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지방/홍콩; 마카오

마카오 카지노왕대결: 뤼체우(呂志和)와 스탠리호(何鴻燊)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신재부

 

2002년이전까지 도박업에는 문외한이었던 뤼체우(중국병음으로는 뤼즈허)가 어떻게 마카오에서 반세기를 질타하던 스탠리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심지어 일약 아시아 2위부호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성공적으로 카지노라이센스를 취득한 후, 뤼체우는 스탠리호의 '카지노를 원동력'으로 하는 모델을 취하지 않고, 아시아풍정을 두드러지게 하고 오락과 레크리에이션의 리조트를 만들어 관광객들이 더욱 완벽하게 체험할 수 잇게 했다. 두 카지노왕은 사업대결외에, 뤼체우 집안에서는 이미 승계방안을 분명하게 만들었지만, 스탠리호의 가족은 재산분쟁의 풍파에 시달리고 있다. 은하오락(銀河娛樂)은 최근 들어 성장세를 보이며, 오박(澳博)지주 및 신호국제(新濠國際)를 추월하고 있다. 이는 가족지배구조와 합리적인승계방안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2014년 1월 17일, 블룸버그의 억만장자지수에 따르면, 마카오도박업의 거두이자 은하오락집단의 창시자인 뤼체우의 총자산은 리카싱을 넘어 아시아최고부자에 올랐다고 보도한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하고 있을 때 저녁 10시 블룸버그는 다시 소식을 내놓는다: 뤼체우가 보유한 은하오락의 주식수를 수정한 후, 237억달러의 재산으로 아시아 제2대부호가 되었으며, 리카싱이 여전히 295억달러로 아시아최고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잇다고 하였다. 뤼체우는 이 희극적인 일막으로 '반나절 최고부자'에 올라 본 것이다.

 

비록 뤼체우가 최고부자의 자리를 빼앗아가지는 못했지만, 뤼씨가족은 최근 들어 카지노왕 스탠리호 가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마카오 도박업의 새로운 패주가 되었다는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뤼체우 가족이 오늘날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비지니스지혜가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양호한 가족지배구조 및 승계와도 관련이 있다.

 

뤼체우의 증조부인 뤼더잉(呂德盈)은 광동 오읍(五邑)지구 최초의 교포상인중 한 명이다. 청나라 광서연간에 멀리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가서 장사를 한다. 그리고 3대동안 번성한다. 뤼체우의 부친 뤼진췐(呂金銓)은 미국에서 여러해 살다가, 계속 이국타향에 머물고 싶지 않아, 샌프란시스코에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장사를 한다. 뤼체우는 1929년 강문(江門)에서 태어난다.

 

1934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뤼체우의 온가족은 홍콩으로 피난을 간다. 전쟁의 영향을 받아, 뤼체우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학업을 중단한다. 그리고 부친을 도와 가족의 의류제조공장과 식품도매업에 종사한다. 그의 비니지스두뇌는 13살대 이미 드러난다. 당시 홍콩은 이미 함락되고, 경제는 불경기이고, 밀가루, 식용유등 원재료가 부족했다. 뤼체우는 사하분(沙河粉)으로 '지단마자이'(즉 사치마)를 만들고, 카사바가루로 밀가루를 대체하여 분피(粉皮)를 만들어 인기를 끈다. 3년동안 뤼체우는 수백만일본군표를 벌어들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쟁이 끝난 후 군표는 휴지조각으로 바뀐다. 뤼체우는 이로 인하여 용기를 잃지 않고, 이모부와 함게 자동차수리사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몽콕(旺角) 서양채가에서 자동차부품도매를 하여 자본을 축적한다.

