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한자고(韓子高): 중국역사상 유일한 남황후(男皇后)

중은우시 2014. 11. 20. 23:46

글: 자일(子逸)

 

자고이래로, 황제는 일반적으로 남자가 맡았고, 황후는 일반적으로 여자가 맡았다. 중국5천년의 역사 속에서 무측천같은 여황제가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남황후가 나타난 적도 있었다. 그는 바로 남북조시대 진문제(陳文帝)의 남총(南寵)인 절세미남 한자고이다.

 

한자고의 본명은 한만자(韓蠻子)이다. 회계 음산(지금의 절강성 소흥)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빈한했고, 대대로 신발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한만자는 역사상 유명한 미남자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용모염려(容貌艶麗), 섬연결백(纖姸潔白), 여미부인(如美婦人), 진수고발(臻首膏髮), 자연아미(自然蛾眉), 견자미불책책(見者靡不嘖嘖)" 즉, 미부인처럼 예쁘다는 것이다. 한만자가 16살이 되었을 때, 마침 후경(侯景)의 난이 일어난다. 한만자는 부친을 따라 전란을 피한다. 피난가는 길에 자주 유병난졸(流兵亂卒)이 함부로 길가는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당한다. 여러번 칼날에 목숨을 잃을 뻔하였으나, 병사들이 그의 미모를 안타까워하여 차마 손을 쓰지 못했다. 결국 한만자는 자신의 미모 덕분에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후경의 난이 평정된 후, 한만자는 부대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온다. 도중에 당시 오흥태수(吳興太守)로 있던 진천(陳蒨, 즉 나중의 진문제)을 만난다. 진천은 한만자가 이처럼 잘생긴 것을 보고는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라고 깜짝 놀란다. 그래서 그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모실 생각이 없느냐?" 재난을 막 벗어난 한만자는 귀인이 도와주겠다고 하자 기뻐서 즉석에서 응락한다. 진천은 '한만자'라는 이름이 너무 속되다고 여겨서 그의 이름을 '자고'로 바꾸게 해준다. 이때부터 한자고는 진문제를 따르게 된다.

 

한자고는 그저 미모만 있는 꽃병은 아니었다. 진문제를 따른 후, 그는 학식을 익히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등의 여러 방면에서 실력을 늘여간다. 두감(杜龕)의 반란을 진압한 후, 진문제는 병사를 한자고에게 붙여주고, 그로 하여금 부대를 지휘하게 해준다. 나중에 한자고는 다시 진문제를 따라 장표(張彪)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진문제는 다시 수하의 병사들중 대다수를 한자고에게 지휘하게 한다. 한자고는 공훈이 탁월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어, 사병들도 그를 기꺼이 따랐다.

 

속담에 '일구생정(日久生情, 오래 같이 있다보면 정이 생긴다)"이라는 말이 있다. 진문제를 따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한자고와 진문제의 사이에는 심후한 감정이 생긴다. 한자고는 성격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웠으나, 진문제는 성격이 급했다. 매번 진문제가 성깔을 부릴 때면, 그가 곁에서 화를 누그러뜨려주곤 했다. 그는 진문제와 감정이 아주 좋아서 항상 검을 차고 진문제의 안전을 호위했다. 진문제가 식사를 할 때면, 그가 곁에서 술을 따르고 음식을 챙겨주면서 잘 모셨다. 두 사람은 같이 먹고 마시고, 같이 잠자고 쉬었다. 점점 동성연애로 발전한다. 진문제는 심지어 한자고를 위하여 지은 시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석문주소사(昔聞周小史), 금가월하인(今歌月下人), 옥진수불별(玉塵手不別), 양거시약공(羊車市若空), 수수양웅병(誰愁兩雄幷), 금초응양농(金貂應讓儂)

 

고대에 황제가 남총을 두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니다. 다만 진문제는 한자고가 항상 자신의 곁에 있게 되니 점차 자신의 비빈을 본체만체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아직 황제가 되기 전에, 하루는 그가 자고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제왕의 상이 있다고 하는데, 만일 정말 그렇게 되면, 너를 황후로 앉히겠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말이 많을까봐 걱정된다." 그러자 한자고는 감사인사를 한다: "고대에 여황제가 있었으니, 남황후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정말 나를 황후에 앉힌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황후라는 개념을 얘기한 것이다.

 

비록 진문제가 결국 한자고를 황후로 앉히지는 못했지만, '충관일노위홍안(沖冠一怒爲紅顔)'의 장거는 있었다.

 

한자고는 몸매도 아름답고 피부도 뛰어났다. 남자건 여자건 그의 용모를 좋아했다. 심지어 진나라의 한 공주는 한자고를 미친 듯이 짝사랑하여 밤낮으로 그를 그리워하다가 각혈하여 죽었다. 나중에 한자고의 추문때문에, 진문제는 사마씨 일족을 멸족시키기도 한다. 진문제와 한자고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쟁에 나서서 양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건립한다. 남총을 위하여 하나의 국가까지 소멸시켜버렸다. 이런 일은 역사상 아마도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두 사람의 감정에 대하여 정사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진서.한자고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문제가 그를 아주 총애하여, 곁에서 떨어지게 하지 않았다. 진문제가 병이 들면 그가 들어가서 탕약을 올렸다." 진문제의 어떤 비빈에 대하여도 이런 기록은 없다. 진문제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 오직 한자고가 병석 옆에서 탕약을 올렸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심후했는지 알 수 있다. 진문제가 죽은 후, 그의 능묘 앞에는 두 마리의 기린조각이 있는데 둘 다 숫놈이었다(일반적으로는 숫놈 한 마리, 암놈 한마리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한자고를 황후로 세우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한다. 두 마리의 숫놈은 바로 진문제의 한자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고 한다.

 

진문제가 죽은 후 태자 진백종이 즉위한다. 숙부 진욱(陳頊)이 보정(輔政)한다. 한자고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다. 결국 '모반'의 죄명을 받아 무고하게 피살된다. 나이 겨우 36살때의 일이다. 일대 미남자는 이렇게 죽는다.

 

한자고는 16살때부터 진문제를 따랐고, 그의 신변의 총신이 된다. 20여년동안, 그는 진문제의 곁을 지켰고, 큰 공로를 세운다. 그는 재주도 있고 덕도 있었으며, 교만하지 않고 분수를 지켰다. 자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 발호하거나 권력을 농단하지 않았다. 그는 진문제를 위하여 살고, 진문제를 위하여 죽었다. 그의 진문제에 대한 한 마음의 충성은 칭송받을 만하다. 그와 진문제의 애매한 연정은 중국역사상 한 줄기 절색광휘(絶色光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