다.
남정원은 왕사의의 글이 진지하게 작성된 것을 보고, "내용이 믿을만할 것같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아웅이 죽은 후에는 서둘러 매장했고, 그가 사법관리와 아전을 데리고 묘지로 가서 검시를 하려고 했는데, 묘지를 파내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관 속은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왕사의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이건 분명히 진천만이 소식을 듣고, 검시할 것이 두려워, 아웅의 시신을 파내서 다른 곳으로 가져가서 증거를 인멸한 것이다!"
현장에 있던 진천만과 그 가족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놀라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분위기는 그들에게 아주 불리했고, 묘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관아에서 즉시 그들을 압송하고 엄히 문초하여 진상을 밝혀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남정원은 "징심정기(澄心靜氣)"해서 아웅이 죽기 전에 병을 치료했던 의사를 부른다. 그리고 사인을 묻는다. 의사는 아웅이 죽기 전에 이미 두 달간이나 이질(痢疾)로 고생했으며, 무슨 중독된 현상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한다. 남정원은 다시 진천만의 정처인 허씨의 "배가 소처럼 부르고," 길을 걷거나 자리에 앉는데도 3,4명이 부축해야 하는 것을 보았다. 현대의학으로 보자면 간경화로 복수가 차거나 복강내에 암이 발생한 것이다. 그녀는 이미 병을 앓은지 9년이나 되었고, 자신의 몸도 제대로 추스리기 어려운 사람인데, 다른 사람을 독살할 능력은 안되어 보였다.
남장원은 "재삼 추궁하였지만, 모두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조용이 아웅의 모친 임씨(林氏)를 불러서 묻는다: "왕사의와 당제의 사이는 어떠했는가?" 임씨가 말한다: "좋긴 뭐가 좋습니까. 아웅이 죽는 날 내가 그에게 와서 보라고 했는데 오지도 않았습니다. 죽은 후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의 사촌누나집에 한번 다녀갔을 뿐입니다." 남정원은 왕사의 사촌누나집의 한 사내아이를 불러서 묻는다: "아웅이 죽은 후에 왕사의가 그의 사촌누나집으로 가서 뭘 했는가?" 사내아이가 답한다: "그는 아웅이 매장된 구체적인 장소를 물었고, 나는 그에게 뒤쪽 언덕위라고 얘기해주었습니다."
남정원은 모든 당사자들을 이끌고 관아로 돌아간 후에, 책상을 내려치며 왕사의에게 호령한다: "네 죄는 네가 알렸다!" 왕사의는 억울하고 무고하다는 태도를 보인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남정원이 말한다: "모든 증거가 설명하고 있다. 너는 아웅이 죽은 원인에 대하여 아무런 조사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묻힌 장소는 자세히 알아보았다. 너는 그가 독살당했다고 확실하게 말하는데 그럼 어디 증거를 내놓아 보아라!" 왕사의는 그래도 교활하게 변명했다: "아웅의 시신을 누군가 가져갔습니다. 그게 증거입니다. 그것은 진천만이 스스로 잘못을 알고 사법관리가 검시를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남정원은 차갑게 웃으며 말한다: "내 말이 그것이다. 너의 '죄'는 바로 거기에 있다. 분명히 네가 아웅의 시신을 훔쳐갔는데, 진천만에게 그 죄를 떠넘기고 있다!" 말을 하면서 협곤(夾棍)으로 고문을 했다. 왕사의는 얼마를 버티지 못하고는 바로 사실대로 진술한다. 그가 고용한 사람이 "밤에 묘를 파냈다" 그러나 다시 물어도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남정원은 "왕사의에게 곤장 30대를 내리고, 칼을 차고 동네를 돌게 했다". 그리고 진천만의 일가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풀어준다.
재판을 구경하던 수천명은 모두 사건이 끝났다고 여기고, "환호성이 하늘을 울리고, 땅에도 절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흩어진 뒤, 남정원은 영리한 아전 몇 명을 불러서 이렇게 당부한다: "너희는 즉시 왕사의가 투숙한 동남여관으로 가서, 그가 어느 방에 투숙했는지를 살펴보고, 그안에 같이 투숙한 자가 있으면 즉시 붙잡아 와라1"
남정원의 유명한 사건필기 <녹주공안(鹿州公案)>이라는 책에서는 자신이 처음 보녕현 지현으로 있을 때는 일종의 "처음 배우는" 심리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스스로 겸손을 떤 것이다.
