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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항일전쟁의 진실한 전황

by 중은우시 2014. 10. 2.

글: 서염(徐焰)

 

중국에서는 20세기에 일어난 항일전쟁에 대하여 수십년동안 애국주의정신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교재로 활용하여 왔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선전방향은 정치적 형세의 필요에 따라 일방적인 점이 있었다. 이는 오늘날 현실적인 분쟁에 부탁쳤을 때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제도)분쟁이 격화된 후, 사람들은 분개한다. 패전국이 어찌 승전국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대내적으로 정부가 '연약'하다는 질책을 하게 된다. 여러해동안 국내에서는 '정면교육(正面敎育, 긍정적인 면을 가르치고 부정적인 면은 가르치지 않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중국이 일본을 이긴 주력군이라고 강조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오히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사죄하지 않고 심지어 정치인들은 다수가 침략을 인정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왜 중국은 일본에 전쟁배상금을 포기하였는가? 지금, 사람들은 여러 방면의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옛날에 그 일방적인 '정면교육'은 더 이상 쉽게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많은 '분청(憤靑)'은 바로 일방적교육이 반작용이다. 객관적으로 당시 중국항전승리의 일부 국한성을 설명하여야, 많은 사람들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중일갈등의 역사적 유래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고, 현재의 분쟁에서 이성적인 태도로 애국할 수 있을 것이다.

 

1. 모택동의 중국항전에 대한 작용은 객관적인 평가가 있다.

 

오랜 기간동안, 중국은 적빈적약(積貧積弱)하여, 백성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하여 왕왕 스스로의 전적(戰績)을 과장하여왔다. 예를 들어, 일부 선전자료에서는 항전시 중국전선이 동방반파시스트전쟁의 주전장이라고 강조했고, 중국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친 주력군이라고 하였다. 이런 주장은 비록 서방의 중국항전의 작용을 폄하하는데 반박하는 논조이고, 당시 항전한 군민의 공적을 칭송하는것이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리 정확하지 않다. 사실상, 모택동이 외빈을 접대할 때 한 말에서, 중국항전에 대한 작용을 아주 객관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1956년 9월 24일, 모택동은 중공제8차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한 유고슬라비아공산주의자연맹의 대표단과 중국의 항전시의 작용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우리는 하나의 지대(支隊)였다. 주력군이 아니었다"(<모택동문집>제7권, 인민출판사 1999년판). 당시 중국은 너무나 가난하고 약했다. 비록 대국의 이름은 있었지만, 대국의 실력은 없었다. 그저 지구전으로 일본을 붙잡아둘 뿐이었다. 세계에서 파시스트를 이긴 주력군은 누구인가? 실력으로 보자면 소련, 미국, 영국의 3개국이다.

 

과거에 일부 정면교육의 내용은 바로 모택동의 이런 객관적인 평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국내의 일부 사람들이 항전의 주요한 의의를 강조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중국이 빈약하여 전력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았다. '주력군', '주전장'이라고 선전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일부 수치는 과학적인 사학의 태도로 분석해보면 엄격하지도 않고, 심지어 개념을 바꾸어 착오를 일으킨 것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군대용어중 "사망(死亡)"과 "상망(傷亡, 사상)"이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해서 중국이 3500만명 '상망'(그중 사망은 2000여만명)이라는 것을 '3500만명 사망'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주장에 따라 중국은 2차대전중 희생자가 가장 많이 나온 국가라고 말하게 된다. 소련은 2700만명(러시아의 또 다른 수치에서는 265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순수한 사망숫자이다. 2000만명이상의 부상숫자는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소련이야말로 2차대전에서 최대의 희생을 입은 국가이다.

 

어떤 사람은 중국전장에서 일본군을 소멸시킨 숫자를 통계냈다. 일본이 전후에 인정한 관내(關內)전장에서 누계 133만(전시일본군은 포로로 잡히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에 동북전장에서와 중국인이 버마전장에서의 전과를 더하여, "일본군150만명을 소멸시켰다"고 숫자를 내놓았다. 이 계산법은 비록 근거는 있지만, 일본군의 부상후 치료를 받고 전장에 복귀한 인원수를 빼먹어서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전쟁통계학의 원칙에 다라, 이 전투 혹은 전쟁에서 적군을 소멸시킨 통계는 사(死), 상(傷), 병(病), 부(俘, 포로)를 합친다. 이것은 적군의 순감소인원숫자이다. 지구전에서 매 전투의 총수를 합쳐서 계산한다면, 왕왕 대량의 통계중복이 일어나서 실제숫자보다 훨씬 높아지게 된다. 이는 부상병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부대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때는 한 명의 사병이 전쟁에서 부상을 여러번 입는데 이 사람이 매번 전투마다 부상을 입은 숫자에 누계된다면, 몇 명으로 나온 숫자가 기실은 바로 1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지구전에서 한 국가의 손실을 계산하려면 계산에서 "회복할 수 없는 손실" 즉 사망, 포로(미석방의) 혹은 중상장해인의 누계로 계산하여야 한다.