 

1950년대, 뤼체우는 우연히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군의 군수물자가 많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트랙터, 굴삭기, 기중기등 중형기계설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3년 홍콩인구는 220만명에 달하고, 대부분의 하층주민은 철판이나 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고 있었다. 건축업이 발전할 여지가 많았다. 뤼체우는 민감하게 거기의 비지니스기회를 포착한다. 그래서 친히 오키나와로 가서, 미군으로부터 기기를 수입하여 홍콩으로 수입한다. 홍콩의 여러 건축회사들이 앞다투어 사가서 몇 배의 이익을 남긴다. 1955년, 가화(嘉華)공사가 성립된다. 뤼체우는 이를 통하여 처음으로 목돈을 벌었을 뿐아니라, 부호친구들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훠잉동등이다. 훠잉동은 건축, 선박 및 바닷모래사업에 종사하는 유영(有榮)회사를 운영하던 동안에 뤼체우로부터 기계를 구입했다.

 

뤼체우는 잘 알았다. 미군물자를 전매하는 것만으로는 장기적인 사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대량의 주택이 지어지면서, 시장에는 모래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어났다. 단순히 기계만 제공하는 것보다는 돌을 채굴하는 광산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나았다. 1964년, 가화공사는 1.6억홍콩달러를 들여 구룡 안달신도의 한 채석장의 채굴계약을 체결한다. 그는 홍콩에서 처음으로 채석허가를 받은 기업이 되고, 사업실적도 아주 좋았다. 이대부터 뤼체우는 '석광대왕'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후 가화는 계속하여 홍칸 해저터널건설등 여러 정부의 인프라사업에 참여한다.

 

1970년대말, 홍콩정부는 침동(尖東)의 매립지를 매각한다. 당시 시장에서는 침동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뤼체우는 쇼핑천국인 홍콩이 매년 200만의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는 점에서 비지니스기회를 느낀다. 1979년, 가화집단은 6800만홍콩달러를 투자하여 이 부지를 사들인다. 그리고 3억홍콩달러를 들여 해경가일주점(지금의 해경가복주점, 인터콘티넨탈 그랜드 스탠포드 홍콩 호텔)을 건설하여 침동에 들어선 첫번재 오성급호텔중 하나가 된다. 홍콩의 관광업이 신속히 발전하면서, 이 호텔은 이윤을 많이 남긴다. 그외에 가화집단은 해외시장도 대거 개척하여 호텔업과 부동산업에 뛰어든다. 전후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피닉스 및 싱가프로, 말레이시아에서 호텔을 매입한다.

 

1987년 가화집단의 부동산사업을 맡는 가화국제집단유한공사가 상장을 한다. 1991년, 가화는 건자재사업을 분리시켜 상장시킨다. 가화건재(전신은 가화국제간업공사)는 홍콩 콘크리트시장의 70%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1996년, 뤼체우는 150억홍콩달러의 자산으로 홍콩부호랭킹 10위에 오른다.

 

지금, 조용히 지내오던 뤼체우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섰다. 그것은 그가 '석괃대왕' 및 '호텔거두'로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은하오락이 그를 '마카오의 새로운 카지노왕'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2002년, 마카오정부는 스탠리호의 40년에 걸친 도박업독점을 타파하고 카지노라이센스를 개방하기로 결정한다. 뤼체우는 기회를 잡아서, 미국 라스베가스의 샌즈그룹의 Sheldon Adelson과 합자가여 정부로부터 3개의 카지노라이센스중 1개를 획득한다. 비록 1년도 되지 않아, 쌍방은 전략적인 의견차이로 갈라지게 되었지만, 뤼체우는 여전히 호텔과 카지노사업을 대거 발전시킨다.

 

2005년, 뤼체우는 은하오락의 자산을 상장회사 가화건재에 넣는다. 그리고 은하오락집단유한공사로 명칭을 바꾸어 최초로 카지노라이센스를 지닌 상장업체가 된다. 아시아의 라스베가스대로로 불리는 마카오로에 은하오락은 여러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다. 2015년에 완성될 마카오은하제2기가 있다. 이들 프로젝트는 모두 은하오락의 성장동력이다. 2008년 금융쓰나미이후 은하오락은 놀라운 폭발력을 보인다. 실적은 고속성장하고, 주가는 로켓트처럼 치솟는다. 2013년에 은하오락의 주가는 2012년말의 30.35홍콩달러에서 2014년말에는 69.55홍콩달러까지 치솟아 연간 129%의 성장을 보인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뤼체우의 자산을 급격히 늘어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아시아 제2대부호가 된 것이다. 뤼체우가족기업은 여전히 가화집단을 모기업으로 한다. 가화집단의 핵심사업은 부동산개발 및 투자, 호텔 및 건자재, 대형오락리조트시설을 포함한다. 200개가 넘는 자회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투자는 홍콩, 마카오, 중국 및 동남아, 미국등에 흩어져 있다. 그중 뤼체우가족은 은하오락의 51%지분 및 가화국제의 약 60%지분을 보유하고 ㅇㅆ다.