남정원은 과거에 여러번 낙방했는데 확실히 오랫동안 문을 걸어닫고 책을 읽었다. 심지어 장포(漳浦) 고수동(高叟洞)에 은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그가 세상에 나가려는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강희60년(1721년) 여름, 대만에서 민란이 일어난다. 광동성 남오진 총병 남정진(藍廷珍)는 명을 받들어 병력을 이끌고 토벌에 나선다. 남정원은 이때 산에서 나와 남정진의 막료가 된다. 병력방어라든지 대만통치나 대만의 흥성을 위해 많은 고귀한 모략을 내놓는다. 그 몇년동안, 그는 비바람을 맞으며 민심을 고찰했다. 지방을 다스리는데 절대로 '처음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십년한창(十年寒窓), 일조위관(一朝爲官)" 즉 10년간 공부만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관료가 된 서생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남정원은 잘 알고 있었다. 아웅의 시신을 파내고 관청에 고발하며 죄를 떠넘기는 이런 일은 절대로 왕사의같은 시골무뢰배가 혼자서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을. 그의 뒤에는 분명히 이를 기획한 송사(訟師)가 있다는 것을.
그의 명령에 따라, 몇명 아전은 동문여관으로 간다. 소식을 듣고 막 도망치려고 하던 송사 왕작정(王爵亭)을 체포한다. 왕작정은 "거동이 담담하고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것같았다. 왕사의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거짓말도 했다." 남정원은 그와 말로 싸우지 않고 그에게 종이를 주고 그에게 진술서를 쓰도록 한다. 왕사의가 글을 쓰기 시작하자 바로 들통난다. "글자체가 원래 고발장과 같았던 것이다." 그의 글자체는 왕사의가 처음 제출한 고발장의 글자체와 일치했다.
왕작정은 할 수 없이 인정한다. 시신을 파내는데 그도 참가하기는 했다고. 그러나 남정원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왕작정의 배후에 또 다른 '고인(高人)'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노송사(老訟師) 진위도(陳偉度)이다. 그가 계책을 내서 "시신을 파내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융수 도오석채의 바깥에 묻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디에 묻었는지는 진위도만이 안다는 것이다.
남정원은 급히 사람을 보내어 진위도를 체포한다. 만나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진위도는 "노간거활(老奸巨猾)하다. 왕작정보다 10배는 침착했다." 그는 시신을 파내는 일에 참여한 것을 극구 부인한다. 그러면서 왕사의와 왕작정이 원래 자신과 원한이 있어서 이번에 자신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며 자신은 모함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남정원은 그들 3명을 공당에서 대질시킨다. 왕작정은 진위도가 계속 책임을 떠미는 것을 보고는 화가나서 그의 코를 가리키며 욕한다: "우리 3명이 오석채의 문루에서 같이 이것을 상의했는데, 네가 시신을 파내서 인근현으로 가져가서 매장하면 몇 가지 이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첫째는 사법관리의 검시를 피할 수 있고, 둘째는 인근현은 이곳을 관할하지 않으니, 만일 본현에서 이 사건을 공동으로 처리하자고 하더라도 사법절차가 아주 복잡해서 일반적인 관리라면 귀찮아서 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시신을 찾지 못하면 진천만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이고, 현령은 분명히 그가 시신을 옮겨서 증거를 인명했다고 생각하여 고문을 할 것이니, 그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넷째는 진천만이 혹형을 받기를 기다려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 우리가 나서서 고발을 철회한다는 조건으로 큰돈을 요구하면 그들 집안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네가 사람을 찾아서 시신을 파내어 다시 매장한 후에, 다시 우리와 같이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서 네 스스로 너의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신도 모르고 귀신도 모르며, 포용도(포청천)이 다시 살아와도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제 일이 다 들통났는데, 너는 혼자서 빠져나가려고 하다니, 우리 둘이 모든 책임을 지란 말이냐?"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도, 진위도는 자신이 전체 기획이나 범행과정에서 종이 하나 남기지 않고, 글자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남정원이 어떻게 심문하더라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다.