 

얼마전의 일부 항전성과를 선전하는 글에서, 소위 중국전장에서 소멸된 일본군이 일본전쟁에서의 군대손실중 "3분의 2"를 점한다고 과장된 비율을 제시한 바 있다. 통계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 비율은 개념을 혼용한 방식('상망'을 '사망'과 비교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계산해낸 것이다. 즉 중국군대가 조성한 일본군 150만의 '상망'과 일본군이 전쟁중 "사망"한 212만명과 비교한 것이다. 기실 비교할 수 있는 수치로 보자면, 중국전장에서 일본군의 사망은 모두 45만명이다. 전시사망총수의 22%에 지나지 않는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일본은 중국이라는 하나의 교전국만 있었다. 그외에 소련이라는 국부전쟁이 일어난 적이 있고 주로 군사대치상태에 있던 잠재적인 적국이 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 중국은 동방에서 대일작전의 주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4년간, 중국전장은 반파시스트전쟁에서의 작용은 확실히 모택동이 말한 것처럼 그저 '하나의 지대'에 불과했다.

 

2. 대일작전에서 미군이 최강의 실력을 드러내고, 전후일본처리에서 주도권을 장악한다.

 

중국항전사를 포함한 전쟁사는 증명한다. 낙후되면 얻어맞을 뿐아니라, 낙후되고 쇠약한 국가가 설사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더라도, 최종적으로 발언권은 별로 없게 된다. 중국인들이 비애로 여기는 것은 항전승리 전날 미,영,소 삼국이 일본에 승리한 후 이익분배를 협의할 때, 중국의 영토권익(외몽고문제 포함)를 탁자에 올려놓고 거래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국민당정부는 부득불 굴욕적이지만 받아들여야 했고, 전승국의 영토손실면적은 패전국보다 많았다.

 

전쟁문제에서 발언권은 결국 실력이 말을 한다. 중국은 항전때 국가가 쇠약했고, 국가권력을 장악한 국민당정권은 부패무능했다(당시 미국정부조차 이렇게 생각했다).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군대는 다수가 게릴라성격의 부대였고 이것은 대일작전이 주로 지구전 방식으로 상대방을 붙잡아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은 일본과 가장 오랫동안 전투를 벌인 나라이다. 일찌기 태평양전쟁이 개시되기 10년전인 1931년 "9.18"사변후, 동북에서 국부전쟁이 일어난다. 1937년 일본이 노구교사건후 '3개월내에 지나사변을 해결하겠다'고 떠들면서, 속전속결로 중국을 정복하고자 하여, 진흙탕에 빠지게 된다. 비록 중국의 절반을 점령하였지만, 정면전장에서는 국민당군대의 저항이 있고, 후방에는 공산당의 게릴라부대가 괴롭혔다. 일본이 투항을 선언할 때 중국의 전략요지인 북평(북경), 상해, 남경, 무한, 광주등지를 보면, 모두 일본의 점령하에 있다. 이런 전장형세와 '승리자'의 지위가 부합하는가? 객관적으로 이 시기의 역사를 얘기하자면, 중국이 1945년 일본에 전승한 것은 국제반파시스트전쟁의 대배경하에서 취득한 것이고, 단순히 본국전장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과거 항전을 선전하면서 일부 내용에서는 현실정치의 필요로 인하여, 일방적이고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국민당 당국이 항전시 선포한 전과는 왕왕 허풍이 많았다. 일궤천리(一潰千里)등 패전상황은 가급적 덮어버렸다. 신중국성립후 미국과 대립하면서 '인민전쟁'의 위력을 강조할 필요가 있어서, 미국의 태평양전쟁에서의 전적을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 땅굴전, 지뢰전등 게릴라전이 일본군을 이긴 주요한 방식인 것처럼 묘사했다. 개혁개방후, 대륙방면에서 국민당의 항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매체는 다시 대만서적에서의 과장된 자료를 그대로 인용했다. 그리하여 전체 중국전장의 작용을 크게 끌어올린다. 이런 교육은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는데는 약간의 작용을 할지 몰라고, 장기적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류의 선전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불신을 갖게 만든다. 그들은 오히려 쉽게 반대로된 왜곡된 선전을 믿게 된다.