 

마카오를 얘기하자면 스탠리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스탠리호의 사업은 마카오도박경영권의 변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1년, 마카오정부는 카지노라이센스를 공개입찰한다. 그해 10월, 스탠리호는 마카오카지노라이센스를 획득하여 마카오의 카지노사업을 40년이상 지배한다. 2002년, 마카오정부는 카지노라이센스를 1개에서 3개로 늘이기로 결정한다. 전세계 각지에서 온 회사들이 경쟁을 벌였고, 스탠리호가 보유한 마카오박채지주유한공사가 그중 1개의 카지노 라이센스를 획득한다. 다른 2개는 미국 서부 카지노왕인 Stephen Wynn과 은하오락이 획득한다. 마카오카지노업은 '천하3분'의 국면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해 12월, 뤼체우와 Adelson은 결별하여 각자 발전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마카오정부에 카지노라이센스를 2개로 나누어줄 것을 신청하여 허가를 받는다. 그 후, 마카오정부는 모든 카지노라이센스보유자에게 1번 분할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스탠리호의 오박회사는 2005년 카지노 라이센스를  딸 팬시호(Pancy Ho Chiu-King, 何超瓊)과 미국MGM의 합자회사에 나누어준다. 그들은 각각 50%의 지분을 보유한다. Wynn(중국명 永利)은 2006년초 카지노라이센스를 나눈 다음 하나를 스탠리 호의 아들 로렌스호(Lawrence Ho, 何猶龍)의 신호(新濠)국제발전유한공사와 오스트레일리아 PBL의 합자회사에 매각한다. 이후 마카오의 카지노사업은 "삼족정립"에서 "육웅쟁패"로 바뀐다. 스탠리호의 가족은 6개의 카지노라이센스중 3장을 가지고 있어, 반벽강산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스탠리호의 가족이 가진 마카오의 도답사업은 주로 오박과 신호이다. 오박은 마카오에서 17개의 오락장과 2개의 호텔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리스보아(葡京)카지노이다. 카지노의 수와 도박수입으로 말하자면, 오박은 마카오에서 최고이다. 신호의 산하에는 마카오에 3개의 카지노가 있고, 동시에 아시아지역의 로또사업도 벌인다.

 

은하오락의 산하에 마카오갤럭시종합리조트, 마카오스타월드호텔, 및 3개의 카지노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19억달러를 투자하여 지은 갤럭시마카오리조트는 2011년에 개업했고, 2200개의 객실, 450개의 카지노테이블 글고 1300개의 슬럿머신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규모와 카지노수에서는 오박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발전추세는 아주 대단하다.

 

은하오락은 2010-2012년에 영업수입이 가각 57.5%, 113.8% 그리고 37.8%가 성장했다. 이를 보면 상승세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체적으로 오박과 신호보다 높은 수준이다. 동시에 은하오락의 순수익증가가 또한 상당하다. 규모가 가장 큰 오박은 수입에서이건 이윤성장세에서이건 모두 약세를 보인다. 2012년의 수입증가율은 겨우 4.5%에 그쳤다.

