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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역사상의 "민교충돌(民敎沖突)"과 오늘날의 홍콩

by 중은우시 2014. 11. 1.

글: 유앙(劉仰)

 

백여년전에 독일의 주중공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독일을 가리킴)가 산동에서 경제활동을 전개하는 것과 더불어, 현지주민중 '추종자'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도는 가장 좋은 대상이다." 이 말은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외국종교를 믿는 것과 미국이익은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중국종교인들의 주관적인 의도가 무엇이건, 객관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이를 위하여, 서방교회는 당시에 중국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도를 흡수함으로써 자신의 군중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당시 산동에서 도적질을 하던 한 무리의 비적들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선교사는 관청의 앞에서 먼저 세례를 해준다. 그리고 한 비적의 두목이 관병에게 맞아죽었는데, 교회는 즉시 그의 부하들을 신도로 받아들인다. 법을 어긴 범죄분자외에, 서방교회는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 청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던 비밀종교조직의 성원도 흡수했다. 당연히, 재난을 당했을 때는 죽을 나눠주는 등의 구제수단을 통하여 빈곤한 사람들을 신도로 끌어들인다. 다만, 마지막 유형의 빈곤한 사람들은 어쨌든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고, 서양종교를 믿는 것은 그저 임시방편이었다. 진정 서양인의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작용을 한 사람은 앞의 몇 종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장기적인 이익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련의 "교안(敎案)"의 도화선이 되고, "교안"의 제1선에 앞장선다. 마치 오늘날 홍콩의 '점중(占中, 센트럴을 점거하라)'자들과 같다.

 

소위 "교안"은 간단하게 말해서 바로 당시 서방종교가 중국하층에 진입한 후에 일어난 충돌이다. 직접적으로 충돌한 대상은 주로 중국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민중과 서양종교를 신봉한 '교민(敎民)"이다. 그리하여 이를 "민교충돌'이라고 부른다. 어떤 충돌은 정상적인 분쟁이고 어떤 것은 교민들의 억지로 인한 소란이며, 혹은 고의로 사소한 모순을 확대한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일부 정상적인 말다툼을 교민이 그들이 신봉하는 서양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확대하여, 배상을 요구하거나, 사람을 때려죽인 경우도 있다. 설사 일부 정상적인 분쟁도 자주 교민들이 일부러 확대하고, 가혹한 처리를 요구하였다. 당시의 "교안" 혹은 "민교충돌"의 결과가 심각했던 원인은 그것이 단순한 관념,습속상의 차이뿐이 아니라, 서방은 '정교일치'의 원칙하에, 종교가 자주 제국주의확장의 선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종교를 신봉하는 중국교민은 즉시 스스로를 남들보다 높다고 여기게 된다. 민교충돌의 배후는 선교사의 지지가 있었다. 선교사는 교민의 배경이자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자아도취와 자의망위(恣意妄爲)를 조장했다. 선교사이 배후는 바로 열강각국의 공사, 각국정부 및 군대이다. 민교충돌중 한 종료는 마을의 공공용지를 점거하는 것이다. 중국의 마을에는 이전에 한가지 방식이 있었다. 전체 마을에 속하는 공공부지에 사묘를 세우고, 학교를 지어서 모두가 이익을 누리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교민'을 어느 정도 양성한 후, 공공용지게 사묘를 세울 것인가, 교회를 세울 것인가를 놓고 다툼이 일어나는 곳이 많았다. 그리하여 많은 마을의 '민교충돌'의 촛점이 된다. 예를 들어, 의화단의 발생지중 하나인 산동 관현 이원둔교안은 바로 공공용지를 교회가 점거하여 교회당을 만든 것으로 인하여 분쟁이 이십년간 지속된다. 최종적으로는 무력충돌이 되었다. 몽골의 분쟁 하나는 교민이 교회당을 짓기 위하여, 평민의 좋은 밭을 점거한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강제철거후에 합리적인 보상을 해주지 않은 것이다. 청나라정부관리는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좋은 밭을 빼앗긴 중국농민들에게 척박한 땅을 준다. 이 사건의 본질은 서양인 선교사 및 교민의 만횡에 대하여, 청정부와 중국평민이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홍콩의 '점중'사건 및 이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에서, 우리는 일부 홍콩인들이 당시 교민들과 같이 자극, 확대, 무리한 소란의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전의 교과서에서는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오줌을 누거나, 버스에서 먹거리를 먹거나, 하는 것을 가지고 대륙관광객들을 '메뚜기떼(蝗蟲)"라고 부르고, 홍쿵주둔군영을 자극하고, 길거리를 점거한다. 그 수법과 방식은 당시 교민들이 사건을 일으키던 것과 비교하자면 형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당시 교민들이 사건을 일으킨 배후는 선교사의 종용과 고무가 있었다. 지금 홍콩에도 어떤 목사가 나서서 공항을 폐쇄시키자고 선동했다. 당시 교민들이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배후에 강대한 서방선교사와 서방제국주의정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홍콩의 '점중'사건의 배후에서 분명히 서방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당시 '민교충돌'이 확대된 후, 경제적인 이익외에 선교사는 자주 각국공사를 통하여 청정부가 현지관리를 교체하도록 요구한다. 심지어 어떤 서방에 '우호'적인 관리를 보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점은 오늘날 홍콩의 '점중' 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점중'사건은 홍콩에서 인심을 얻지 못하고 있고, 많은 민중의 반감을 사고 있다. 이 점은 거의 당시 각지 '민교충돌'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민중충돌이지만, 배후는 중국과 서방세력의 힘겨루기이다.

 

그러나, 당시 '교안'의 결말이 오늘날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나타날 수는 없다. 당시의 '교안'이 형성한 민교충돌이 대부분 선교사, 교민측의 승리로 끝난 것은 그 핵심이 무능한 청정부가 속속 서방에 무릎을 꿇고, 계속하여 양보하였기 때문이다. 서방은 교민을 도구로 이용하여 막무가내로 나갔다. 청정부의 각급 관리들은 일을 다독이기 위하여 왕왕 교민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보통중국민중의 이익과 민심을 희생시켜서 결국 의화단의 난을 불러온다. 지금 중국정부는 이미 청정부가 아니다. 청정부일 수도 없다. 현재 중국정부는 새로운 '민교충돌'과정에서, 더 이상 서방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청정부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부득이 의화단을 이용하여 서방에 대항하고 서방을 배척하지도 않을 것이다. 현재 중국정부 및 특구정부는 사태의 발전을 통제할 능력이 있고, 이치에 맞고 힘있게 단계적으로 무대앞으로 나와서 도발하는 자들 및 배후의 지지자들의 무리한 요구에 대응할 것이다. 중국 및 홍콩의 많은 민중은 더 이상 예전처럼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민중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부득이 의화단이 되어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그 시대는 이미 흘러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의 '점중'자는 만일 당시 교민들이 서방의 보호를 받아서 중국을 굴복시키고자 한다면, 실로 세계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사고방식이 아직도 식민지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당연히 머리를 시대에 맞게 고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