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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가견(賈堅): 중국고대의 매국노

by 중은우시 2014. 2. 1.

글: 양혜왕(梁惠王)

 

대중의 인상 속에, 고대인은 민족기개를 아주 중시한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사서를 보면, 이런 견해가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진 16국시기의 가견이 있다.

 

가견은 발해군 사람이다. 조부와 부친은 모두 진(晋)나라의 관리였다. 동진이 남쪽으로 이전한 후, 가견은 갈(羯)족 정권 후조(後趙)에서 관리로 지낸다. 변고를 거쳐 나중에는 선비족의 전연(前燕) 정권에서 대신을 지낸다. 그의 무공은 아주 고강했고, 특히 화살을 잘 쏘았다. 백보 거리를 두고 버드나무를 맞출 수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동진의 서주, 연주 두 주의 자사인 순선(荀羨)이 전연의 태산군을 공격한다. 당시 가견은 태산군수로 있었고, 산치현(山茌縣)에 주둔하고 있는데, 부하는 겨우 7백명이었다. 순선의 철천명과 비교하면 기본적으로 섬멸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가견은 생사를 돌보지 않고 나가서 싸운다. 부하들이 모두 권한다: "형님, 강하게 맞부닥쳐 싸우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성을 지킵시다." 가견이 말한다: "고수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차라리 치고 들어가서 하나라도 죽이면 그걸로 된다; 둘을 죽이면 하나 이익이다." 결과적으로 출격해서 순선의 수천명을 죽여버리고 안전하게 철수한다. 다만 순선의 병력은 불요불굴의 사기가 있었다. 철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견은 최후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부하들에게 비감하게 말한다: "너희는 도망쳐서 목숨을 구해라. 나는 남아서 정충보국하겠다."

 

그는 병력을 이끄는데 능력이 있었다. 아무도 도망쳐서 목숨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기실 바깥이 포위되어 있어서 도망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부하들은 그를 억지로 말에 태우고, 울면서 말한다: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도망치겠습니다."

 

가견은 사람들을 데리고 성문을 나서서 달려간다. 그는 포위망을 돌파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다리 위에 서서, 오른쪽 왼쪽으로 활을 쏜다. 포위망을 형성한 동진의 병사들은 방향을 잡지 못했다. 동진의 병사들이 급해져서, 도끼를 들고 목교를 맹렬히 내려친다. 가견은 다리와 함께 구덩이에 떨어진다. 이어서 민족대의의 겨룸이 시작된다.

 

순선은 그에게 말한다: "가견, 당신의 조부와 부친은 모두 진나라의 대신이다. 그대는 어찌 진나라를 배신하는가? 투항해라 조상의 영명을 더럽히지 말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런 대의를 얘기하면, 유가의 교육을 받아 화이(華夷)를 구분하는 교육을 받은 관리라면 얼굴이 붉어질 일이고, 뭐라고 변명할 바를 찾지 못할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가견은 얼굴이 두터웠다. 그는 얼굴색을 전혀 바꾸지 않고 말한다: "진나라는 중화를 버렸으니, 내가 배반한 것이 아니다. 백성들에게 주인이 없어졌으니 강한 자에게 목숨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미 주인을 섬기는데, 어찌 다시 절개를 바꾸겠는가! 후조를 거쳐 전연에 이르기까지 뜻을 바꾼 적이 없다. 그대는 어찌 가볍게 투항하라고 말하는가?"

 

순선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설득한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매국노는 되지 말아야 한다." 가견은 대노하여 욕을 하기 시작한다: "수자(竪子, 욕에 해당함). 너는 어르신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꺼져라." 순선을 화가나서, 백발이 창창한 가견을 큰 빗속에 던져두게 한다. 며칠 후 가견은 재채기를 연이어 하고는 죽는다.

 

필자의 감상은 이렇다. 고서에는 가견이라는 매국노를 비장하게 묘사했다. 이것은 찬양하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사관들이 민족대의가 그다지 굳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치관이 혼동된 것이다. 그리하여 매국노를 좋게 묘사한 것이다. 그외에 필자는 또한 발견한다. 고대에 매국노는 아주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