 

최근 들어, 은하오락의 실적이 업계내에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마카오도박업의 평균이익회수율을 제한 후의 은하오락, 오박 및 신호의 초과이익회수율을 보면, 은하오락은 2008년이래 시장에서 양호한 실적을 나타냈고, 수익회수율이 계속 높았다. 최근 들어 232%에달한다. 이는 오박의 58%와 신호의 55%를 훨씬 넘어선다. 비록 3개의 회사는 모두 마카오도박업의 평균치를 넘어섰지만, 확실히알 수 있다. 시장에서는은하오락에 대하여 더욱 낙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미래의 성장에 대하여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뤼체우가 '새로운 카지노왕'이 되어 마카오 도박업을 40년간 질타했던 스탠리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운때문이 아니다. 그는 남다른 비지니스민감도를 지녔고, 심시도세(審時度勢)하며, 기회를 잡았다. 화염이 치솟던 전쟁중에서나, 아니면 모두 새로 건설해야 했던 전후시대이나 그는 모두 민감하게 시대의 비지니스기회를 붙잡았고, 행동에 나섰다. 뤼체우도 그의 지혜를 카지노라이센스를 획득하는데 썼다. 뤼체우는 이전에 건자재와 호텔관련사업에 종사하여, 도악업에는 문외한이었다.

 

2001년, 마카오 카지노업이 개방되면서, 뤼체우는 미국카지노업계의 유명인사 Adelson과 합작하기로 선택한다. 은하오락에 도박업경험을 도입한다. 그외에 뤼체우는 마카오정부의 의도를 분석하여, 마카오정부가 카지노라이센스를 개방하는 것은 단순히 1장의 라이센스를 3장의 라이센스로 늘이려는 것이 아니라고 파악한다. 오히려 마카오의 카지노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카지노업에서 산업의 다양화발전을 꾀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뤼체우이건 Adelson이건 모두 풍부한 호텔운영경험이 있다. 이것은 바로 마카오정부가 좋게 본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뤼체우가 21개 응찰자중에서 카지노 라이센스를 얻어내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지만, 그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었다.

 

비록 카지노업에는 문외한이지만, 뤼체우는 여러해동안의 비지니스경험으로 카지노운영에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있었고 혁신을 주장했다. 뤼체우와 Adelson은 합작으로 라이센스를 얻은 후, 카지노경영전략에서 이견을 드러낸다. 1년만에 서로 갈라지게 된다. Adelson은 라스베가스의 카지노를 그대로 마카오로 옮겨오고자 했다. 그러나 뤼체우는 성공은 혁신에 있지 복제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실사구시적이다. 당신이 그렇게 한다고 나도 똑같이 카피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는 큰아들 프랜시스뤼(뤼유퉁, 呂耀東)을 데리고, 부동산, 호텔 및 중국요소를 카지노경영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하여 아시아풍격의 대형 오락리조트를 만든 것이다. 양조위(梁朝偉), 주윤발(周潤發)을 광고모델로 쓰고, 허관문(許冠文)이 주재한 <일척천금(一擲千金)>을 후원한다. '중국식카지노'를 강조하여 은하오락 산하의 카지노를 다른 카지노와 구분시킨다.

 

가족기업에 있어서, 가족지배구조, 기업승계는 기업의 장기발전을 위한 초석이다. 최근 들어, 은하오락의 성장세가 40년 카지노경험을 지닌 오박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신, 구 카지노왕의 가족지배구조 및 승계와도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뤼체우와 처 자오진핑(趙錦萍)은 모두 3남2녀를 낳았다. 그들은 모두 공부를 마친 후 가족기업에서 일하며 부친의 사업을 도왔다. 외부인들이 보기에, 뤼체우의 가족관계는 화목하고, 나쁜 소문이나 보도는 나온 적이 없다. 지금 뤼체우는 이미 84살이 되었고, 가족재산분배문제에 대하여 그는 2012년 공개적으로 이미 조치를 마쳤다고 한 바 있다. 뤼체우는 일찌기 창업자의 신분으로 가족신탁을 만들었고, 이 신탁이 보유한 은하오락주식은 수익인이 뤼체우, 뤼야오동 및 뤼후이위(呂慧瑜)가 포함되어 있다; 가화국제주식은 또 다른 가족신탁이 보유하고 있는데 수익인은 뤼체우, 뤼야오동, 뤼후이위, 뤼야오화(呂耀華)이다. 가족신탁이 주식을 보유한 외에 뤼체우 본인도 은하오락 및 가화국제의 주식을 보유하고 아직 분배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가족기업의 다음대 경영자에 대하여도 륓우는 이미 준비를 마쳤다. 아마도 지역과 업무로 분배할 것이다. 마카오의 업무는 장남 뤼야오동이 맡고, 미국사업은 차남 뤼야오난(呂耀南)에게 돌아가며, 홍콩사업은 삼남 뤼야오화에게 돌아갈 것이다. 현지의 호텔업무는 장녀 뤼후이위에게 맡기며, 인사행정업무는 막내딸 뤼후이링(呂慧玲)이 맡는다. 뤼체우는 이런 후계배치를 마쳤는데, 자녀들의 능력에 대한 장기적인 관찰과 시험을 거친 판단에 따랐다. 그리고 장남에게 가장 중요한 마카오의 사업을 맡기고 장기간 후계자수업을 받게 했다.

