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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행방

by 중은우시 2009. 1. 24.

 

1781년(건륭46년) 제1부 <<사고전서>>를 완성한 후 양이 너무 많다보니 목각판을 만들지 못했다. 그저 다시 7년의 시간을 들여서, 계속 6부를 손으로 베껴서 만들어냈을 뿐이다. 즉, 사고전서는 모두 합쳐서 7부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건륭황제는 이 7부의 사고전허를 아주 귀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7개의 서로다른 장소에 7개의 장서각(藏書閣)을 만들어 각각 이 7부의 사고전서를 보관하게 한다. 그 일곱개의 장서각은 다음과 같다.

 

문연각(文淵閣): 북경 자금성(紫金城)

문원각(文源閣): 북경 원명원(圓明園)

문소각(文溯閣): 심양 봉천고궁(奉天故宮)

문진각(文津閣): 승덕 피서산장(避暑山莊)

  - 이상 네 곳을 합하여 북사각(北四閣) 혹은 내정사각(內廷四閣)이라고 한다.

문종각(文宗閣): 진강 금산사(金山寺)

문회각(文匯閣): 양주 대관당(大觀堂)

문란각(文瀾閣): 항주 서호행궁(西湖行宮) 고산성인사(孤山聖因寺)

  - 이상 세 곳을 합하여 남삼각(南三閣) 혹은 강절삼각(江浙三閣)이라고 한다.

 

남북을 합쳐서 7각에 각각 1부의 똑같은 사고전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각각의 사고전서는 36,300책(冊), 6752함(函)으로 장정되었다. 북사각은 황실 전용이었다면, 남삼각은 민간학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 일곱 부의 사고전서의 서로 다른 운명은 다음과 같다.

 

문연각본: 청나라부터 민국시대까지 모두 자금성안에 잘 모셔져 있었다. 대일항전으로 북경이 위험해졌을 때, 장개석의 명령으로 옮기게 되는데, 먼저 상해로 보내고 다시 남경으로 보낸다. 마지막으로는 대만까지 건너간다. 현재는 타이페이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보존되어 있다.

 

문원각본: 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원명원을 불태울 때 불에 타서 사라진다.

 

문소각본: 청나라이후 민국, 일본점령시기, 만주국등 여러 전란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기본적으로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1966년 중소관계가 긴장되면서, 사고전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앙정부는 요녕성에서 36,300책의 문소각 사고전서를 감숙성으로 보내어 난주시에서 75킬로미터 떨어진 산 속에 보관시킨다. 2005년 7월, 난주에 새로 건설된 신문소각 사고전서장서관이 정식 개관했다. 그리하여 보존과 학술연구용으로 쓰고 있다.

 

문진각본: 1950년, 중국정부는 중국국가도서관으로 옮기도록 지시한다. 이것은 유일하게 원래의 서가, 원래의 함에 원래의 책으로 보존된 판본이다. 1950년이전에는 피서산장에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각본: 당시, 칠각중 하나를 진강에 유치하기 위하여 진강의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조정에 글을 올려서, 관련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한다. 사고전서가 장서각에 들어간 후, 모든 업무는 양회염운사가 책임지고 운영했다. 그리고 현지의 문사들에게 열람과 초록을 허용했다. 일시간에 강남학자는 보지못했던 책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누렸다. 다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함풍3년 태평천국이 진강을 함락시키면서, 문종각과 거기에 보관되어 있던 사고전서는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문회각본: 문회각과 사고전서도 함풍4년(1854년) 태평군에 의하여 모조리 불태워진다.

 

문란각본: 문란각 사고전서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함풍연간, 태평군이 들이닥치면서 진강과 양주의 장서각은 장서각과 사고전서가 모조리 불에 타버린다. 항주 장서각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었던가? 1861년, 태평군이 항주를 함락시킨다. 문란각이 훼손되고, 책은 민간으로 흘러들어간다. 장서가인 정신(丁申), 정병(丁丙) 형제는 사람을 시켜 매일 길거리에서 흩어진 책을 구해모으며, 합게 8,689책을 사모으게 된다. 이는 문란각본의 1/4에 상당한다. 문란각본은 불완전하게 되었는데, 어떡할 것인가? 새로 만들기로 하였다. 새로 베껴써서 만드는데, 7년이 걸렸다. 절강순무 담종린의 지원하에 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1882년, 문란각이 다시 재건된다. 정씨형제는 보완한 사고전서를 문란각에 돌려준다. 문란각본은 이후 "을유보초(乙酉補抄)", "계해보초(癸亥補抄)"를 거쳐 완벽한 모습을 다시 갖추게 된다. 항전시기에는 서쪽으로 옮겼다. 먼저 귀양으로 갔다가 나중에 중경으로 간다. 항전승리후에 다시 돌아와서 오늘에 이른다. 현재는 절강성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서관안의 원본은 사람들이 볼 수 없다. 영인본은 빌려서 볼 수 있다.

 

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

 

사고전서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 역대의 전문가 학자들과 문인들은 여러차례 속수(續修)를 제창했다. 그 속수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가경초년, 절강순무인 완원은 강남에서 사고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미수록도서 170여종을 사모은 다음, 조정에 보치면서 <<사고미수서제요>>를 쓴다. 이것이 속수를 하겠다는 첫번째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광서15년(1889), 한림원 편수 왕의영은 상소를 올려, "다시 관을 열고, 전서(前書)를 속찬(續纂)'하도록 제안했다. 이후 유장림, 손동강등도 속수를 할 것을 제안하나, 실행되지 못한다.

 

1919년, 섭공작(葉恭綽)은 유럽을 시찰하고 귀국한 후, <<사고전서>>의 영인본을 낼 것을 제안한다. 김량복(金梁復)은 "책을 속수하는 것은 어려우나, 목록을 만드는 것은 쉬우니" 200년동안 새로 나온 서적의 목록을 만든 다음에 후일을 도모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둘 다 난세에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1924년, 상해상무인서관은 문연각본을 영인할 것을 계획한다. 그리고 사고전서에 수록되지 않은 책들을 모아서 속편을 간행하고자 한다. 1928년, 동방문화사업총위원회 산하의 북평인문과학연구소는 일본이 반환한 경자배상금으로 사고전서를 속수하는 일을 과제로 올리고, 고서를 매입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12월 15일, 당시 동북대학교장을 겸임하고 있던 장학량 장군은 사재를 털어서 사고전서에 대하여 영인, 증보(增補), 속수(續修)할 것을 창의한다. 다만 그 후에 일본군이 동북, 화북에 진입하면서 시국이 혼란하여 속수에 관한 일은 점차 중단되어 버린다.

 

이상의 여러번에 걸친 속수시도는 실제로 북평에서 일부 학자들이 건륭이후의 저술에 대한 상당한 부분의 제요를 만드는데 이른다. 근 백년이래 계속된 속수시도들 중에서 얻은 약간의 실적이자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4년에 이르러, 국가신문출판서와 국가고적정리출판계획소조의 비준을 거쳐, 사고전서의 속수가 국가중점출판공정에 포함된다. <<속수사고전서>>는 이때부터 시작되어 8년간의 활동끝에 2002년 4월 1800책에 이르는 편찬출판업무를 완성하고, 상해고적출판사에서 출판하기에 이른다. <<속수사고전서>>에 포함된 내용은 주로 1911년이전의 중요한 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