 

일본의 2차대전에서의 병력분포를 자세히 연구해보면, 일본은 중국을 경시하고 다수의 기간동안 주력을 투입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은 그저 1940년이전의 2년간 다수의 육군사단을 관내에 투입하였고, 소련을 상대하는 관동군은 최정예부대를 유지했지만(만주의 항일유격부대를 상대하는 것은 주로 만주국군대와 만주국경찰이었다), 군비투자의 중점은 미,영에 대한 작전을 준비하는 해군에 투입했다. 일본은 공업과 재력이 서방강국에 비하여 낙후되어 있었고, 유한한 자금으로 항공병과 전함을 세계선진수준으로 유지하려다보니, 육군장비는 미,영,소,독등에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한 후, 거의 모든 해군을 대미작전에 투입하였을 뿐아니라, 육군정예도 계속하여 남양으로 내려보낸다. 전쟁말기 일본군의 병력분포를 보자: 본토와 남양에서 미국,영국에 대항하는 병력은 550만, 만주와 조선에서 소련에 대항하는 병력은 92만, 중국전장(당시의 만주국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의 병력은 110만이다. 만일 중국이 당시 대일전쟁의 '주전장'이라고 한다면, 공정하게 말해서 뒤에 "중의 하나"라는 말을 추가해야 한다.

 

만일 일본의 전쟁중 손실을 조사해보면 대다수는 미군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 일본은 숫자를 허위로 보고한 바 있지만, 전후에 야스쿠니신사에는 모든 전사자의 영패를 찾을 수 있고, 거기에 정부는 실제수에 따라 구휼금을 지급했다. 후생성의 185만명의 군인이 전사(전후 구금중 사망한 사람을 합치면 총수는 213만에 달한다)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구체적으로 사망자의 분포를 보면, 일본군이 중국관내에서 8년전쟁에서 40만이 사망한다(투항을 선포한 후에 5만명이 사망한다). 일본군이 만주에서 모두 9만명이 사망하는데 절대다수는 소련군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버마에서는 16만이 사망한다.소수의 중국원정군에 의한 사망외에 다수는 영국군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 나머지 120만명의 '전몰자'는 모두 미군과의 교전한 태평양전쟁에서 죽었다. 그중 필리핀에서만 49만명이 죽었다.

 

미군은 태평양도서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죽인다. 그리고 일본의 적지 않은 군단, 사단단위의 편제된 군대를 섬멸했다(이렇게 되면 부상병도 대부분 사망하게 된다). 이는 미군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화력과 기술장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군대는 일본군과 부분적으로 싸웠고, 사단, 여단을 섬멸한 사례는 없다. 연대를 섬멸한 경우도 등충(騰沖)과 같은 개별지구에서 나타났을 뿐이다. 편제를 유지하게 되면, 대량의 부상병들을 후송하여 치료받게 할 수 있고, 각 부대는 병력을 보충하여 전력을 바로 회복하게 된다. 해전을 보면, 중국해군은 한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스스로 침몰했고, 공군역량도 약했다. 전쟁때 일본의 대중형전함을 1대로 침몰시키지 못했다. 일본해군의 수십척 전함, 항공모함과 순양함을 절대다수가 바닷속에 가라앉았는데, 기본적으로 모두 미군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과거 일부 선전에서 소련군대가 "일본관동군을 섬멸했다"고 하였는데, 사실을 보면 정확하지 않다. 소련군은 확실히 장기간 일본관동군의 주력을 견제했다. 마지막에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에 대하여 원자폭탄보다 더 큰 충격을 준다. 그리하여 일본은 어전회의에서 소련참전 다음날 천황제를 유보한다는 조건하에 투항하기로 결정한다. 전장의 실제를 보면, 소련군은 일본군과 겨우 8일간 싸웠다. 관동군의 주력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하에서 명령을 받고 저항을 멈춘다. 그후 소련군이 들어와서 '투항을 받은 것'이다. '섬멸'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작전에 투입된 인원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을 처리하는데에서는 중국보다 더 큰 발언권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국력,군력이 중국보다 컸기 때문이다.