 

뤼야오동은 1955년에 가화회사와 같은 해 태어난다. 어렸을 때, 뤼야오동은 매번 형제자매와 채석장에 가서 놀 때 부친이 온 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들게 일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부친이 사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목도한다.

 

1970년대, 뤼체우가 안다천 대아채석장을 상장하고자 할 때 한 동사가 시장가치가 높은 것을 보고 보유주식을 팔았고, 일부 지분을 어느 양행(洋行)에 넘겨주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양행은 전체 채석장을 집어삼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뤼체우가 가족들에게는 사업상의 어려운 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뤼야오동은 부친이 곤란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고, 곁에 믿을만한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공부를 마친 후 가족기업에 들어가서 부친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한다.

 

바로 어렸을 때의 이런 작은 일이 뤼야동으로 하여금 가족에 대하여 맡아야할 일과 가족기업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대학신청할 때, 집안에서 계속 건자재, 건축 및 부동산사업을 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뤼야오동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토목공정을 전공한다. 1979년, 그는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홍콩으로 돌아와 가화집단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큰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부친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아주 필요했기 때문에, 나에게 당시에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인 황인종은 가족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뤼체우는 뤼야동에게 특권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하층의 직위에서 일하게 시킨다. 뤼야동이 처음 맡은 일은 안다천 채석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채석장의 운영프로세스의 최선의 방식을 발견한다. 그후, 그는 점차 경영진의 단계를 밟아 올라간다. 1987년에는 가화집단의 집행동사가 되고, 대륙에서 여러 개의 부동산프로젝트를 책임진다.

 

뤼체우가 2002년 카지노라이센스를 획득한 후, 뤼야오동은 뤼씨집안에서 마카오카지로사업을 개척하는 총사령관이 된다. 이전에 부동산과 호텔경영의 경험을 바탕으로 카지노업에 진출하는 단단한 기반을 닦는다. 입찰에 참가하는 대다수의 컨소시움의 투자계획이 모두 마카오반도 즉 스탠리호의 리스보아 근처인 것을 보고는 뤼야오동은 당시에는 황무지였던 노구권지(路區圈地)156만평방미터를 선택하고, 대형리조트를 건설하기로 한다. 부동산개발의 각도에서 그는 그곳에 잠재적으로 가치상승의 여지가 크다고 보았다.

 

마카오갤럭시리조트의 위치선정과 계획에서, 뤼야오동은 부친과 마찬가지로, 직접 스탠리호의 도박장을 원동력으로 하는 경영방법을 베끼려 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라스베가스의 산업구조를 아주 좋게 보았고, 카지노외에 오락 레크리에이션 요소를 도입하는데 동의했지만, 마카오에는 관광명소가 없어서, 라스베가스의 모델을 그대로 마카오에 옮겨오는 것은 원치 않았다.

