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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장군려(張君勵): 서생 정치참여의 고뇌

by 중은우시 2014. 10. 2.

글: 장가강(張家康)

 

장군려(근현대학자, 초기신유학의 대표자중 한 명)의 정치활동과 학술생애는 62년에 달한다. 그의 조예와 영향은 심원하다. 그는 중국이 현대화국가가 되는데 대한 여러가지 구상을 내놓았고, 지금까지도 역사적 현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강유위, 양게초는 청나라조정이 지명수배하는 중요범죄자가 된다. 이때 12살의 장군려는 상해 방언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명수배당한 강유위, 양계초의 화상을 보면서, 혈관에서 혈액이 용솟음쳤다. 이때부터 그 낯선 단어, 정치는 이전까지 없었던 열정을 쏟아붓는 대상이 된다.

 

1908년, 그는 보산현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일본에 유학을 간다. 그러나, 이런 자금지원에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이공(理工)쪽을 전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고향의 실업을 진흥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흥미가 깊었고, 이과를 버리고 문과를 택한다. 그리하여 와세댜대학 정치학과에 시험을 쳐서 입학한다. 이는 보산현정부를 크게 실망시켰고, 즉시 자금지원을 중단한다. 그는 할 수 없이 청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일본에서, 그는 정식으로 현대학술을 접한다. 다만 그가 배운 것은 일본의 학술이 아니라, 영국, 미국, 독일등 서방국가의 학술이었다. 일본이 그에게 가장 깊게 영향을 준 것은, 일본의 정치체제가 국민들에게 잘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일본이 발전한 경험을 중국이 귀감으로 삼을 만했다. 그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양계초와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정문사(政聞社)의 발기인이 된다.

 

1910년, 그는 와세다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정치학 학사를 취득한다. 1912년, 그는 민주당인의 대표로서, 일본으로 가서 양계초를 영접하여 귀국한다. 풍운이 변화하는 사회전환기에, 그들은 혁명과 폭력을 반대했고, 점진적인 평화적 개량을 주장했다. 만일 그들 간에 무슨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양계초는 군주입헌을 장군려는 민주입헌을 주장했다는 정도이다.

 

1913년 1월, 그는 <헌법신문사> 통신원의 신분으로 독일에 취재를 간다. 나중에 베를린대학에 들어가서 정치학을 공부한다. 1915년 가을, 그는 영국으로 가서 오랫동안 보고싶었던 영국의회를 자세히 살펴본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중국은 전승국의 하나로서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한다. 장군려는 양계초를 따라 비정식대표신분으로 유럽에 가서 파리평화회의를 관찰한다. 이는 그가 두번째로 유럽에 간 것이고, 두번째 유럽행에서 그는 일생에서 두 가지 큰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국가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프랑스의 유심주의철학을 받아들인 것이다.

 

파리평화회의의 강권정치를 보고 그는 국제공법, 공리에 극도로 실망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경제의 연구를 포기하고, 그의 말을 빌리면, '정치국'에서 '학문국'으로 담장을 뛰어넘었다. 즉 사회과학연구에서 철학연구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그는 독일프랑스 유심주의철학을 신봉했다. 이로 인하여 중국전통문화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소, 이로부터 중국문화보수주의 사조를 연다. 원래, 그는 여러 급진적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동서방문화에 대한 태도는 "중국에는 하나도 좋은 것이 없고, 서방은 모든 것을 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더 많은 것은 서방문명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동방문명의 '좋은 점'을 홍양하는 것이다.

 

1923년 2월, 그는 오문조(吳文藻)의 요청으로 청화대학에 간다. 미국유학준비생들에게 <인생관>을 강연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관과 과학관은 다르다. 그 표현내용은 "첫째, 과학은 객관적이고, 인생관은 주관적이다." "둘째, 과학관은 논리의 방법이 지배하고, 인생관은 직관에서 시작한다." "셋째, 과학은 분석방법으로 해야 하지만, 인생관은 종합해야 한다." "넷째, 과학은 인과율이 지배하지만, 인생관은 자유의지이다." "다섯째, 과학은 대상의 동일한 현상에서 시작하지만, 인생관은 인격의 단일성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결론으로 "과학이 얼마나 발달하든지간에, 인생관문제의 해결은 과학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인류 자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을 하자, 즉시 지식계에 큰 파란이 일어난다. 먼저, 정문강(丁文江)은 그 자리에서 비난한다: "과학이 인생을 지배할 수 없다면, 과학이 무슨 소용인가?" 정문강은 그리고 <노력주보>에 <현학과 과학>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이렇게 지적한다. 유럽에서 이천여년간 횡행한 현학(玄學)은 새로 장식을 한 다음, "요란하게 중국으로 달려와서 여기저기 다니며 사기를 친다." "만일 우리가 장군려를 믿는다면, 우리의 인생관은 논리학의 공리, 정의, 방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럼 무슨 물건이 될 것인가?"

