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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원고낭(元姑娘): 중국 최초의 여황제

by 중은우시 2017. 12. 5.

글: 육기(陸棄)


중국역사상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온 이래로, 부녀의 사회적 지위는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었다. 천당에서 지하로 떨어진 셈이다. 특히 "부위처강(夫爲妻綱)"의 대에 부녀는 어떤 사회적 지위도 없었다. "시집가기 전에는 부친을 따르고, 시집간 후에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른다." 어쨌든 남자의 곁에서 살아야 하고, 그 외에는 살 길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여자들이 이렇게 비참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여자영웅도 적지 않다. "건괵불양수미(巾幗不讓鬚眉)" 예를 들어, 무측천은 여황제가 되어서 세상을 쥐고 흔들었다. 예를 들어 화목란(花木蘭), 목계영(穆桂英)같은 여자는 개세의 영웅으로 나라를 지켜냈다. 예를 들어 맹강녀(孟姜女)는 곡으로 장성을 무너뜨려서 진시황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과부청(寡婦淸)은 진시황시대에 단사(丹砂)를 독점하여 "최고부자"가 된다. 이들은 모두 중국역사상 대표적인 여자들이다.


다만, 대부분의 여인은 "수심화열(水深火熱)"가운데서 생활했다고 볼 수 있다. 지위를 따지자면 지위도 없고, 재산을 따지자면 재산도 없으며, 사랑을 받는 경우도 아주 드물었다. 역사상 운명이 사나운 여인들은 부지기수이다. 가장 힘든 여인은 없고, 그냥 더 힘든 여인만 있다. 역사상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운명이 가장 사나운 여인이라고 한다면 북위(北魏) 시기의 원고낭을 꼽아야 할 것같다.


원고낭은 죽국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이다. 그렇게 말하면 지위가 가장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황제는 하늘 바로 다음가는 인물이다. 천하의 모든 것이 막비왕토(莫非王土)이고, 솔사지빈(率士之濱)이 막비왕신(莫非王臣)이다. 원고낭이 이런 사회적 지위에 오르고, 일국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며,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황제의 기록을 세운 것은 무측천보다 100년이나 앞섰다. 그러나 원고낭이라는 황제는 무측천과 비교할 수가 없다. 무측천은 반세기동안 집권하며 황제로 16년을 지냈다. 권력을 잡았던 시기에 경제는 발달하고 사해가 신복했다. 개인생활에서도 남자황제가 누리는 모든 것을 누렸다. 남자들로 삼궁육원을 두었고, 그녀의 면수(面首)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고낭은 비록 황제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을 누리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원고낭은 그저 막 출생한 영아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친은 북위의 효명제(孝明帝)이다. 효명제의 이름은 원후(元詡)이다. 하남 낙양사람이며, 선무제(宣武帝)각(元恪)의 둘째아들이다.모친은 선무영황후 호씨(胡氏)이다. 남북조시기 북위의 제9대황제이다. 원후는 3살때 황태자가 되고, 6살에 황제로 즉위한다. 적모황후인 고씨(高氏)를 황태후로 받들고, 생모인 호충화(胡充華)는 황태비(皇太妃)로 모신다. 원후는 6살에 황ㅈ에 올랐고, 나이가 어렸으므로, 성격이 강한 생모 황태비 호충화가 후세의 서태후와 마찬가지로 "수렴청정"을 한다. 호태후가 집권한 시기에,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배척하며,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생활도 음란하여, 청하왕(淸河王) 원역(元懌)과 사통했다. 원후가 19세가 되던 해에 모친 호충화가 권력을 내놓지 않는데 불만을 품고, 원역을 처형하고, 추장 이조영(爾朱榮)에게 밀조를 내려 군대를 이끌고 도와달라고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밀조는 미리 발견되고 호태후는 이를 보고 대노한다. 그리하여 원후를 독살한다. 원후도 후세의 광서제와 같은 길을 걸은 것이다.


원후에게는 딸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름도 남기지 않았다(일설에는 경애공주(敬哀公主)라고 한다). 후세에 그녀를 원고낭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성이 원(元)인 아가씨라는 뜻이다. 효명제가 붕어하고 나라에는 하루도 주인이 없을 수 없다. 호태후는 비록 후세의 서태후와 같이 수렴청정을 할 야심과 담량은 있었지만, 후세의 무측천처럼 광명정대하게 용상에 앉을 박력은 없었다. 다만 효명제에게 아들이 없으니 어떡할 것인가? 호테후는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낸다. 효명제 원후에게 아들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낳은 자식이 아들이고 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바로 원고낭을 황제에 앉힌다. 그리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린다. 연호는 "무태(武泰)"라 한다. 이 신분으로 말하자면 원고낭은 중국 최초의 여황제이다. 지위는 숭고하기 그지없다. 다만 가련한 것은, 그녀는 광명정대한 여황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화목란식의 남장여인의 여황제였다. 남장도 그녀 자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그녀의 할머니가 혼자서 처리한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운명은 비극으로 정되었다.


과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원고낭의 할머니 호태후는 마음을 바꾼다. 왜냐하면 그녀도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종이로 불을 싸서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원고낭이 여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어떡할 것인가? 이는 조정대신들에게 불복하고 반란을 일으킬 명분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녀는 즉시 마음을 바꾼다. 종친인 임도왕(臨洮王) 원보휘(元寶暉)의 세자 원쇠(元釗)를 황제로 올린 것이다. 원쇠는 나이 겨우 3살이었고, 자연히 호태후는 계속 수렴청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태후의 좋은 나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가 혼자서 황제를 세웠다가 바꾼 일에 천하는 깜짝 놀란다. 원후의 밀조를 받은 이주영은 병력을 이끌고 호태후를 토벌하러 온다. 그리고 낙양을 점령한다. 원쇠와 호태후는 이주영에 의하여 황하에 빠뜨려 죽임을 당한다. 원고낭은 사서에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시호는 "위상제(魏殤帝)"이다. '상(殤)'은 요절했다는 말이다. 아마도 병마황란의 북위때 음모가 가득한 궁정에서 생활하였으므로 그녀의 결말이 좋았을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세상의 즐거움이라고는 누려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도 알지못한채 세상을 마쳤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어린황제는 많다. 예를 들어 동한의 상제(殤帝) 유륭(劉隆)은 즉위할 때 겨우 100여일이었고, 재위 1년여만에 죽는다; 동한의 충제(冲帝) 유병(劉炳)은 1살때 즉위해서 2살때 사망한다; 동진의 진목제(晋穆帝) 사마담(司馬聃)은 즉위할 때 2살이었다; 청나라의 선통제(宣統帝) 애신각라 부의는 즉위할 때 3살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원고낭은 즉위할 때 이들 어린 황제들보다 훨씬 어렸다. 겨우 50여일이었따. 재위는 하루도 되지 않는다. 그녀는 3가지 최고기록을 세웠다. 중국역사상 가장 어린 황제,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황제,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 중국역사상 다른 몇몇 여황제들 당나라의 문가황제(文佳皇帝) 진석진(陳碩眞), 측천대제(則天大帝) 무조(武曌), 서료(西遼)황제 야율보속완(耶律普速完)과 비교하더라도 원고낭은 하루도 제대로 황제로서의 복을 누리지 못했다. 역사상 지위는 가장 높고 운명은 가장 비참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