 

뤼야오동이 전세계를 돌아가닐 때, 아시아에서의 서비스는 그에게 가장 좋은 체험을 안겨주었다. "아시아인은 독득한 방식으로 손님과 친구들을 기쁘게 해준다" 동시에, 뤼야오동은 장래 주요고객군이 대륙과 홍콩의 중산가정이고 일부분 동남아의 관광객이라는 것을 주목한다. 그리하여 리조트의 포지셔닝을 동남아풍정의 종합레크리에이션카지노로 정하여 세계에서 유명한 Banyan Tree, 일본의 Okura호텔등 아시아의 일류수준을 대표하는 브랜드를 끌어들인다. 이를 통하여 더욱 완벽하게 리조트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뤼야오동의 새로운 요소는 마카오갤럭시를 경쟁상대방들과 구분하게 해주었고, 마카오갤럭시를 가장 성장성있는 프로젝트로 만들어 주었다. 뤼야오동은 현임 부주석이다.

 

형과 마찬가지로, 57세의 뤼야오난도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공대를 졸업했다. 1985년, 뤼야오난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Stanford Hotels Group을 설립한다. 이 그룹은 13개의 호텔을 건설하거나 인수하여 100%지분을 보유한다. 여기에는 저명한 힐튼, 쉐라톤, 메리어트 브랜드도 포함되어 있다. 뤼야오동은 동시에 Cresleigh Homes브랜드로 캘리포니아 및 산타나주의 부동산사업을 벌인다. 해외발전으로 뤼야오난은 여씨집안의 해외호텔 및 부동산자산을 승계할 것이다.

 

50세의 뤼야오화는 미국남가주대학 공대를 졸업하고 1984년 가화집단에 들어온다. 일찌기 그는 동남아로 파견되어 투자했다. 뤼야오화는 건축에 관심이 많다. 많은 부동산프로젝트는 개발, 설계에서 판매까지 직접 수행한다. 지금 그는 가화집단 부동산업무를 총괄하고 있고, 홍콩부동산부문의 동사총경리이다.

 

59세의 큰언니 뤼후이위는 캐나다 맥길대학에서 비지니스학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에 가화집단에 들어간다. 주로 아시아의 호텔사업을 책임진다. 뤼체우의 막내 딸 뤼후이링은 주로 가화집단의 인사 및 행정업무를 책임진다. 아마도 나중에 주요한 사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뤼체우는 일부 비상장자산을 그녀에게 넘겨줄 생각이다. 임대료를 수취하는 부동산을 포함하여.

 

뤼체우는 사람은 단련시켜야 된다고 깊이 믿는다. 그는 경험, 조건이 부족한 사람이 직접 고위직을 맡는 것은 좋을 일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의 엄격한 요구하에, 5명의 자녀는 가족기업에서 여러해동안 단련되고 각각 서로 다른 경영진의 위치에 올라갔다. 뤼체우의 제2대에 대한 교육방식은 다시 그들의 다음 세대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뤼야오동은 아들에게 말한 바 있다. 그는 아들이 반드시 가족기업에 들어오도록 강요할 생각이 없다. 다만 일단 들어오면, "진정 자신이 한 명의 경영진이 되어야 할 뿐이다. 오너가 되는 것이 아니다." 뤼야오동 자신도 "전심전력을 다하여 제대로된 경영진이 되고자 한다"고 한다.

 

뤼씨집안의 상대적으로 간단한 가족구조와 비교하면 나이 92세의 스탠리호는 모두 4명의 부인, 17명의 아들을 두었다. 가족구성원도 많고, 4명의 부인쪽이 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자녀의 능력과 의사는 후계에 성공하느냐의 관건중 하나이다. 스탠리호는 자녀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은 후계자가 되겠다는 뜻을 나타내지 않는다. 4부인중 큰부인쪽은 사업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셋째, 넷째부인쪽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또한 공부하는 단계이다. 카지노업무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둘째부인쪽의 4명의 자녀이다. 그들은 모두 스탠리호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부인쪽의 장녀 팬시호(何超瓊)은 외부의 눈에 스탠리호의 가족중 가장 정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미국 산타클라라대학에서 마케팅과 국제비지니스경영을 전공했다. 1983년 졸업후, 부친의 소개로 프랑스 동방회리은행(Banque de l'Indochine)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도전성이 부족하다고 보아 이직한 후 가족기업의 자선기구에서 일하면서 자금모집업무를 맡는다. 나중에 스스로 천기PR회사를 설립하여 아주 성공을 거둔다. 스탠리호는 그녀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가족기업에 들어와서 일하도록 하였다.