 

장군려는 당연히 가만히 침묵만 지키지는 않았다. <북경신보>에 <인생관과 과학을 다시 논하고 정재군에 답함>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정문강의 비판에 대하여 답변을 한다. 그리하여 현학논쟁이 시작된다.

 

제1차세계대전이 인류사회에 조성한 참극은 양계초, 장군려로 하여금 과학만능에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양계초는 그의 저명한 <구유심영록(歐遊心影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절대로 과학파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만능을 인정할 수도 없다." 장군려도 바로 그 뒤를 따른다 <인생관>논문을 발표하여, 인생관을 유과학주의에서 빼내버린다.

 

이때, 서방의 지식계 엘리트들은 서방문명에 경종을 울린다. 1920년, 영국의 저명한 사상가 루쏘는 중국순회강연에서 중국문명을 크게 칭찬하고, 서방문명을 반성한다. 그들은 반성하면서, 서방문명이 계속 이렇게 나가게 되면 예정했던 아름다운 목표는 남원북철(南轅北轍)이 되어 진흙탕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장군려는 바로 여기에서 문제의 실질을 파고 든다.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하여 답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인류는 바로 정신과 물질간의 충돌을 해결하면서, 탐색과 노력을 통하여, 인류자신의 문명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동서문화를 비교대조한 후,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중국은 "공자,맹자이래로 송,원,명의 이학자까지, 내심생활의 수양을 중시하고 그 결과 정신문명이 되었다. 삼백년동안 유럽은 인력이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을 중시하여, 그 결과 물질문명이 되었다." 그는 서방문명과 중국인의 서구화추세는 모두 유과학주의와 공리주의가 잘못된 길로 이끈 것이라고 보았고, 그것은 바로 인류의 자유의지의 정신작용을 경시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반드시 지적할 점은 그는 서방의 공업문명을 모조리 배척한 것이 아니고, 중국인들에게 오히려 서방을 배울 때, 서방문명의 문제점을 기억하고 경계하여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한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그가 과학을 비판한 것은 과학에 모조리 반대한 것이 아니라, '과학능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제창하였다. "과학의 발전은 도덕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 "과학결정의 사용은 논리혹은 도덕상의 표준이 있어야 한다."
 

1945년 8월 6일과 9일,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한다. 장군려는 당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과학이 날로 발전하는 때 반드시 윤리학의 고도에 서서, 과학은 살펴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원자력시대의 도덕론>에서, 원자탄을 망원경, 증기기관차와 비교했다. 그리고 원자탄은 '적국의 인민을 소멸'시킬 뿐아니라, '인류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원자탄의 출현은 반드시 이런 문제를 가져온다. "무기가 가지고 인류를 버릴 것인가? 인류를 가지고 무기를 버릴 것인가?"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류는 반드시 "하나의 큰 각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현재의 과학은 새로운 한계에 부닥쳤다. 바꾸어 말하면, 지식의 발전과 인류의 생존이 병존할 수 없을 때, 지식은 반드시 도덕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 

 

장군려는 정치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망이 아주 강렬했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소용돌이속에서 그는 기껏해야 "정치교육가"와 "정치평론가"에 불과했다. 그는 정치대학을 개설하여, 정치대학을 '민주정치의 실험소'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지 않아 그의 '진보당'관련혐의로 정치대학이 국민당에 접수되고 만다; 그는 또한 사람들과 <신로잡지>를 만들기도 했고, 여러 글을 발표했으며, 유심사관을 발표하고, 국민당의 일당독재를 비판했으며, 소비에트혁명과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무장혁명을 비판했다.