 

일본은 해외전장에서 중대한 손실을 입고, 본토도 맹렬히 폭격당한다. 2개의 원자폭탄투하를 포함하여. 이것은 모두 미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은 항전때 일본본토를 공격할 능력이 없었다. 소련군의 출병도 겨우 만주, 조선과 일본 북방도서(소련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도서는 원래 소련의 것이다)만 공격했다. 일본이 투항을 선언할 때, 강대한 해군을 가진 미군만이 일본경내로 진입해 들어가서 단독으로 점령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이해한다면, 미국이 일본을 이기는데 최강의 역량을 보였고, 전후에 일본처리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국가가 병약했다는 것을 직시해야 객관적으로 역사를 볼 수 있다. 민족정신의 진흥은 과학이념에 의지해야 한다.

 

국가의 현대화는 많은 정도에 있어서 이성화라고 할 수 있다. 한 민족이 민심을 진흥시키고, 내부를 응집시키려면, 자연히 영웅주의와 자신의 전적을 선전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역사의 병약함과 패전에 대하여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고인들이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치근호용(知恥近乎勇)"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 역사는 다면경과 같다. 중국인들의 항전사는 여러 각도에서 보아야 비로소 중국민족 해방투쟁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민족의 전통적인 병약함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욱 이성적으로 후세들을 교육시키고 편달하여 강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항전을 회고해보면, 먼저, 당시의 중국이 사분오열되고 아주 낙후된 농업국이라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공업강국 일본의 대거 침입에 맞서서 8년간 전면적인 항전을 해내고, 마지막으로 국제반파시스트동맹과 함께 일본을 물리쳤으며, 여러 뜻있는 인사들이 영웅적으로 분투한 것은 확실히 후세인들이 높이 칭송할 만하다. 지금 중국인들은 항전영웅을 칭송하는데 주로 그들이 완강하고 끈기있게 분전한 정신을 높이 받들어야지, 전적을 과장하는 것은 화사첨족이 된다.

 

항전사를 얘기하려면 당시 중국의 병약함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경제와 기술수준이 낙후된 것만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국민정부가 썩었다는 것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남경보위전때 11만의 수비군은 동등한 수량의 일본군이 밀려오자, 5일만에 전군이 궤멸하고 관리와 병사들이 이리저리 도망쳐 버렸다. 결국 다수는 포로가 되어 도살당한다. 중국인들은 일본군이 남경에서 벌인 대도살을 견책해야 한다. 동시에 수비군이 나라와 국민을 지키지 못한 무능도 회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항전기간에 국민당의 부총재를 우두머리로 하는 많은 군정관리들이 친일정권을 만들었고 정부군의 60만명이 적에 투항하여 친일군대가 되었다. 이런 민족의 치욕은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항전이 끝나기 전날, 일본은 태평양전장에서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나 중국전장에서의 우세한 지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1944년 봄에서 1945년초까지 "대룍교통선확보" 공세로 국민당군은 여전히 천리를 패퇴시킨다. 이때 미국대통령 루스벨트는 중국전장이 붕괴될 수도 있다고 보고 급히 소련의 참전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얄타회의에서 중국영토권익을 놓고 소련과 거래한 것이다. 전후에 적지 않은 일본인들은 "미국에만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중국에 대하여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 원인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현대과학은 정량분석을 중시한다. 전사분석의 과학성은 정확한 전적과 손실수량을 고증하는데 있고, 과장되거나 왜곡된 자료를 사용하지 않는데 있다. 데이타분석을 해보면 알 수 있다. 전면항전개시전에 중국정부통치구의 연간 철강생산량은 4만톤에 불과했다. 일본은 580만톤이었다. 당시 중국은 사분오열상태에 처해 있었고, 국민총생산은 통계조차 낼 수 없었다. 1936년 국민정부의 재정수입은 가련한 수준인 11.9억위안(미화 약4억달러)였다. 같은 해 일본의 재정수입은 100억엔을 넘어섰다(미화 약 30억달러). 당시 미국의 실력을 보면, 중국과 일본이 전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의 전시 연간 강철생산량은 8000만톤을 넘었고, 연간 재정수입은 1000여억달러에 달하였다. 전쟁에서 실력비교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중국은 전승국으로서 누려야할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동맹국으로부터 멸시를 당한다. 그 원인은 정량분석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정량분석을 하지 않고 그저 선전만 해댄다면, 그리하여 항전의 전과를 과장하게 되면, 한가지를 얻으려다 다른 것을 잃고, 스스로 모순에 빠질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중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왜 패전한 일본은 중국에 대하여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장기간 침략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까? 중국은 왜 일본에 전쟁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고 말았을까? 미국의 실력과 그가 단독으로 일본을 점령한 실제를 이해하면 사람들은 알 수 있다. 1948년 미국이 일본에 배상의무를 면제할 수있다고 선언한 후, 소련, 영국과 중국국민당당국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여겨서 할 수 없이 포기했다. 1972년 중국정부는 일본과 수교할 때도 이 바꾸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승국인 중국이 일본을 처리할 때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일부 상실한 영토권익도 회수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원래 대만에 속했던 댜오위다오는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하여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항전승리후 미군이 지배하여 중국에 넘겨주지 않았다. 1970년 미국이 일본에 '오키나와를반환'할 때, 다시 이 섬을 일본의 관리로 넘겨준다. 1972년 중일수교때, 모택동, 주은래는 댜오위다오문제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등소평과 나중의 중국지도자들도 이 결정을 답습했다. 2012년 일본정부가 댜오위다오문제로 갈등을 격화시켰을 때, 많은 중국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중국당국이 전승국이면서도 이 도서를 회수하지 못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현재 '멸시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과거 수십년간 선전교육의 사실은 증명한다. 정면교육 혹은 편면적인 해설은 교육을 받는 자로 하여금 사상적으로 아주 취약하고 풍랑을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일단 현실이 정면선전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면, 편협한 민족주의정서를 지닌 '분청'을 많이 만들어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정면선전을 하지 않고, 당시 분투사를 모조리 폄하하는 선배들은 외국에 아부하고 민족허무주의에 이른다. 지금 사회의 사상현황을 보자. 바로 이 두 가지 경향이 모두 자라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각도에서 전면적이고 과학적으로 역사를 선전해야할 중요성을 말해준다.

