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학길림(郝吉林)
이런 말이 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내에 조선군은 같은 핍박받은 입장인 중국백성에 대하여 일본인들보다 훨씬 악독했고, 살인간음방화약탈등에서 일본인보다 훨씬 심했다. 이게 사실일까?
2차대전기간동안, 일본의 식민지로서, 조선은 확실히 상당히 많은 장정이 일본군대에 강제징집되어,대외전쟁에 참가했다. 조선인이 일본군에 참가한 것은 1938년 일본이 조선에서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때부터이다. 이전에 조선인이 군대에 들어가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전선에 인원이 부족해졌고, 그래서 다시 조선의 지원병제도를 강제징집제도로 바꾸게 된다.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약 61만여명의 조선군인 및 군속이 징용되고 그중 일본 육,해군의 군인으로 편입된 자(군속을 포함함)는 23만여명에 달한다. 그뢰에 86만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징용하여 한반도이외의 지역에서 일을 시킨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조선적의 지원병은 수량이 아주 적었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관동군에 편입된 자는 약 3000여명이고, 화북파견군에 편입된 자는 약 1700명이다. 강제징용병은 약 11만명이 한반도이외의 지역에 파견되어 전투에 종사하는데, 그중 육군에 편입된 자가 9만명, 해군에 편입된 자가 2만명이다.
위의 9만여명의 한반도이외로 파견된 조선적 일본육군사병중 반수이상은 중국으로 보내어진다. 전쟁이 끝났을 때, 국민당정부는 일찌기 한국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내에서 조선적 사병을 특별히 우대하고 그들을 한국 "광복군"에 넘겨주어 훈련시키게 했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의 기본역량이 되도록 하였다("광복군"은 장기간 중국에 있었고, 일본이 투항하기전의 사병은 천명에 가까웠다). 광복군에 편입된 조선적 일본군은 약 5만명에 달했고, 북평(북경), 남경등지에서 집중적으로 훈련받는다. 다만 미,소가 얄타회담에서 비밀리에 동아시아의 세력범위를 분할하기로 약정함에 따라 이 부대는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오히려 해산한 후 귀국하기를 요구받는다. 나중에는 "조선적 일본군포로"라는 명목으로 집단적으로 송환된다.
일본후생성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전장에서 사망한 조선적 일본군 및 그 군속은 약 1100여명이다(대만지구는 포함하지 않음). 사망장소는 호남, 호북전장 및 일본점령구로 집중되어 있다. 이를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기본적인 활동궤적은 주로 1943-1945년 국군의 양호(호남,호북)에 대한 정면공격시 및 화북에서 적후방 소탕때이다.
소위 "중국침략일본군중 조선군이 같은 피압박자인 중국백성들에게 일본인들보다 더욱 악독하게 살인방화간음약탈을 일삼았다"는 소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바로 '남경대학살에 참가한 일본군가운대 상당히 많은 일부분은 일본이 한국에서 징용한 한국사병이다. 그들의 잔인한 수단은 일본병에 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언비어이다.
남경대학살은 1937년 12월에서 1938년 2월 사이에 발생한다. 조선적 지원병이 일본군대에 편입되도록 허가된 것은 1938년 3월이다.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제1기 지원병이 훈련소를 마치고 군대에 편입된다. 바꾸어 말해서, 아마도 개별적인 조선적 인원(혹은 통역)이 남경대학살에 참가했을 수는 있지만, 규모를 갖춘 조선적 일본군은 그 당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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