 

그의 이런 언행은 그의 이후 정치활동의 기본적인 노선을 결정하게 된다: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민당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모택동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국공산당과도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 소위 '제3의 길'을 모색하는 당파에 초연한 길을 걷는다.

 

1932년 4월, 장군려, 장동손(張東蓀)등이 발기하여, 중국국가사회당이 북평(北平, 북경)에서 창립된다. 1934년 7월, 국사당은 천진에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정강, 당장을 통과시킨다. 장군려는 중앙총무위원에 당선되고 총서기를 겸하여 당무를 총괄한다. 대회에서 선언을 발표하여, 국사당의 주장을 내놓는다. 거국일치하여 대외에 항거하는 방침, 국가사회주의의 경제건설주장과 민족주의의 입장외에, 중국은 정당정치를 건립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금후 영미의 현행제도의 정신을 취하여, 각 당파의 합작으로 정부에 대권을 수권하여야 한다." 

 

1937년 7월 15일, 국민당은 여산에서 국시(國是)담화회를 개최하고, 각 당파가 함게 국난에 대처하여 일제를 막아내자고 주장한다. 장군려는 요청을 받아들여, 국방참정회 참의원이 된다. 다음해 4월, 그는 국사당을 대표하여 <장개석,왕정위에게 보내는 서신>을 발표한다. "정성으로 단결하여 국난을 함께 헤쳐나가는 뜻", "국민정부를 일치하여 옹호하는 외에, 다른 기사회생의 길은 없다"고 표시한다. 장개석, 왕정위는 금방 반응을 보여, <장군려에 대답한다>를 발표하여 국사당의 태도에 환영을 표시한다.

 

같은 해 12월, 그는 <모택동선생에게 보내는 한 통의 공개서신>을 발표한다. 중국공산당에 이렇게 권한다: "팔로군의 훈련과 지휘를 완전히 장선생의 수중에 위탁하라", "섬감녕(섬서,감숙,영하)특구지제를 취소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잠시 내려놓기를" 권한다. 그는 중국공산당에 무장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였을 뿐아니라, 장개석에게는 일당독재를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그의 이런 구상은 어느 정도 천진난만하고 유치하며, 혼자만의 일방적인 생각이다.

 

1941년 3월, 중국민주정단동맹(간칭 민맹)이 성립된다. 그는 발기인이며 지도자의 한 명이다. 1944년부터, 그는 적극적으로 국통구의 민주운동에 투신한다. 중국이 '장래의 정치는 반드시 각당파가 공동으로 협의하는 민주정치가 되어야 한다"고 바랐다. 국공양당의 담판기간동안 그는 양당이 무기를 내려놓고 화해하기를 적극 추진했다. 그리고 절충의 방안을 내놓는다. 국궁댱당이 모두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였는데, 그 방안은: 첫째, 국가 '주권재민'; 둘째, '국민당은 '특수지위'를 포기한다. '각정당은 모두 국가의 아래에 성립된다', 셋째, '군령통일', 전국의 군대는 '같은 명령을 받고, 두 군대가 서로 대치하는 것을 불허한다.

 

그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 그것은 바로 억지로 국공양당을 그의 정치틀 속에 집어넣으려 한 것이다. 결과는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힘만 들었지 얻는 것은 없고, 바로 무시당한다.

 

일개서생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국시에 열중했으나 항상 공리공담에 머물렀고, 무적방시(無的放矢)였다. 그가 설계한 여러가지 방안은 모두 실패로 끝난다. 이런 '이론상의 거인, 행동상의 난장이'는 항상 그로 하여금 '정치적인 고뇌'를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항상 자조하며 말했다. 정치활동에 참가하는데 대하여, '나도 방법이 없다. 마치 젖은 옷을 입은 것처럼 지금 벗을래야 벗을 수도 없다. 그저 이렇게 입고 지내는 수밖에"

 

1949년 전국해방전날, 그는 인도 델리대학 및 타고르대학의 요청을 받아, 인도로 가서 강의를 한다. 이때부터 그는 해외에서 신유학을 전파한다. 이국타향을 떠돌는 떠돌이신세가 된 것이다. 1969년 2월, 장군려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하니, 향년 83세이다.