 

4. 당시 일본이 전쟁의 죄를 회개하게 하지 못하였고, 지금은 스스로 강해져서 중일관계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국가간의 관계는 최종적으로 실력과 이익으로 결정된다. 1945년이전의 반세기동안, 일본은 계속하여 중국을 침략하고 못살게 굴었다. 패전후 오랫동안 침략의 죄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관건요소는 바로 중국의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실력이 가장 강한 미국은 전후에 여러 면에서 일본을 비호한다.

 

많은 중국인들은 여러해동안 항상 일본정객들이 대부분 침략죄행을 부인하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에 분개하며, 왜 독일은 역사를 깊이있게 반성하는데, 일본은 그러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 원인을 알려면, 객관적으로 역사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견해인 "일본은 무조건항복했다"는 선전은 더욱 깊이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 당시 천황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 것은 기실 조건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국체보전"이다. 미국은 자신의 사상을 감소시키고 전후 소련을 견제할 전략에서 출발하여, 이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1호전범인 천황 히로히토 및 그의 중신들은 계속 그 자리를 보전하게 된다. 1급전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즉 현재 수상 아베 신조의 외조부)는 전후에 오랫동안 수상직에 있는다. 현재까지도 일본의 정객중 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들 전범의 후손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때의 침략죄행을 청산할 수 있겠는가?

 

1945년 독일과 일본 패전상황을 비교하면, 그 근본적인 차이가 나치정권은 이미 동맹군에게 철저히 소멸되고, 전후의 동독, 서독정권은 모두 동맹국이 도와서 원래의 반파시스트인사들이 정권을 잡았다. 일본은 패전후, 국가원수와 정부가 모조리 남아있었다. 전후에 그저 미국의 말만 들었고, 내정에 대하여는 일부 '민주개혁'을 진행하였을 뿐이다. 장개석은 대륙에서 실패한 후, 미국은 다시 미일군사동맹을 아시아정책의 기초로 삼는다. 그리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본을 도와주는 정책을 실행한다. 1951년 미국이 주재한 샌프란시스코평화회의에서 중국은 배제된다. 이 회의에서 대일평화협약이 통과되는데 일본으로 하여금 남해도서, 대만을 포기하게 하였을 뿐, 그것을 중국에 돌려준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대만독립'과 남해도서분쟁의 씨를 남기게 된 것이다.