남정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진위도는 송사로 뼈가 굵은 자이고, 음험하고 교활하다. 전체 사건을 기획했으니 모든 부분을 여러번 반복해서 연습했을 것이다. 그래서 왕사의가 관아에 고발하기 전에 분명 그와 왕작정은 여러번 예행연습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단서가 없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진위도에 대한 심문을 잠시 멈추고, 비밀리에 왕작정을 심문한다. 그에게 야간에 투숙했던 곳의 방, 이불, 용기의 위치와 상황을 캐물어서 자세히 알아낸 후에 다시 심문을 시작한다. 바로 진위도에게 묻는다: "너는 너와 왕작정 왕사의간에 원한이 있다고 하였는데, 왜 동문여관에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가?"
진위도는 졸지에 멍해진다: "그저 우연히 한번이었을 뿐이다..." 남정원이 말한다: "우연히 한번이라고? 어찌 너희 몇몇이 며칠이나 같이 식사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데.." 진위도는 어찌해야할지를 몰랐다. "성안에 식당이 너무 적어서, 매번 부딛쳤을 뿐이다...." 남정원이 차갑게 웃으며 말한다: "그럼, 너희와 같은 여관에 있던 사람도 만났겠구나!"
진위도가 어찌해야할지 모르고 있을 때, 성에서 임태(林泰)라는 사람을 불러온다. 그는 증명했다: "진위도, 왕작정은 거가(渠家)에서 3일밤을 같이 지냈다. 전혀 거짓이 없다. 그는 같이 공모하고 주범임에 틀림이 없다."
원래, 진위도와 진천만은 당형제(堂兄弟)이다. 그런데 조상의 집을 파는 문제로 서로 원한이 생긴다. 아웅이 병사했다는 말을 듣고, 왕작정, 왕사의와 같이 무고하여 원한을 풀기로 작정한 것이다. 진위도는 자백한다. 아웅의 시체는 그가 고용한 사람이 파낸 후에 조양현 오석채 밖의 '하계미(下溪尾)"라는 곳에 묻었다. 깊이 3,4자의 구멍을 내고 위에는 절반을 잘라버린 나무를 심어서 표지로 삼았다.
남장원은 즉시 수하를 보내어 조양현령에게 조회하여 병력을 보내 오석채밖 하계미에서 반쯤 잘린 나무를 찾게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4자를 파니 멍석에 말린 아웅의 시신이 있었다." 그 후에 사법관리가 시신을 검시하니 온몸에 중독된 현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건이 해결되는 것을 보자 진천만은 눈물을 흘리며 진위도에게 말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고, 무슨 큰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조상의 집을 파는 일을 다지고 당형이 나를 패가망신하도록 하겠다고 햇을 때도 나는 그저 술마시고 농담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설마 진짜로 그렇게 할줄은 몰랐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진위도는 얼굴이 흙색이 되어 탄식만 내뱉었다.
남정원은 명을 내려, 왕사의, 왕작정, 진위도 3명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그 후에 목에 칼을 차고 사방을 돌게 한다. 그외에 목패를 하나 만들어서 그 위에 그들 3명의 악행을 적게 해서 백성들에게 돌려서 보게 한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통쾌해 한다.
사건이 끝난 후, 남정원은 <녹주공안>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전체 '도시안'의 재판과정에서, 그가 가장 크게 압박을 느낀 때는 묘를 파냈는데 시신이 보이지 않았을 때라고 말한다. 왕사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현장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소란을 피우니, 무형중에 그로 하여금 진천만을 호되게 심문해야한다는 압박으로 여겨졌다. "만일 진천만의 일가를 호되게 심문했다면, 그것은 관리가 만든 억울한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정원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와중에서도 '징심정기' 4글자를 잊지 않았다.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은 증거가 진실하고 충분하냐는 것이지, 절대로 '둘러싼 군중'의 심리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정원에게 진천만 부부를 호되게 심문하라고 소리치던 사람들이나, 사건이 밝혀진 후 박수치며 통쾌해하던 사람들은 결국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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