 

당시, 스탠리호는 홍콩중려집단과 합작한 '분사비항'공사가 있었다. 선박은 낡고, 운영이 하락세였다. 팬시호는 이를 맡은 후, 큰 돈을 들여 새로운 선박을 구매하고 새로 서비스인원을 훈련시켜, 주강델타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인 운수회사중 하나로 발전시킨다. 스탠리호는 딸의 경영능력을 더욱 믿게 된다. 마카오 카지노라이센스가 3개에서 6개로 늘어날 때, 오박은 미국MGM을 끌어들여 카지노 라이센스중 하나를 팬시호에게 넘겨준다. 2005년, 팬시호는 MGM과 합자회사인 MGM금전초호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개인명의로 카지노업에 뛰어드록, 오박을 벗어난다. 동시에 팬시호는 신덕집단의 동사총경리이다.

 

둘째부인의 다섯째아들 로렌스호도 후계자반열에 들어간다. 큰누나 팬시호와 마찬가지로, 로렌스호는 1999년 터론토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가족기업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이력을 가지고 홍콩에서 직업을 찾는다. 결국 이부증권(怡富證券, 자덴 플레밍)의 아시아파생상품부에 들어가 일을 한다. 1년후, 그는 iAsia Technology(지금의 회영지주)에 지분참여하고 집행동사를 맡는다. 그리고 회사를 홍콩 창업보드에 상장시킨다. 그리고 선후로 3개의 IT기업을 인수한다. 25살이 되던 해, 그는 부친으로부터 연속 4년간 적자를 나타낸 신호국제를 넘겨받는다. 당시 회사의 산하에 진보해선방(珍寶海鮮舫)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진보해선방을 개혁하고 새롭게 하여 3년후, 신호국제는 이익을 나타낸다. 2006년, 신호국제는 Wynn에서 분리된 카지노라이센스를 얻게 된다. 지금, 로렌스호는 신호국제의 주석 겸 행정총재이다.

 

스탠리호는 둘째부인의 나머지 3명 자녀에게 신덕집단의 사업에 참여하도록 해서 경험을 축적시킨다. 어떤 직위는 주석, 동사총경리로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직무를 맡아서 서로 다른 분야를 맡는다. 모든 것이 제대로 궤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1년 스탠리호집안의 재산분쟁사건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다. 이때가 뤼싸, 호씨집안의 사업이 차이를 보이는 분수령이었다. 호씨집안분쟁이 일어난 시점과 딱 맞아 떨어진다. 2011년 1월 24일 오박은 공고를 내어, 스탠리호가 자신이 보유한 31.665%의 오오(澳娛., 오박의 모회사)의 지분을 모조리 양도해서 스탠리호는 더 이상 오박의 주주가 아니라고 발표한다. 둘째부인, 셋째부인 가족구성원들이 관련주식을 얻었다. 셋째부인 천왕전(陳婉珍)이 그중 50.5%의 주식을 받고, 나머지 49.5%의 주식이 둘째부인 허란츙(何藍瓊)의 5명 자녀에게 균등하게 나누어졌다. 그러나, 공고가 나오자마자, 1월 25일, 스탠리호는 변호사 가오궈쥔(高國駿)을 통하여 이 공고를 부인한다. 그리고 셋째부인과 일부 자녀들이 성실하지 않게 그의 가산을 빼앗아갔다고 말한다. 이 사건을 '강도'라고 표현한다. 스탠리호의 원래 뜻은 지분을 넷째부인에게 ㄴ누어주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셋째부인 천완전은 스탠리호가 서명한 성명을 읽으면서, 주식분배는 완전히 진심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아무도 강요하거나 지시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1월 26일 스탠리호는 휠체어에 앉아서 TV카메라 앞에 섰다: "한 가족이 서로 고발할 수는 없다" 가족문제로 법원까지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다만 변호사 가우궈쥔은 TV성명이후 스탠리호를 대표하여 둘째부인, 셋째부인 그리고여러 자녀등 11명과 관련회사를 홍콩고등법원에 고발한다. 그리고 오오의 31.664%지분을 돌려달라고 한다. 1월 31일, 둘째, 셋째부인은 성명을 뉴스원고를 발표하여, 스탠리호가 이미 각 자에게 말을 했고, 더 이상 소송을 진행할 이유가 없어서 법률절차는 철회했다고 한다.