 

미국이 극력 도와줌에 따라, 1950년 일본의 경제생산력은 100억달러를 넘어 전쟁전의 최고수준을 회복한다. 1970년에는 2000억달러를 넘어선다. 그리하여, 일본당국과 상당히 많은 국민들은 자신을 이기고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와준 미국에 대하여는 경외하고 감격한다. 그러나 중국데 대한 태도는 항상 미국의 입장을 뒤따랐다. 미일군사동맹은 신중국에 최대의 침략위협에 대한 것이고, 모택동시대의 지도자들의 대일정책은 주로 일본인민을 쟁취하여 미일동맹관계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전후에 미국은 단독으로 일본을 점령한다. 어떻게 전쟁책임을 추궁할 것인지는 실제로 미국측이 최종 결정했다. 전쟁이 막 끝났을 때, 재건된 일본공산당과 일부 좌익파벌은 일찌기 국내에서 천황과 재벌의 전쟁죄행을 청산하자는 운동을 벌인 바 있으나 점령군의 탄압을 받는다. 다수의 국민은 여전히 신도교의 사상에 속박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거저 약간의 기세를 올리다가 실제 효과는 거의 거두지 못하게 된다. 1946년에서 1948년까지의 동경전범재판의 대상은 주로 "군벌"에 한정되었다. 비록 도조 히데키등 일부 다음 등급의 전범(어떤 사람은 도조 히데키를 '2차대전 3원흉'의 하나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전시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의 책임을 추궁하지만 가장 주요한 전범은 놓아둔다. 그리고 당시 침략전쟁의 지주역할을 했던 재벌을 청산하지 않는다. 전후일본정계는 여전히 이들 재벌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일본의 정치가 필연적으로 우경화하도록 만들었다.

 

1950년대부터, 일본에는 수십년간 지속된 '경제성장'이 있었다 민중이 생활은 대록 제고되고, 좌익운동은 70년대후반부터 점차 퇴조한다. 우익세력은 경제에 기반을 두고 다시 성장한다. 이런 바꾸기 어려운 사실을 보고 소련은 가장 먼저 1956년 일본과 수교하고 더 이상 전쟁이 남긴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소련측은 북방4도를 이미 점령하여 이익을 보고 있으므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중국은 1972년에 수교할 때, 그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중국정부와 민간에서 비록 자주 일본의 중국침략죄행을 폭로하고, 일부 일본인들이 남경대학살을 부인하는데 비난하지만, 일본정부와 사회주류의 역사관을 바꿀 수는 없었다.

 

2차대전이 끝날 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만일 일본사회가 침략죄행을 청산하고 진정으로 인정하게 하려면 반드시 전후에 각급전범을 청산하고 권력자를 교체했어야 했다. 미국의 비호와 일본사회의 한계로 이런 역사적인 기회를 잃어버렸다. 현재 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이미 세상에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보통의 일본민중을 보면, 일부 노년의 인사들이 중국에 대하여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외에, 중년,청년들은 대부분 당시의 전쟁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의 일본민간조사를 보면, 중국에 호감을 가진 비율이 비교적 높다. 1990년대말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여론은 중국에 대한 호감이 계속 내려간다. 중요한 원인은 젊은이들은 중국에 대하여 미안한 감정이 없다. 그리고 본국이 중국으로부터 압력을 받는다고 여긴다. 당연히 일본에 이런 사회풍조가 나타난 것의 근원은 다시 그 집권자들이 중국굴기에 느끼는 불안이 담겨 있다. 그래서 더욱 미국을 따르고 반중국정서를 선동하는 것이다.

 

역사는 거울과 같다. 항상 오늘날의 사람을 비춘다. 메이지유신과 청일전쟁이후, "일강중약(日强中弱)". 일본은 강하고 중국은 약했다. 이런 형세는 일본이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게 만들었다. 당시 중국이 항전승리를 거두었지만, 국력이 쇠약하여 패전국의 존중을 받지 못한다. 전후일본은 군사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장기간 중국에 대하여 우세를 점하였다. 그 결과 중일수교후 중국은 지원을 받는 입장이었다. 현재 중국의 실력이 강해지고 아시아에서 '중일양강국'이 병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2010년 중국경제총량은 일본을 추월하여, 일본을 자극한다. 그리하여 일본의 권력자들은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한다. 이렇게 보면, 최근 중일관계에 긴장된 국면이 나타난 것은 바로 중국이 이미 굴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정으로 일본이 경외의 심리를 갖게 만든 것이다. 강자를 숭상하고 약자를 멸시하는 국민성을 지닌 일본에 있어서 중국이 발전하고 강해지면, 진정으로 존중을 할 것이다. 중국의 국내에서 항전사를 돌아보고 선전하는데 있어서 전면적이고 객관적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비로소 중국인들이 더욱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중일관계를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