 

모두가 재산분쟁사태가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2월 16일, 스탠리호의 변호사인 가오궈쥔은 둘째부인쪽의 팬시호와 허차오펑을 고소한다. 구두협의를 어겼다고 주장하며, 두 사람에게 즉시 지분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3월 10일, 스탠리호의 온가족은 공동성명을 통해 사건이 원만히 해결되었다고 발표한다. 스탠리호는 이미 둘째부인의 딸인 팬시호와 허차오펑에 대한 주식반환소송을 종결했다고 한다. 3월 24일, 오박은 공고를 통하여, 오오가 빼앗긴 31.665%의 지분중에서 0.117%는 스탠리호가 보유하고, 6%는 넷째부인 량안치(梁安琪)가 보유하고, 나머지 25.5%는 스탠리호의 가족구성원이 보유한다고 하였다. 넷째부인 량안치는 오오, 오박은 모두 균형있게 참여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다만 구체적인 분배비율은 말하지 않았다.

 

재산분쟁사건은 오박에 큰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신덕과 신호에까지 파급되었다. 3곳의 상장기업의 주식가격은 계속 하락했고, 사건이 완결되고나서야 비로소 약간 올라갔다. 이제 가족재산분쟁은 이미 끝이 났지만, 여전이 불확정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만일 량안치가 말한 것처럼 오오의 주식이 나눠진다면, 호씨집안에는 대주주가 없게 된다. 이것은 오박의 발전에 여러가지 장애를 남겨두게 될 것이다.

 

구카지노왕 스탠리호이건 신카지노왕 뤄체우이건, 모두 탁월한 비지니스지혜와 새로운 것이 도전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은하오락은 최근 들어 놀라운 폭발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어느 정도 가족지배주고, 자녀배양 및 합리적인 승계계획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부친으로서, 스탠리호와 뤄체우는 모두 자신의 자녀를 보살핀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가장 좋은 생활과 교육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탠리호의 가족은 방대하고 가정구조도 복잡하며, 재산분쟁사건도 지금 눌러놓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른다. 미래 오박은 아마도 여러 사람들이 나눠갖게 될 것이다. 반대로 뤼체우는 가정구조가 비교적 간단하고, 승계에 상대적으로 분명한 계획가 조치를 취할 수 있다. 5명의 자녀는 지역과 업종으로 산업을 나누게 될 것이며, 에상되는 사업간에 서로 부딛치는 것이 적다. 두 상장회사는 신탁의 지배주주의 수익인은 모든 가족구성원이 아니라, 일부 회사경영업무를 책임진 가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안배는 자녀간에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을 줄인다. 당연히, 뤼씨집안의 가업승계도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뤼체우는 여전히 가화집단의 주석이다. 그가 완전히 퇴출하게 되면 경영대권은 자녀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고, 승계의 시험은 진정으로 시작된다 할 것이다.

 

중국대륙의 제1대기업가들에 대하여 뤼체우와 자녀에 대한 가르침과 모범을 보인 것, 그리고 자녀들이 가정에 느끼는 동질감등은 배울만하다.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가정분위기에 훈도받았는데 심지어 스탠포드, 캘리포니아주립대학등 명문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더욱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녀들이 기업으로 돌아와서 장기간 기업의 단련을 거치면서 자녀의 능력, 흥미를 발견하고, 기업과 최선의 결합점을 찾아준다. 뤼체우는 신체조건이 아직 좋을 때 사업과 미래지분분배를 마쳐서, 자신 및 자녀들에게 완충지대를 만들어주고, 준비하고 교체할 시간을 벌었다. 이는 기업가들이 빨리 가업승계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